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금의 울림

금강경 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맑은 샘물 2010. 2. 10. 20:05

 금강경 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불고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기심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 千萬佛所

이차위실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 천만불소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종제선근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 세존이시여, 어떤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거나 글귀를 보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런 말 하지 마라. 여래가 열반한 뒤 최후의 5백년에도 계(戒)를 받아 지니고 복(福)을 닦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이러한 글귀에 신심을 내고, 이러한 이치로써 진실을 삼으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세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요.

  한량없는 천만억 부처님 처소에서 많은 선근을 심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 글귀를 보고 한 생각이나마 청정한 믿음을 내느니라. "

 

"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으리라는 것을 다 알고 다 보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더 이상 <나>라는 모양이나 남이라는 모양이나 중생이라는 모양이나

  수명에 대한 모양이 없느니라.

그리고 법이라는 모양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모양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런 연고로 법도 응당히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것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나니, 이러한 이치로 인해

여래는 말씀하시기를, " 그대 비구들은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 처럼 알라 " 고

하였노라.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는가 ? "

 

 

 

 

 

 

 

 

월호 스님의 한글 넉자배기 금강경

 

 금강경 제6분과 : 올바른 믿음은 드물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여,

 

자못 어떤   중생들이   이와 같은   언설 장구   얻어듣고   진실스런   믿마음

 

일으킬 수   있습니까?

부처님이    말하셨다.

 

그런 소리   하지마라.  여래 멸후   후오백세   계를 갖고  복을 닦는  사람 있어,

 

이 글귀에   믿는 마음  일으켜서    실다움을   삼는다면,   응당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서너 다섯   부처님께   복 지은 게   아니니라.

 

이미 무량   천만 부처   처소에서    온갖 선근  심었으며,   이 글귀를   듣고서는

 

한번 생각   일지라도    맑은 믿음    낸 이로다.

 

 수보리야,

 

여래로선   이런 중생   무량 복덕   얻었음을   모두 알고   모두 보니,   왜 그러냐?

 

이와 같은  중생들은   `나`라거나  `남과 다른  나`라거나   `살아있는    나`라거나

 

`목숨이-   계속되는    나`라 하는  그런 생각   일체 없고,   옳다 하는   생각[法相]이나

 

틀리다는   생각[非法相]조차    일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수보리야,

 

이와 같은    중생들이   고정관념   갖는다면   아중생ㆍ  수자상에   집착함

 

되는 거며,   옳다 하는  생각이나   틀리다는   생각 또한    아ㆍ인ㆍ중생  ㆍ수자상에

 

집착함이     되구나.

 

그러므로     법이라고   취해서도    아니 되며   비법 또한   취해서도   아니 된다.

 

이와 같은   이치로서    여래 항상   설하기를    비구들아,   나의 설법   뗏목처럼

 

생각하라    하였으니    법도 응당    버리거늘   하물며-       비법이랴.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

 

월호스님 금강경강의 : BBS 불교방송에서

 

 

 

 

 

 

 

해설

 

금강경 正信希有分 (第六) 제 6 : 정신희유분 (바른 신심의 희유 )

① 실신(實信) :
범본에는 bhutasamjnan utptdayisyanti로 '진실이다 라는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유지역본은 '생실상(生實相)'으로, 진제역 · 급다역본은 '생실상(生實想)'으로 하고 있다.

② 후오백세(後五百歲) :
원어는 pa cim y m p nca- aty m이다. 제2의 오백년을 지칭하는 것.
부처님(석존)은 자신이 열반한 뒤에 다가 올 일들을 500년씩 다섯번으로 잘라서,
그 각각의 500년을 1기로 하는 예언을 하셨다. 이것을
오종오백년(五種五百年), 오오백년(五五百年), 오오백세(五五百歲)라 한다.
첫 500년 동안은 해탈견고(解脫堅固)하다고 하셨다.
즉 지혜가 있어서 해탈의 果를 증득한 사람이 많이 나고 정법이 세상에 행해지며,
교(敎)의 수행과 증과(證果)의 셋이 존재하는 시기라 하여 정법시(正法時)라 하였다.

두번째 오백년 동안은 선정견고(禪定堅固).
곧 가르침이나 수행을 충실하게 닦는 사람이 많아 불법이 성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敎)와 수행은 있으나, 증과(證果)가 없는 시기이고, 그 후로는 말법(末法)의
시기로서 교는 있으나 수행도 증과도 없는 멸법(滅法)의 시대가 온다고 하셨다.
이 설에 따르면 제2의 500년은 상법(相法)의 시대가 된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이르게 되면 불교가 어지러워지고 변동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세번째 500년 동안은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
곧 불경을 많이 배워 독송 · 학습하는 사람이 많은 시기라는 것이다.

네번째 500년 동안은 절이나 탑을 세우는 사람이 많이 날 것이므로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라 하셨다.

다섯번째 500년은 점점 불법이 쇠미하여 불법에 대한 논쟁이 많아질 것이라 하여,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라 하였다.
이 500년 동안은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증과도 없는 시기라 하여, 말법시(末法時)라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후오백세는 다섯번째 500년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③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持戒修福) :
계(戒)란 범어 실라(Sila)의 의역인데, 불교도로서 해서는 안되는 금제(禁制),
즉 불교도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다. 계에는,
대승계(大乘戒)에는 삼귀계(三歸戒)가 있는데,
삼취정계(三聚淨戒), 십중금계(⇔십중대계; 十重禁戒), 48경계(四十八輕戒)를, ☞ 참고내용
소승계(小乘戒)에는 5계, 8계, 10계 등의 재가계(在家戒)와 비구의 250계,
비구니의 348계 등이 있다. - 지계는 계율을 잘 지켜서 성실하게 수양을 하는 것이고,
수복(修福)은 공덕을 쌓아 복과 덕을 닦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소승계(小乘戒)로 표현이 되는 내용을 살펴보면,
비구: 250 계_(남자스님이 지켜야하는 필수 계율)
비구니: 348 계_(여자스님이 지켜야하는 필수 계율)
사미: 10 계_(미숙한 남자스님이 지켜야하는 필수 계율) ☞ 십계 ↓
사미니: 10 계_(미숙한 여자스님이 지켜야하는 필수 계율)
우바새: 5 계_(남자신도가 지켜야 할 필수 계율) ☞ 오계/십계(五/十戒)
우바이: 5 계_(여자신도가 지켜야 할 필수 계율)
보살: 48 계_(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선택 계율)
모든 불자: 10 선계_(계를 받지 않아도 지켜야하는 계율) ☞ 10선 참고내용
삶의 모습 속에서의 가르침(지켜야 할)내용,
즉 세간의 실천(가르침; 계율)법을 뜻하는 내용인 것이다.

④ 선근(善根) :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좋은 因(요인), 즉 그 원인의 뿌리라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행업(行業)에 선근을 심으면 반드시 선과(善果)를 맺고,
악인(惡因)으로는 반드시 악과(惡果)를 얻는다는 인과응보의 윤리관을 내세운다.
선한 과보를 얻기 위해서는 선과의 근본이 되는 선근을 심어야 한다.
온갖 선을 내는 근원인 세 가지를 삼선근(三善根)이라 하여,
1)_탐하지 않고(無貪), 2)_시기하지 않고(無瞋), 3)_어리석지 않은(無癡)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래서 탐(貪)하고 시기하고(瞋) 어리석은(癡) 것을 인간의 삼독심(三毒心)이라 말하고 있다.

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如來 悉知悉見) :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함은, 부처님의 말씀을 더욱 믿게 하려는 다짐의 말씀으로서,
'선근을 심은 중생은 나중 오백세에도 이 經을 그대로 믿으리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고 방편의 말씀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할까봐
'다 본다' 하심으로써 그저 막연한 짐작이 아니요, '다 안다'고 하심으로써 눈앞에 보이는 것 뿐만이 아님을 확실히 하신 것으로, 부처님은 거짓이 없다.
진실의 상징인 여래의 명예를 걸고 이 사실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고 그저 믿으라는 뜻이 담겨있다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사물을 관찰하는데 4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 이를 사량(四量)이라 하는데,
현량(現量) · 비량(比量) · 사량(似量) · 성언량(聖言量)이 그것이다.
1. 현량(現量)은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를 보고 소인줄 아는 것이다.
2. 비량(比量)은 조그마한 단서에 의해 추측하여 아는 것으로
담넘어 뿔을 보고 그 밑에 소가 있을 줄 짐작하는 것이다.
3. 사량(似量)은 잘못된 추측으로서 현량과 사량 양자의 경우에 다 걸린다.
즉 현량의 경우의 사량일 경우 소를 보고 말인 줄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를 사현량(似現量)이라 한다.
그리고 비량인 경우의 사량일 경우 담넘어 뿔을 보고도 죽순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를 사비량(似比量)이라 한다.
4. 그러나 이들은 모두 현상계를 관찰할 때의 일로서 부처님의 말씀이나
그밖의 다른 성인들의 말씀에 의해 그대로 믿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성언량(聖言量)이라 한다.

예컨대 극락세계에 연꼿이 있다든가, 지옥세계가 어떠어떠하다든가 하는 것은 현량이나,
비량으로 알 바가 아니므로 성언량에 의해서 인식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경우도 성언량이다.
즉 오늘날의 세상을 말세라고들 많이 말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이 경의 말씀을 진실이라고 믿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과거에 많은 선근을 심은 사람임을 성언량에 의해 믿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⑥ 법상(法相) :
원어는 다르마-삼즈나(dharma-sa jn )이다.
모든 법의 모양을 말하고, 만유(萬有)의 그 모양 자태를 법상(法相)이라 하는데,
만유(萬有)는 그 본바탕은 한 가지이나 그 외부에 나타난 모양은 각각 다르다고 하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dharma)은 이법(理法) · 경전(經典) · 설법(說法)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특히 이법을 의미하는 때가 많다.
여기에서는 '실세가 없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일체법(一切法)

⑦ 뗏목의 비유(筏喩) :
생사의 고락, 윤회의 괴로운 '이 언덕(此岸)'에서 티없이 깨끗한(淸淨無垢)
'저 언덕(彼岸)'으로 가기 위해 괴로움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데에는 많은 수행이 필요하다.
즉 [베풀고(布施), 계를 지키고(持戒), 참고(忍辱), 노력하고(精進),
마음을 가라앉히고(禪定), 지혜를 개발하는(智慧)] 등 많은 수행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고해라는 바다를 건너 저 언덕에 이르는 데 필요한 뗏목(筏)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뗏목은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저 언덕에 건너간 후에는 이 뗏목은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뗏목이 물에 흐르다가 한 모퉁이라도 걸리게 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는 것과 같이,
중도에서 수행을 게을리하면 정진(精進)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뗏목의 비유는 불경 도처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타고 간 뗏목은 일단 버리고 나면,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만유(萬有)에 대한 집착을 갖지 말아라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집착을 버려라'고 하는
가르침도 결국은, 또 다른 집착일 뿐이라는 것을 설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법을 설하신 것이다.
<중아함경 제54권 아리홀경>에서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장야(長夜)에 벌유(筏喩)의 법을 설하여 기사(棄捨)하게 하고자 하며,
받아들이지 않게 하고자 한다. ···세존은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내가 장야에 벌유의 법을 설하여 기사시키고자 하고, 받아들이지 않게 하고자 한다.
만일 그대들 중 나의 장야에 벌유의 법을 설함을 듣는 자는,
마땅히 이로써 이 법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하물며 비법(非法)에 있어서랴.'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