선사의 향기

신심명 법문 2

맑은 샘물 2010. 11. 22. 00:29

신심명 법문 2

 

 

 

신심명(信心銘) 법문 2

 

김태완

 

 

 

<신심명 게송 6>

 

不識玄旨(불식현지)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니
徒勞念靜(도로념정) 헛되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 애쓴다.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니 헛되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고 애쓴다.”
이것(손으로 상을 두들기며)을 가리켜서 현묘한 뜻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불교에서는 이것을 ‘반야바라밀’, ‘보리’, ‘중도’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데, 여기에서는 “현묘한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짓든 상관 없습니다. 현묘한 뜻이라 하든, 보리라 하든, 반야라 하든, 하늘이라 하든, 땅이라 하든, 이름은 어쨌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손으로 상을 두들기며)을 저는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손으로 상을 두들기며)을 알지 못하니까, 이것(손으로 상을 두들기며)을 확인하지 못하니까, 이것(손으로 상을 두들기며)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이것(손으로 상을 두들기며)에 통달하지 못하니까, 헛되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고 애쓰는 것이죠.

망상(妄想)이라는 말이 있죠. 망상이란 허망한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생각은 허망합니다. 우리는 생각에 많이 휘둘리니까, 생각에 많은 괴롭힘을 받으니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라서 갈등이 생기니까,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밉죠. 그리하여 ‘아이구, 이 생각을 좀 벗어날 수 없나?’ ‘어떻게 하면 생각을 없앨 수 있을까?’ 하고 이런저런 궁리를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자꾸 생각을 내버리려고 애를 쓴단 말이죠. 그러나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기는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어떤 물건이 아니란 말이죠.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중간에 있습니까? 찾아보면 생각이란 것은 어디에 있는 무엇이 아니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마음이 끊임없이 활동하니까 생각도 끊임없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이 싫어서 생각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생각을 다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생각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일어나든 사라지든 상관하지 말고.” 그러나 이런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이 역시 하나의 생각일 뿐이죠.

사실을 말하면 생각을 버리려고 하든 붙잡고 있으려고 하든 어느 쪽이든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생각을 상대로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든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진실에 접근하는 길로서는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진실은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생각이 있든 없든 진실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진실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도 관계가 없고, 내려놓는 것과도 관계가 없고, 그냥 내버려두고 흐르는대로 보고 있는 것과도 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생각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옛날 이조혜가 스님은 달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마음이 아픕니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이에 달마가 말했습니다.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편하게 해 주겠다.” 혜가가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달마는 “그러면 그대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 주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또 삼조승찬은 혜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아픕니다. 저의 죄를 참회시켜 주십시오.” 이에 혜가가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죄를 사라지게 해주겠다. 우선 그 죄를 한 번 나한테 가져와 보라.” 승찬이 안과 밖 어디에서도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자 혜가는 이미 그대의 죄를 없애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니 ‘죄’니 하는 말들은 이름이요 관념일 뿐입니다. 이름과 뜻은 있지만 이름과 뜻 이외에 다른 무엇도 없습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에 많이 휘둘립니다. 생각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이란 놈을 가져오시오. 생각을 눈앞에 가져오면 그 생각을 없애 버리겠습니다.” 만약 진지하게 탐구하는 입장이라면, ‘생각이라는 게 실체가 없는 놈이로구나!’ 하고 쉽게 판단하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판단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생각에 휘둘림은 계속되고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이 분명해지면 생각은 더 이상 문제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이죠. 이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이 분명해지면, 생각이 저절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든 하지 않든 모두가 바로 이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입니다.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부담될 것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뿐입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에만 관심을 가지십시오. 이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것만 보고 있으면, 생각이라든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이 마치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주변의 경치 구경하듯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의미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렇다고 생각의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고, 해결이 되려면 이것을 한 번 확인하셔야 됩니다.

흔히 “번뇌를 소멸시킨다”고 하는데, 우리 대승불교는 말이죠, 번뇌를 상대로 하여 번뇌를 소멸시켜 번뇌가 없는 적멸(寂滅)이라고 하는 열반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표현은 “번뇌를 소멸시킨다”고 하지만, 이 말을 ‘번뇌는 내버리고 번뇌가 없는, 번뇌가 적멸된 열반을 얻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옳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이해는 취하고 버리는 분별입니다. 이런 분별은 대승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대승불교는 번뇌의 실상(實相), 즉 번뇌라는 놈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밝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온갖 번뇌의 실상은 곧 내 자신의 실상이고, 불법(佛法)의 실상이고, 깨달음의 실상이고, 마음의 실상이고, 이 우주의 실상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온갖 경계를 우리가 분별해서 경험할 수 있지만, 그 실상은 딱 하나입니다.

이렇게 대승불교가 번뇌망상의 정체를 밝힌다고 하면, 무언가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 일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다만 이것(손가락을 들어올리며)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뜻인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체의 실상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분별하면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 같지만, 이 모두의 실상은 이(손가락을 들어올리며) 하나뿐입니다. 이(손가락을 들어올리며) 하나만 명확하게 되면 모든 번뇌망상이 그대로 번뇌망상이 아닌 거예요. 번뇌망상이 곧 번뇌망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보이며)을 일러 법(法)이니 실상이니 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하나만 밝히면 됩니다. 제가 가리켜드리는 것도 다만 이것(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하나뿐입니다. 단지 이것뿐입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비유를 들면,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고 두통이 있으면 진통제를 먹고 이렇게 증상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몸에서 나타나는 수만 가지 병 모두를 한꺼번에 소멸시켜서 일시에 본래의 건강한 몸으로 돌이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 제3분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위 없이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모조리 해탈시키지만, 사실은 해탈한 중생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본래 중생들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실상일 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번뇌는 단 하나의 실상일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한 개 실상만 분명하면 즉시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모두가 분명해지는 겁니다.

죄의식이란 게 있죠?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우리는 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 참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회를 함으로써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그런 참회와는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죄 혹은 죄의식의 실상을 밝히기를 요구합니다. 죄 혹은 죄의식의 실상을 밝히면, 죄악과 참회라는 차별이 소멸해 버립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죄의식을 가져야 하고 죄를 참회하여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불교에서는 좀 다른 것입니다.

『유마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마경』의 「제자품」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부처님께서 계율을 잘 지키기로 이름난 우파리에게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여라.”라고 하시니, 우파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감히 그분을 문병하러 갈 수 없습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옛날 두 명의 비구가 있었는데, 계율을 어기는 행동을 하여 부끄러워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부처님께 묻지는 못하고 저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우파리시여, 저희들은 계율을 범한 것을 진정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감히 부처님께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저희들의 의심과 후회를 풀어 주셔서 그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저는 곧 그들을 위하여 여법(如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때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파리시여, 이 두 비구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시면 안됩니다. 마땅히 곧장 죄를 소멸시키고,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그 죄의 본성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더럽기 때문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중생이 깨끗합니다만,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더러운 죄도 그렇고, 모든 법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파리시여, 마음이 해탈을 얻을 때에 더러움이 있습니까?’ 저는 말했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모든 중생의 마음에 더러움이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파리시여, 망상(妄想)이 더러움이면 망상 없음이 깨끗함이고, 거꾸로 됨이 더러움이면 거꾸로 됨 없음이 깨끗함이고, 나를 취함이 더러움이면 나를 취하지 않음이 깨끗함입니다. 우파리시여, 모든 법은 생기고 사라지면서 머물지를 않으니, 마치 환상과 같고 번개와 같아서 상대할 만한 법이 전혀 없고, 한 순간도 머물지 않습니다. 모든 법은 전부 허망한 견해(見解)이니, 마치 꿈과 같고 불꽃과 같고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모습과 같아서 망상(妄想)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을 일러 계율을 받든다고 하고, 이렇게 아는 것을 일러 잘 참회시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두 비구는 말했습니다. ‘뛰어난 지혜로다. 이것은 우파리께서 미치지 못하시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문병을 갈 수 없습니다.”

죄와 참회를 분별하는 우파리는 유마거사 앞에서 입을 열 수가 없었지요. 죄가 어디에도 없다면 참회는 또 어디 있느냔 말이에요. 죄를 짓는다, 참회를 한다는 이게 전부 분별심입니다. 우리가 분별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실상에는 분별이 없어요. 아무런 차별도 분별도 없단 말이에요. 이조혜가와 삼조승찬 사이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지요. 승찬이 혜가를 찾아와 절을 하고는 물었습니다. “저는 몸이 병에 걸려 아픕니다. 스님께서 죄를 참회시켜 주십시오.” 이조가 말했습니다. “죄를 가져오너라. 그대를 참회시켜 주겠다.” 거사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조가 말했다. “그대의 죄를 다 참회케 하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 사람들은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죄도 없고 참회도 없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탈이 없겠구나 하고 말이죠. 어린아이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듯이, 분별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 앞에서는 진리를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직 진실한 믿음을 갖춘 사람만이 진리의 가르침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업(業)의 법칙을 가르쳐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진리에 목이 마르고 참된 믿음을 갖춘 사람에게는 분별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가르쳐서 그 분별망상에서 빠져나오도록 합니다.

진리가 분별 밖에 있다고 하는 말은 진리가 분별 밖에 있다고 분별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진리가 분별 밖에 있다고 분별한다면, 모든 분별을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다시 분별할 것이고, 마침내 진리만 알면 되고 모든 분별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고 다시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분별과 분별 없음을 이렇게 분별하는 것이 바로 모두 분별일 뿐인데도, 스스로 분별 속에서 분별을 없애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지요. 마치 꿈을 깨어나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진리가 분별 밖에 있다고 분별한다면, 진리도 결국 분별 속에 있을 뿐입니다.

진리가 분별 밖에 있다고도 분별하지 마시고, 진리와 비진리라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입니다. 죄라는 생각도 하지 마시고, 참회라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입니다.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에는 분별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일이 없어요. 우리가 얼마든지 분별을 하더라도 이 모든 분별이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죄의식도 없고 참회도 없고 진리도 없고 허위도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모든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지만, 그 모든 개념들이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이어서 아무런 개념도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무한한 분별을 행하지만, 그 모든 분별이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이어서 아무런 분별도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모든 행위를 하지만, 그 모든 행위가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이어서 아무런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면서도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생각, 우리의 판단, 즉 우리의 분별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와 허위, 선과 악, 죄와 벌, 가치와 무가치, 신과 인간, 부처와 중생 등등 이 모든 개념들은 다만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 버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든 개념들은 필요에 의하여 만든 것들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만든 것들이지 우리와 상관없이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개념들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마치 이런 개념들이 우리와는 상관 없이 본래부터 있는 것인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에 의하여 만든 도구가 도리어 주인이 되고, 우리 자신이 도구에 지배를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편리한 도구라고 하더라도 도구는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가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도구는 우리가 만들어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만든 개념을 진실이라고 숭배하는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이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개념들입니다. 자신이 가진 개념은 진실이고 남이 가진 개념은 우상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개념이든 어떤 이름이든 그 이름과 개념을 진실이라고 여긴다면 모두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은 바로 우리가 만든 개념의 감옥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신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진리는 이러이러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분별이 우리 자신을 구속하는 감옥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단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일 뿐인데도, 그것들이 본래 그런 것인양 여긴다면 헛것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그렇게 있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개념도 이름도 아닙니다. 개념이나 이름을 알고 있을 때나 모를 때에나, 분별을 하고 있을 때에나 분별이 없을 때에나, 의식이 있을 때에나 의식이 없을 때에나 본래의 우리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본래의 우리이다 라는 분별을 할 수도 없고, 개념을 가질 수도 없어요.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이죠. 이런 까닭에 불교 공부, 선(禪) 공부는 곧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회복하는 공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이름일 뿐, 본래면목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하고 분별되는 개념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진리[법(法)]는 진리라는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름을 진리라고 부를 뿐이다.” “진리[법(法)]라는 이름으로 어떤 것도 얻을 것은 없다.” 라고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반야심경』에서는 “코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없고, … 삶과 죽음도 없고, 삶과 죽으로부터의 해탈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생겨나지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만법(萬法)에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모두가 우리가 만든 이름일 뿐, 진실은 그런 이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있다’와 ‘없다’, ‘맞다’와 ‘틀렸다’, ‘이다’와 ‘아니다’ 조차도 모두 이름일 뿐이요, 개념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생각이 의지하여 머물 곳은 없습니다.

다만 이(손가락을 세우며)뿐입니다.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손가락을 세우며)뿐입니다.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잡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손가락을 세우며) 아주 분명한 겁니다, 분명한 거예요. 모두가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입니다. 언제나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인데, 우리는 교육받고 자신이 분별하는 개념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분별이라는 꿈 속에서 개념이라는 환상을 볼 뿐, 전혀 밝게 깨어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둠 즉 무명(無明) 속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고, 꿈도 없고 깨어남도 없고, 단지 이(탁자를 두드리며)뿐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말이 다만 이(탁자를 두드리며)뿐이고, 듣고 있는 모든 말이 다만 이(탁자를 두드리며)뿐입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은 아는 것도 아니고, 느끼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라고 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기(탁자를 두드리며)에 한 번 통해야만 비로소 모든 분별이 쉬어지고 다만 이(탁자를 두드리며)뿐이게 됩니다. 여기(탁자를 두드리며)에서 모든 분별이 쉬어지고 막힘 없이 통하죠. 그러므로 도(道)에 통한다고 합니다. ‘도가 이런 거구나!’ 하고 아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견해도 개념도 없이 다만 이렇게(탁자를 두드리며) 통하는 것이죠. 통하는 것은 곧 분명한 것입니다. 이(탁자를 두드리며) 이상 더 분명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무엇도 이(탁자를 두드리며) 이상 더 분명할 수 없습니다. 통하는 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이(탁자를 두드리며) 이상 더 진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 무엇도 이(탁자를 두드리며)보다 더 진실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통하지 못하고 생각 속에 있는 사람은 여기(탁자를 두드리며)에서는 앞뒤가 꽉 막혀서 깜깜한 어둠 속에 있게 됩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는 생각이 접근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분별로써는 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꽉 막히게 됩니다. 이(탁자를 두드리며) 앞에서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은산철벽이 앞을 가로막는다느니 온통 의문만 있을 뿐이어서 의문의 덩어리 즉 의단(疑團)이니 하는 말을 합니다. 이(탁자를 두드리며)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사실은 이처럼 꽉 막혀서 깜깜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생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이렇게 꽉 막혀서 깜깜하면 견디기 어려워하지만, 모든 선입견과 장애를 버리고 진리에 접근하려고 발심한 사람에게는 이처럼 꽉 막혀 깜깜한 것이 좋은 일입니다. 꽉 막혀 깜깜한 곳에 머물러 더욱더 생각이 쉬어지게 되면, 문득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 통하게 됩니다. 이것에 통하면 막힘과 통함, 깜깜함과 밝음의 차별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 통하면, 단 한 순간도, 단 백만 분의 일초도 다른 일이 없어요. 언제나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고, 전체가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탁자를 두드리며)에 있고, 다만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만 마음일 뿐이고, 삼라만상이 모두 의식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 통해야 합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 통해야 비로소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 실감되고, 오직 진실한 것은 이것(탁자를 두드리며)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탁자를 두드리며) 하나가 진실할 뿐이고, 온 세계가 이(탁자를 두드리며) 하나의 진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허망함과 진실함이 따로 없습니다. 오직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일 뿐이죠. 선(禪) 이른바 화두라는 것을 제시하는데, 화두를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도가 뭡니까?” 하고 물으니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했고, “부처가 뭡니까?” 하고 물으니 “똥 닦는 막대기.”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답은 모두가 바로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화두에는 이해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을 보여 주고,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을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탁자를 두드리며)에 통하고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이 확인되면, 온몸에서 온 존재에서 온 우주에서 다만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 확인될 뿐입니다. 감각적으로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온 우주와 나가 하나가 되어, 우주도 없고 나도 없이, 온 우주 전체로서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이 확인됩니다. 무정물(無情物)이 진리를 말한다고는 말이 있지요? 해가 진리를 말하고, 달이 진리를 말하고, 바람이 진리를 말하고, 나무가 진리를 말합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입니다. 다른 것이 없어요. 다르다는 생각이나 말조차도 다만 이것이죠.

오직 이(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하나가 진실할 뿐, 두 번째는 없어요.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을 확인하여 충분히 익숙하게 되면, 비로소 지금까지 진실을 모르고 헛된 것들을 쫓아 살았다는 사실이 실감됩니다. 전도(顚倒)된 중생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진실로 이(손가락을 들어 보이며)뿐인데, 지금까지는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을 모르고 모습과 분별에만 의지하여 살았으니, 이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마음을 마니주(摩尼珠)라고 하죠. 마니주란 투명한 수정구슬입니다. 수정구슬을 눈앞에 놓고 보면 앞에 나타난 모든 장면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근데 수정 구슬 안에는 사실 아무런 모습이 없어요. 모습은 나타나지만, 그런 모습은 수정구슬 속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온 세계가 나타나지만, 마음을 떠나 다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곧 세계요, 세계가 곧 마음입니다. 마음과 세계가 따로 있지 않으므로, 마음이니 세계니 하는 것은 단지 이름으로 분별될 뿐이고 실재로는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물론 마음이 수정구슬처럼 그렇게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진실에 접근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하나를 가리켜 드리기 위해서, 또 모습에 속지 말라는 취지에서 이런 비유를 드는 거죠. 진실은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손을 흔들며) 이것은 머리로써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 퉁기며) 이것이 전부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티끌 하나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고 하잖아요.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리며) 여기서 온 우주를 모조리 확인하는 겁니다. 차를 마신다, 시계를 본다, 선풍기를 튼다, 밥을 먹는다, 모기에 물렸다 하는 등의 모든 경우에 이 하나를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하나를 깊이 확인해 보면, 결국 겉으로 보이는 모양은 아무리 다양하게 나타나도 모두가 결국 이(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하나일 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무리 다양하게 나와도 확인되는 건 이거 하나 뿐입니다.

앞에서 우상숭배를 말씀드렸는데, 우상숭배는 좋지 못한 것입니다. 왜 좋지 못하냐 하면 자기 스스로가 만든 자기의 생각을 주인으로 삼고 그 생각을 만들고 있는 자기자신은 오히려 종이 되어 주객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자기가 소외되는 것이 바로 번뇌입니다. 주인도 손님도 여기(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에서 일시에 소멸되어 버립니다. 영가현각 스님은 ⌈증도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번 뛰어서 곧장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이 분명해지면 모든 분별망상이 일시에 소멸되죠.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은 복잡하고 현묘한 것도 아니고, 저 위에 있는 높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낮고 가장 가까운 것이죠.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다만 우리가 분별에 싸이고 허망한 관념에 의지하여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고 하는 습관을 익혀 온 세월이 오래 되었고, 또 깨달음은 높고 멀리 있는 것이고 진리는 현묘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깨달음을 매우 생소하게 여길 뿐입니다. 진리와 깨달음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일이므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참된 관심과 끈기만 있으면 반드시 자신의 본래면목을 되찾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들 가운데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깨달음은 의무이고 특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깨달음을 얻을 기회입니다. 그러하니 꼭 이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의무감 내지는 부담이 있어야 합니다. 빚진 사람이 꼭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듯이 부담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이 문제에 매달리게 되고, 결국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게 됩니다. 물론 바른 가르침을 들을 수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기회는 훨씬 커집니다. 그러므로 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바른 가르침을 들어야 자기도 모르게 쉽사리 바른 길로 갑니다. 만약 잘못된 가르침을 듣고서 잘못된 길로 가면 시간과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가르침일까요? 어떤 분별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다만 이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만을 바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잘못된 가르침일까요? 생각으로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는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모두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고요히 하려 애쓴다.”는 것은 버리고 취하는 잘못된 가르침이고 헛된 일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분명히 나와 있듯이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으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손을 흔들며) 이것을 어떻게 더하고 빼겠습니까? (탁자를 두드리며) 이것이 어떻게 생겨나고 사라지겠습니까? (손가락을 퉁기며) 여기에 어떤 분별이 있겠습니까? (죽비를 집어 들며) 여기에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무심선원     http://www.mindfree.net 보기

 

 

 

 



 

 

'선사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의 지침  (0) 2010.12.11
신심명 법문 3  (0) 2010.11.22
신심명 법문 1  (0) 2010.11.22
신심명 읽기 3.  (0) 2010.11.22
신심명 읽기 2.  (0) 2010.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