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의 향

생명보다 더 귀한 스승

맑은 샘물 2010. 2. 14. 08:46

생명보다 더 귀한 스승

흠모 (欽慕) / 현웅 스님의 잊을 수 없는 두 분 스승

 

 

 

 

 

 

선원 육조사 현웅 스님

 

 

 

 

 

서울 성북동 아리랑 고갯마루 막다른 골목에 육조사가 있다. 울며불며 넘는 아리랑 고개라더니, 이 고개만 넘어서면 옛날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희망의 세계가 있을까. 육조사는 그 고갯마루에 주막처럼 앉아 있다. 인생의 가파른 고개를 넘는 사람들, 혹은 이욕(利慾)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 헐떡이는 숨을 내려놓는 곳이다. 현웅 스님은 이 도량의 주인장이다.

“수행의 고개를 넘어가자면 발심(發心)·의심(疑心)·분심(忿心)이 물론 제일 중요하지만, 꼭 하나 더 있어야 하는 것이 있어요. 바로 스승입니다. 스승의 손을 잡고 가야지만 바르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이 공부입니다.”

현웅 스님은 히말라야 산행을 돕는 셰르파(sherpa)를 연상케 한다.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누구라도 좋다며 기꺼이 함께 간다. 당신이 이미 걸었던 길이고 그것이 생사를 가름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육조사를 전진기지로 삼아 안으로는 수행을 지도하고 밖으로는 모든 언론매체를 가리지 않고 상대하며 선의 뜻을 갈파해왔다. 필요하다면 논쟁도 마다 않는다.

“불법이 어렵다고 법을 중생심에 맞출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어려워도 바른 길로 가야 그것이 수행이지요. 이 공부는 까딱하면 다른 길로 가게 되는데 그것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습니까? 나는 매일 생각합니다. 만약에 불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불법을 만났다 해도 만약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사는 모양새가 어찌 되었을까. 아찔한 일입니다.”

 

 

 

 

 

구산 스님

 

 

 

안팎이 깔깔했던 청정수행자, 구산 스님

현웅 스님에겐 생명을 준 부모보다 더 귀한 스승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머리를 깎아주신 구산 스님이고 또 한분은 전강 스님이다. 스무 살, 앞도 뒤도 꽉 막혀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현웅 스님은 불문에 들어섰다. ‘살기 위해서, 숨쉬기 위해서’ 찾아간 길이었다. 송광사 삼일암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구산 스님을 뵙고서야 ‘여기가 내 공부할 곳이구나’ 싶더란다. 구산 스님이 누구인가. 효봉 스님의 효상좌요, 송광사를 승보종찰로 중흥하고 조계총림을 개원했던 주역으로 송광사 승풍을 널리 진작시켰던 선객이다. 불교 정화운동 당시에는 500자 혈서를 써서 청정수행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정도로 참으로 깔깔했던 수행자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삼일암으로 스님을 찾아갔죠. 그랬더니 제 머리를 깎아주면서 고맙다고 하십디다. 이 공부를 잊지 않은 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선방에 다닐 때였는데, 문득 스님 생각이 간절해 버선 한 켤레를 사서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호통을 하시는 거예요. ‘공부 안 하고 이런 짓거리나 하느냐!’시며, 인사도 안 받으셨습니다.” 구산 스님은 한 달 만에 보든 1년 만에 만나든 애매한 인사 따위는 언제나 생략했다. 마주 앉기가 무섭게 공부한 내용부터 일러 보이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덧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스승, 그 모습이었다.

그렇게 냉정하고 깔깔하기만 했던 구산 스님도 한번은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단다. 현웅 스님이 군대 가던 날인데, 주머니를 뒤적이며 그때 돈 500원을 손에 쥐어주곤 눈물을 훔치셨다고 한다. 마음으로는 현웅 스님을 무척이나 아꼈던 까닭일 것이다. 현웅 스님이 걸망을 싸는 것 같으면 또 어딜 가냐며 곁에 두고 싶어 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자유롭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제 몸에 익혀지는 것들은 구산 스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먹을 잡을 때도 위아래를 꼭 가려서 잡게 했을 정도로 노장은 수행자의 자리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질 않았거든요. 그리고 늘 참선하는 모습으로, 낮이든 저녁이든 삼일암에 오르면 스님은 언제나 참선하고 계셨어요. 거기에서 수행자로서 갖추어야 할 승행은 다 배웠던 듯싶습니다.”

 

 

 


 

 

 

 

전강 스님

 

 

 

 

 

 

생사를 맡긴 스승에 대한 믿음

현웅 스님은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다고 한다. 제방 선방을 돌며 하루 20시간씩 정진하기를 10년, 그리고 다시 10년. 용맹정진도 수없이 했으나 공부는 터지지 않았다. 그런 중에 마음의 은사로 모시게 된 스님이 바로 전강 스님이었다. 전강 스님은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스물세 살에 깨달음을 이루고, 만공·혜월·한암 등 수많은 선지식과 선문답을 통해 그 철저한 견성을 인가 받았던 대선사이다. ‘지혜제일’이라 추앙되었을 만큼 스님의 선지는 날카로웠고 그 깨달음의 향기는 눈푸른 납자들에게 지혜의 등불이 되어주었다.

“사실 공부한다 하는 스님네라면 누구나 스승으로 삼았던 어른이죠. ‘내 공부가 무르익으면 반드시 전강 스님을 꼭 찾아뵈리라.’ 그 마음 하나로 수행을 익혀갔습니다. 언젠가 수원 용주사에서 전강 스님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얼른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금은 뵐 때가 아니다 싶습디다. ‘혹시라도 공부가 덜된 눈으로 스님을 뵙고 이러저러한 어리석은 마음을 내면 어떡하겠는가.’ 그게 두려웠을 만큼 전강 스님은 진정 제 마음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그렇게 현웅 스님은 전강 스님을 오롯이 마음으로만 의지하며 공부해들어갔다. 무려 20년 세월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원 용주사에서 전강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됐다. 20년 동안 흠모해온 이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그런 것 없습니다. 스님의 법을 믿었던 것이고, 늘 그 법에 의지해 공부를 해온 것이지요. 어느날 전강 스님이 법문을 하시는데, 육조혜능 스님과 남악회양 스님의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그냥 팍 놓아지더라구요. 눈물이 펑 납디다. 그때서야 비로소 전강 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스님과 법거량을 하고 화두공부에 대한 점검과 지도를 받았습니다.”

환희심 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스님은 알았다고 한다. ‘이젠 되었다. 이렇게 공부해들어가면 되는 것이구나.’ 세상사가 모든 게 달리보였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토굴에 들어가 6년 동안 들고 나질 않았다. 전강 스님의 법을 따라 정진하던 참으로 깨어있는 맑고 향기로운 나날이었다.

“이후 1984년부터 해외포교를 했습니다. 외국에서 살았지만 언제나 스승의 법을 놓지 않았고 제 마음은 공부인의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새벽에 물 항아리 밑이 깨어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됐죠. 어리석음이 자각으로 바뀌어지고, 세상이 다시 보입디다.”

그때서야 스님은 전강 스님을 마음에서 내려놓았다고 한다. 짧은 한철의 만남이었으나 참으로 긴 시간의 해후가 아닌가. 세상사 이야기로 보면 이만한 사모곡이 또 있을까. 그래서 물었다. “전강 스님이 문득 그립기도 한가요?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십니까?” 스님은 너무나 명료하게 말했다. “스승은 눈으로 대하는 게 아니요,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힘이 되질 않습니다.”

겨울 찬 바람 속에서도 안고 가기엔 참으로 뜨거운 말이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은 생사를 맡긴 믿음이었다.



전강 스님 _ 1898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해,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했다. 1921년 23살 되던 해 대오견성, 25세 때 만공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선종 77대로 한국선종의 혜맥을 이었다. 33세에 통도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법주사 등 전국 선원에서 조실을 역임하며 눈푸른 납자들에게 지혜의 등불이 되어 후진을 양성했다. 1975년 1월 13일 세수 77세, 법랍 62세로 좌탈입망하였다.

구산 스님 _ 29세 때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송광사, 백양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했다.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흥하여 조계총림을 개원했으며, 송광사 초대방장에 추대되었다. 안으로는 수행자로서의 승풍을 진작키시고 밖으로는 생활불교를 주창했다. 미국 등지에 송광사 분원을 설립하고,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여 해외포교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83년 12월 16일 “정진에 힘쓰고, 자신을 속이지 말 것이며, 선풍에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가고, 서로 화합하며 방일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현웅 스님 _ 20세에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20년간 전국의 제방에서 경봉, 성철, 구산, 전강 스님 문하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8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 ‘돈오선원’과 버클리 ‘육조사’를 창건하여 해외포교에 매진해 왔다. 현재 서울 성북동에 육조사를 창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깨달음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