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 KBS 다큐1 - 한반도 운명의 격전 1편, 동아시아 뒤집히다-청일전쟁
‘KBS 다큐1 광복70년 기획 한반도 운명의 격전 1편, 동아시아 뒤집히다-청일전쟁’
120여 년 전, 동아시아 침략전쟁이 시작된다.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이
중국에 이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전쟁의 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의 평화,
참으로 이상한 친절이었다.
조선은 개전과 더불어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고,
종전과 더불어 일본의 영향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었다.
대한민국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100여 년 전의 격전,
청일전쟁을 재조명해본다.
▪ 동학, 봉기하다
1894년 전북 고부, 전봉준의 주도로 동학군이 봉기한다. 봉기의 목적은 보국안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 조선 왕조의 부정부패를 바로잡는 것이다.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전주성까지 진입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목적으로 조선에 진출한다. 일본, 중국, 조선의 동학군. 대치된 세 국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 청일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됐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습격한다. 조선의 궁궐수비대가 먼저 일본군에게 공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도발이었다. 일청전사 초안에는 경복궁 습격 사건의 전개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일본은 청나라와 개전하려는 명분을 얻고자 했다. 경복궁을 습격하여 조선정부로부터 청군을 조선의 영토 밖으로 쫓아내 달라는 부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일본. 드디어 청일전쟁 시작의 구실이 생긴 것이다.
▪ 예상치 못한 일본의 압승!
전쟁은 해전으로 시작됐다. 아산 앞 풍도에서 일본함대가 청의 함대를 침몰시키며 일본은 승리를 거둔다. 안성천에서의 첫 육상전투와 이어지는 평양전투에서도 일본은 대승을 거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압승이었다. 이후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맞붙는다. 황해해전, 전 세계 해군이 주목한 세계최초의 근대식 해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연합함대의 진형과 전술을 전 세계 해군이 참고하게 된다. 이제 중국 대륙도 황해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 청일전쟁은 한청일 전쟁이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그 때, 동학군이 다시 봉기한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벌인 것이 동학군의 재봉기 원인이었다. 수만 명의 동학군들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우금치를 돌파하면 공주를 지나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수는 불과 200명이었지만, 동학군은 처참하게 패배한다.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군은 일본군의 신식 무기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우금치 전투 이후 일본군은 동학군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학살된 동학군은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는 청일전쟁이 한청일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던 문서도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 청일전쟁과 조선의 독립?
청일전쟁 직후,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와 일본은 강화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의 1조가 명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조선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라는 것이다. 조선은 원래 그 누구의 식민지도 아니었다. 왜 청나라와 일본과의 전쟁에서 조선독립이 쟁점이 된 것일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했다. 독립이 아닌 독립이었다.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떼어놓은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다. 청일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45년 항복을 선언하기 전까지 한반도와 아시아를 무대로 5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KBS 다큐1 - 한반도 운명의격전 2편, 끝나지 않은 패권-러일전쟁
▪ 최초의 세계대전, 러일전쟁
세계0차대전이라 불리는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의 무대 뒤에는 이들 두 나라를 부추겼던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있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의 영토도 아닌 만주와 한반도를 전장으로 삼아 전쟁을 벌였던 것일까. 20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전쟁의 세기로 이끌었고,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러일전쟁. 그것은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벌어진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다.
▪ 아시아의 작은 나라, 거대강국 러시아를 쓰러뜨리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세계 최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맞붙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은 강국 러시아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전장에서의 전술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외교전술, 그리고 러시아 내부 분열 공작에 이르기까지 거대 강국 러시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나갔던 일본의 전략전술을 파헤쳐본다.
▪ 외교 정책의 한계, 무너진 조선
일본의 대륙침략정책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한반도를 놓고 충돌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외세 의존적 외교정책만을 펼쳐나갔다. 급기야 러일전쟁 발발 18일 전, 전운이 감도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택한 것은 전시중립선언이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열강들이 전시중립선언을 승인하는 답을 보내왔다. 그러나 끝내 화답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 바로 미국이었다. 과연 미국은 왜 이 같은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당시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취했던 외세 의존적 외교가 지닌 한계점을 살펴본다.
▪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열강들의 밀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5년 뒤 한국을 병합하는 데 성공한다. 과연 일본은 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한국 병합을 곧바로 단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평화회담으로 유명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측으로부터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는 못했지만, 대신 청일전쟁 이후 지상과제였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은 확실히 보장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보호의 내용이었다. 열강이 승인한 일본의 한국 보호란 한국의 독립까지 훼손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이에 일본은 치밀한 전략을 세워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와 영국을 상대로 한 이해관계를 이용한 비밀 외교전이었다. 100여 년 전 한반도를 놓고 일본과 열강들 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그 비화를 추적해본다.
▪ 러일전쟁, 그 후 110년...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러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평화는 사라졌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은 더욱더 커져만 갔고, 반세기동안 일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다른 나라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자신 역시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일본은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겠다고 밝힌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과연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 그는 한때 독립협회장이었다.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을까? 을사늑약에 서명하는 순간, 그가 그린 조선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매국의 이름으로 남은 이완용. 그의 행적을 추적한다!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주변 열강들은 조선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에 뜻이 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는 독립문을 세운다. 독립문 기공식에서 이완용은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조선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하려고 하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독립협회 창립 위원장이기도 했던 이완용. 그가 을사늑약에 서명하고, 친일 매국노로 변신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완용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익힌 그는 주미공사관에 파견되어 2년간 서기관으로 일한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친러파와 연합해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해 최고의 실세가 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한다. 정치적 고립 상태에 빠진 이완용.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도착한다.
을사늑약에 서명한 뒤, 이완용은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찾으면 된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5년 후, 그는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주는 한일강제병합 문서에 서명한다.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경찰권을 일본에 넘기고, 의병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한국인 헌병보조원 제도까지 제안하는 이완용. 3.1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나 경고문을 발표. 내선일체와 일본어 교육을 강조한다. 그는 계속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 협조한다.
정미칠조약과 한일합방 대가로 받은 이완용의 은사금 금액은 25만원. 지금의 50억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각종 하사금 수령과 국유 임대지 무상 수령을 통해 엄청난 차익을 얻은 이완용. 1925년 당시 그의 재산은 600억원에 이른다. 그는 어떻게 이런 큰 부자가 되었을까? 경성제일의 현금 부호라 불렸던 이완용의 축재 과정을 밝혀본다.
1926년 이완용은 죽음을 맞이한다. 일본 순사들의 호위 아래 진행된 그의 장례 행렬은 호사스럽고 화려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던 이완용. 그러나 역사의 냉혹한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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