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의 향

수월스님과 금오ㆍ효봉ㆍ청담

맑은 샘물 2010. 2. 14. 08:47

 

 

 

 

 

 

 

 

 

깨달음을 얻으러 온 스님들


옛날 인도 땅에 아주 진실한 수행자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어느 날 세상에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신다는 말을 듣고는 부처님께서 머물고 있는 사위성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사위성으로 가는 길목에는 며칠을 걸어야 지날 수 있는 너른 벌판이 있었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는, 사막 같은 벌판이었다. 불볕 더위 속을 뚫고 두 수행자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며칠이 지나자 마실 물이 떨어졌다. 그들은 더는 걸을 수가 없어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그들이 앉은 자리 곁에 조그만 물 웅덩이가 있었지만, 그 웅덩이 속에는 고기 몇 마리가 겨우 목숨을 붙여 살고 있었다.

한 수행자는 생각했다. ‘내가 이 물을 마시면 이 고기들은 죽고 말리라.’ 다른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 물을 마시고 부처님을 뵈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 고기들에게도 큰 공덕이 되리리라.’

그래서 한 수행자는 사위성을 바로 눈앞에 두고 숨을 거두었고 다른 수행자는 그 물을 마신 뒤에 부처님을 뵙고 여러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수행자는 함께 오지 못한 벗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더없이 맑은 눈으로 이 사실을 아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한 이여, 그렇게 슬퍼하지 마라. 그대의 벗은 벌써 하늘 사람이 되어 그대보다 앞서 여래의 법문을 듣고 있다.”


수월이 나자구의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에 화엄사는 수월을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온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때 간도 땅은 비록 많은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고는 있었지만 길목 곳곳에 마적이나 비적들이 숨어 있어, 가진 것을 몽땅 털리고 목숨마저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호랑이, 질병, 날씨, 먹을 거리, 노자돈 같은 부담까지 겹쳐, 조선에서 송림산까지 오는 길이란 웬만한 신심 아니고는 생각조차 낼 수 없는 길이었다.

참으로 그 때 조선에서 송림산으로 가는 길이란 부처님을 찾아 물 없는 벌판을 지나던 저 두 수행자들처럼 목숨을 내걸야 할,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나자구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 때 수월을 만나려고 금강산이나 서울에서 온 조선 스님들이 거의 날마다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무슨 까닭으로 목숨까지 내걸고서 그 험한 길을 걸어 수월을 찾았을까?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을 향한 목마름, 진리를 찾는 수행자들의 뜨거운 구법 열정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이 외로운 가르침의 등불, 이 바람을 거슬러 흐르는 진리의 향기를 찾아 온 그 많은 스님들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때에 어떤 스님들이 왔다 갔는지, 지금은 금오, 효봉, 청담말고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금오(金烏)는 만공의 선법(禪法)을 이은 보월(寶月)의 제자였다. 그가 수월을 찾아 길을 떠난 해는 1925년으로 수월의 나이 일흔하나, 금오의 나이 서른이던 해였다. 금오는 원산에서 배를 타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배를 타고 어디에서 내렸으며 어느 길을 따라 화엄사로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짐작으로는 두만강 하구에 내려서 훈춘 쪽에서 나자구로 갔거나 아니면 수월이 그랬던 것처럼 도문에서 왕청을 거쳐 화엄사로 갔을 듯하다.

금오는 가깝게 지내던 참선하는 수좌 스님과 함께 길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금오 일행은 간도 땅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잘못 보여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 같은 방에 아편 밀수범인 조선 동포가 함께 갇혀 있었는데 그는 하루 종일 말없이 앉아서 참선에만 열중하는 금오에게 감동이 되어 살고 싶으면 탈옥을 하는 길밖에 없다고 금오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 무렵 그 곳은 경찰력이 무척 약해서 살인범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아서 살인자로 만들면 경찰이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식이었다. 경찰은 자신들의 수사 실적을 위해서는 다른 누구라도 살인자로 잡아들여야 했는데 금오 일행이 살인자가 아님은 알았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는 금오 일행은 그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제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오 일행을 풀어 주면 그들을 가두어 둔 한 달 동안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하는 부담까지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자세히 일러 준 아편 밀수범은 돈을 써서 곧 풀려 나갔다. 그는 감옥에서 나갈 때에 탈출하면 들르라고 자신이 사는 집의 약도까지 그려서 알려주었다. 마음이 바빠진 금오 일행은 그날부터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먹는 일, 잠자는 일을 다 잊어버리고 용맹 관음 기도를 올리기를 며칠째 하던 날이었다. 깊은 밤, 기도를 올리고 있던 금오 일행은 똑같이 관세음보살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은 그들에게 감옥 창살 가운데 어느어느 것을 뽑으라고 일러주시더란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하자 거짓말같이 창살은 쉬 뽑혔고, 그래서 쉽사리 감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감옥을 벗어난 금오 일행은 다시 높은 담을 뛰어넘어야 했다. 몸이 건강한 금온느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금오와 함께 있던 스님은 담을 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정문을 지키는 병사가 깊은 잠에 푹 빠져 있는 틈에 어렵사리 밖으로 나왔다. 금오가 뛰어넘은 담은 높이가 안팎이 달랐다. 안쪽은 한 길밖에 안 되었지만 밖은 서너길이나 되는 바람에 금오는 발목을 크게 다쳤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그들을 찾는 경찰관을 따돌리고 아편 장수 집을 찾아간 금오 일행은 며칠 동안 극진한 치료를 받은 뒤에 마침내 수월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한때 금오를 모시고 수행한 서암(西庵) 큰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금오의 기도 속에 나타나 어느 창살을 뽑으라고 일러 주었을 뿐더러 간수들을 잠들게 한 관음의 신비는 아무래도 이 책에서 밝힐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이다. 다만 이 이야기와 비슷한 일이 적혀 있는 「통명집(通明集)」의 옛 기록을 곁들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마조(馬祖) 밑에서 큰 선지식이 여든네 명이나 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마조를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하였고 임금이나 대신들은 마조가 머물 절을 앞다투어 지어 올렸다.

마조가 머무는 절에서 스무 해 동안 살림을 살던 원주가 있었다. 그는 살림살이에 대해 아무 것도 기록해 두지 않았는데, 어느 날 관청에서 절 살림을 조사하는 바람에 원주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그 일로 마조를 원망했다. “우리 스님은 범부인지 성인인지 모르겠군. 스무 해를 스님을 도와 일했는데 끝내 이런 고통을 받게 되다니…….”

이 일을 안 마조는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깊은 삼매에 들었다. 그러자 원주는 문득 마음이 열려 스무 해 동안 써 온 돈과 물건이 훤히 기억이 났고, 그 덕에 곧 풀려나 다시 원주 일을 보기 시작했다.



금오가 다녀간 지 한 해 뒤인 1926년, 이번에는 효봉(曉峰)이 수월을 찾아왔다.

판사의 몸으로 어쩔 수 없이 어떤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한 그는 그것에 대한 괴로움과 갈등에 못 이겨 엿판을 짊어지고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다가 1925년 여름에 금강산 신계사에 들어가 석두(石頭)의 제자가 되었다.

효봉이 입산한 지 한 핵 지난 뒤에는 석두는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여러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받아 오라고 효봉을 떠나 보냈다. 그렇게 해서 효봉은 선지식들을 찾아 나섰다. 효봉이 수월을 찾은 것이 1926년이니, 금강산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효봉은 어쩌면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은 선지식으로 수월을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수월은 그 때까지도 금강산의 살아 있는 신화 같은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효봉이 수월은 만나 어떤 가르침을 받았으며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나뭇짐을 지고 화엄사 마당 앞으로 들어서던 수월은 땅에 엎드려 절하는 효봉에게 “공양이나 드시게. 배 고플테니 공양이나 드시게”라는 말만 했다고 전한다.



청담(靑潭)은 수월이 열반에 들기 한 해 전인 1927년 여름에 수월을 찾아가 몇 달 동안 머물렀다. 그 때 청담의 나이는 스물여섯, 서울에 있는 개운사 강원에서 경전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청담은 그 때 자신이 수월을 찾아간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저 북간도에서 사시다 열반하신 수월(水月)이라는 큰 도인이 계셨습니다. 내가 서울 개운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스님을 찾아가 평생 모시고 도를 배우다 죽으리라.’ 그래서 마침 방학한 틈을 타서 수월 스님을 뵈러 갔습니다.”

그 때에 개운사 강원에는 금봉(錦峯), 진응(震應)과 더불어 근세 한국 불교의 세 강백으로 일컬어지던 한영(漢永)이 스님들을 모아 놓고 경전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영이 개운사 강원을 연 것은 1926년의 일이다. 청담은 이 강원에서 공부하면서 간도 땅의 도인, 수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평생을 모시고 살 생각으로 간도를 향해 떠난 청담의 각오로 보아 청담은 수월이야말로 조선에서 으뜸가는 선지식이라 굳게 믿었던 듯하다.

청담은 화엄사에서 석 달밖에 더 살 수가 없었다. 수월이, 다른 스님들에게는 “내게 양식이 있으니 탁발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나 해라”하면서 어찌 된 영문인지 청담에게는 자꾸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수월이 화엄사에 내쫓은 스님은 청담뿐만이 아니지 싶다. 금오나 효봉도 화엄사에 머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듯하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 말대로 멀지 않아 전쟁에 휩쓸리게 될 만주 땅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남겨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수월은 열반에 들고 나면 빨리 화엄사를 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로 보면 그 이야기 반드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목숨을 내걸고 찾아왔다가 다시 그를 떠나가는 수행자들에게 손수 지은 밥을 싸서 걸망에 넣어 주고 밤새 삼은 짚신을 들려주며 잘 가라고 합장하던 수월의 속뜻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청담이 주먹밥과 짚신을 받아들고 수월에게 마지막 절을 올리자 수월은 갑자기 청담에게 곳간에 가서 괭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괭이를 가져오자 수월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마당에 박혀 있는 돌멩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돌멩이입니다.”

청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월은 괭이를 빼앗아 들더니 돌멩이를 홱 쳐내버리고 그 길로 들판으로 나갔다고 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청담은 수월에게 받은 이 가르침을 일생 동안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월이 청담에게 준 가르침이기에 앞서, 수월이 세상에 보인 그의 마지막 가르침일 성싶다. 그로부터 한 해가 채 못 되어 수월은 열반에 들었다.


-『달을 듣는 강물(수월스님의 옛길을 찾아서)』 중에서-

 



 

 

 

 

수월 스님 영정

 

 

 

 

 


'북녘의 상현달' 수월 스님

천수다라니 외며 나무하고 물 긷고…
노동하는 수행자'

 

 

 

 

근세불교의 고승인 수월(水月)의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그는 1855년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씨가 전(全) 또는 전(田)씨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수월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랐다. 그는 성품이 단순하고 맑았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자기 몸처럼 여겨 비록 모기나 빈대 같은 벌레라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받은 수월은 1883년 늦가을 나이 서른이 다되어 출가하기 위해 서산군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을 찾아갔다.


 



 

당시 천장암에는 한국 근대 선풍의 중흥조 경허(鏡虛)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 스님이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다. 이곳에서 수월은 행자로서 나무꾼 생활을 했다.


 


 

그가 천장암에 온 지 1년이 되던 어느날 14살의 어린 동자가 수행자가 되겠다며 천장암을 찾아왔는데, 이 동자가 바로 계룡산 동학사에서 경허를 만난 인연으로 훗날 큰 선지식이 된 만공(滿空)이었다.


 


 

만공은 그해 사미계를 받고 밥짓는 공양주가 되어 여러 해를 지냈다. 또한 훗날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이름난 혜월(慧月)도 그 무렵 천장암을 찾아와 밭일을 하면서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했다. 당시 수월은 특히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외웠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수월이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고 급히 끌어냈다. 그 순간 방앗공이는 다시 ‘쿵 쿵’ 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순전한 수행력을 인정한 태허는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수월은 스승 경허가 일러준 대로 종일 일하면서 죽기 살기로 천수대비주를 외웠다.


 



 

그 해 수월은 용맹정진을 했는데, 이레째 되는 밤 몸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방광(放光)을 체험한 수월은 세 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는데,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不妄念智)를 얻었고,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후 그는 보임공부를 위해 천장암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에서 신분을 숨긴채 여전히 땔나무를 해 나르며 한 철을 지냈으며, 1891년 무렵에는 경허, 제산 등과 호서지방을 돌면서 함께 수행했다.


 



 

1892년경 금강산 마하연사를 찾은 수월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스님들에 의해 선방의 조실(祖室)로 모셔졌지만, 여전히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하고, 밤에는 절구통처럼 앉아서 온밤을 밝히고 스스로의 정진에 몰두하며 말없는 가르침을 내렸을 뿐이었다.


 


 

1896년 정월 수월은 지리산 감로동천에 있는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과 우번대(牛?臺)에서 지냈다. 이곳에서도 밤새 삼매에 든 수월의 몸에서 다시 빛줄기가 터져 나왔는데, 어찌나 크고 강렬했던지 천은사에 살던 대중들뿐만 아니라 아랫마을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수월의 신분이 밝혀졌고 천은사 대중들은 그를 상선암 조실로 모셨다.


 


 

얼마후 다시 방광이 일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수월은 이적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세태를 염려하여 지리산을 떠났다. 이후 10여년 동안 수월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수월이 충남 청양군에 있는 칠갑산 장곡사(長谷寺)에서 만공과 더불어 1년 정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는 소문이 있을 따름이다.


 

1907년 수월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반년을 지내다가, 묘향산 중비로암에 들어가 3년동안 머물렀다. 그 후 그는 1910년경 강계군에 있는 자북사(子北寺) 등지에 머물면서 스승인 경허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결국 수월은 갑산군 도하리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춘 채 훈장 노릇을 하던 스승 경허를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서 문고리를 잡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매정하게 말하며 끝내 만나주지 않는 스승에게, 수월은 짚신 몇켤레를 정성껏 삼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돌아섰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뒤 수월은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2년 동안 갑산에서 가까운 회령군 팔을면 백천사, 경원군 만월산 월명사,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 등지에서 정진하면서 지냈다.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도 수월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무하고 물긷는 일만 했으며, 가끔씩 두만강 강가에 앉아 며칠동안 대비주삼매에 들곤 했다.


 



 

1912년 경허가 열반에 든 소식을 당시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정진하던 만공에게 알려준 수월은 두만강을 넘어 간도(間島)로 들어갔다. 그는 백두산 기슭에 있는 도문시 회막동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이때 수월은 자기가 받는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치는 짬짬이 틈을 내어 큰 솥에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는 일제의 탐학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며 보살행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다.


 



 

수월은 1915년 회막동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있는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그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채 어떤 젊은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1921년 봄 수월은 왕청현 나자구(羅在溝)에 들어가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날이 밝으면 종일 들이나 산에 나가 늘 말없이 일했고, 탁발을 자주 다녔으며, 생식을 했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산짐승과 날짐승과 어울려 놀거나 때때로 호랑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


 



 

한편 수월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오, 효봉, 청담 등이 수월을 찾아와 몇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1928년 하안거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7월 16일 수월은 절 뒤편 송림산에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한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후 7일 동안 밤마다 송림산에 불기둥이 치솟는 대방광이 일어났고, 산짐승과 날짐승이 떼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5일후 다비식을 거행했다.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 주며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과 아이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 그리고 호방한 선풍을 진작시킨 풍류객이었던 ‘중천의 보름달’ 만공 月面은 흔히 ‘경허의 세 달(月)’로 불릴 정도로 경허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수덕사 위쪽에 있는 작은 암자인 금선대에는 경허, 수월, 혜월, 만공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수월은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고, 글과는 담을 쌓고 살다간 ‘까막눈 선사’였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노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어난 수행력과 함께 때때로 나툰 방광불사(放光佛事)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불교사의 전설적인 대선지식이다.


 


 

또한 수월은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 땅의 한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던 ‘자비의 관세음보살’이며,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흔적없는 바람같이 살다간 숨은 성자였다.


 

김 탁〈철학박사〉







출처: 종교신문 빛을 남긴 사람들



 

 

 

 

 

효봉(曉峰)스님이야기

 

 

화두(話頭)

글/ 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나는 화두(話頭)를 은사(恩師)스님이신 금오(金烏)스님의 지시에 따라서 선학원에서 효봉 스님으로부터 받았다. 그 때, 효봉 스님께서 일러주신 화두(話頭)는 "불불(佛佛)이 불상견(不相見)인데 여사시불(如何是佛)"이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부처와 부처도 서로 알아보지 못 하는데 어떤 것이 부처인가"이다.

화두(話頭)란 글자 그대로 "이야기의 실마리"이다.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이 스승이나 선사 (禪師)를 찾아가서 배움을 청할 때, 이 화두(話頭)가 스승과 제자, 또는 선사와 후학 사이데 묻고 답하는 실마리가 되므로 이같이 말한다. 다시 말하면 화두는 두 사람 사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제를 원칙으로 해서 공부(수행)를 해야 하므로 화칙(話則)이라고도 한다.

또 화두(話頭)를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공안이란 본래 관공서의 공문(公文)을 말한다. 관공 서의 공문(公文)은 개인의 사문서와 달리 공정하고 권위가 있으므로 화두 또한 권위가 있고 공정한 것이라는 뜻으로 공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화두 즉 공안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 을 촉발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이며, 그 방법과 수단은 부처님과 옛조사(祖師) 들의 언행(言行)과 기연(機緣)에서 나오므로 역시 권위가 있고 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안이 성행하게 된 것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로부터 송대(宋代)에 걸쳐서라고 한 다. 유조(六祖)혜능(慧能) 이후, 그 때까지는 천재적인 훌륭한 선사들이 속촐해서 선(禪)의 창조적 생명의 불길이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제자를 교육하기 위한 특별한 수단으 로 공안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당나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선의 창조적 생명 의 불길이 쇠퇴하자 선의 부흥을 위해서 공안이 제창(提唱)되는데 송(宋)의 승천 도원(承天道源)이 엮은 <전등록(傳燈錄)>에 이르면 이 책에 등장하는 선승(禪僧)이 1천7백 1명이고 이들의 언행과 기연이 1천7백하나이므로 이 때부터 공안의 수를 통틀어서 1천 7백 공안이라 고 말하게 되었다.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창된 공안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등록과 같 이 현재까지 거쳐간 선사의 언행과 기연을 집성(集成)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 숫자는 알 수 없고, 지금도 1천7백의 수치는 공안 전체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같이 많은 공안 중 에는 효봉스님께서 나에게 일러주신 화두와 똑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앞 부분 "부처와 부 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을 제외한 "어떤 것이 부처인가"하는 화두는 더러 있다.

효봉 스님에게서 화두를 받고 산으로 돌아와 참선을 한답시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내 마음에는 "부처와 부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가시가 되어 걸려서 도무지 마음 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서양식 교육을 통해서 서양식 사고 방식을 배우고 그에 젖어 있다. 때문에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분석적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분석적인 사고방식으로 나의 화두 를 사고(思考)하고 있었다. 도데체 부처도 알아보지 못하는 부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리 뒤져보고 저리 따져 보지만, 그야말로 화두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마음은 더욱 산란해 지 기만 하였다. 직관적으로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선의 방법론을 말로는 기억을 하지 만 실재에 있어서는 불가능했다.

산에 살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마음을 안정하고 수행을 하자는 것인데 마음의 안정은 고사 하고 눈에 들어오는 산도 산란한 마음따라 흔들렸다. 이치로야 산은 부동(不動)이고 나무는 바람따라 움직이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흔들리는 마음에 비친 산 또한 부동이 아니었 다.

무문관(無文關)이라고 하는 선서(禪書) 29칙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육조(六祖) 혜능이 광주 (廣州)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렀을 때, 인종(印宗)이 열반경을 강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리 는 번기(幡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두 스님이 펄럭이는 깃발을 두고서 토론을 하는데 한 스 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고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
육조가 이것을 보고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종이 제자들을 이끌고 육조에게서 무상도(無上道)를 들었다 하고 육조는 이 때 비로소 인종에게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육조 혜능은 행 자(行者)로 있었을 것이고 행자의 머리를 깎고 계급을 일러준 인종은 육조에게서 무상도를 들었으니 육조의 문하생(門下生)이 된 셈이다.

각설하고, 마음이 움직인다고 한 육조의 말은 마음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도 충격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선사의 어록을 들추어 나의 화두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 보았다.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고 묻는 후학에게 어떤 선사는 "진흙으로 빚어서 금을 칠 한 것이다."고 제법 사실적인 답을 하는가하면 운문(雲門)은 "건시궐(똥막대기)이다."하고 동 산(洞山)은 "마삼근麻三斤;삼값이 세 근)이다."해서 동문서답도 이에 미치지 못하는 답을 한 다.

혹은 무엇이 부처입니까." 묻는 대매(大梅)에게 마조(馬祖)는 "즉심즉불(卽心卽佛.마음이 부 처)이다."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반대로 "비심비불(非心非佛.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하였으니 사량(思量)과 분별(分別)로는 도저히 접근할 길이 없다.

이렇게 몇 달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효봉 스님에게서 전갈이 왔다. 통영 미래사(彌來寺)에 잠간 머물 것이니 와서 그 동안 공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는 전갈이었다. 생각 같아서 는 피하고 싶었으나 사람이 직접와서 전하였으니 못 들은 척 할 수가 없었다. 내키지 않으 나 가는 길에 진주 의곡사(義谷寺)에 계시는 석정(石鼎) 스님을 만나 지혜를 빌리기로 하고 석정 스님을 찾아갔다. 하룻밤을 자면서 속을 털어놓았더니 석정 스님 말씀이 겪은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하셨다. 실인즉슨 겪은 그대로를 이야기할밖에 다른 길도 없고 또 할 말은 더욱 없는 처지 였다.

미래사에 도착하니 스님께서 반겨주셨다. 다는 그렇지 않겠지만, 화두를 일러주는 예는 많으 나 화두를 받은 수좌가 그 화두를 가지고서 공부를 어떻게 하면 어떠한 진전이 있었는지 점 검하는 일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그것은 공부하는 수좌에게도 원인이 있겠지만 화두를 일 러준 스승이 제자를 불러서 붇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봉 스님께서는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들르신 기회에 나를 불러 점검을 해주신 것이다. 밤 깊도록 어 줍잖은 나의 수행담을 경청하시고 그에 낱낱이 가르침을 드리우시는 자애에 흠뻑 젖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읍할 뿐이다.

인연의 성숙
글. 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위산 영우( 山靈祐)라고 하는 중국의 선사가 있다.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제자이다. 백장 은 선원(禪院)의 생활규칙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백장이 선원의 생활규칙을 만들기까지 선승(禪僧)들은 율사(律寺)의 별원(別院)에서 기거했으며 독자적으로 선사(禪寺)를 갖고 있 지 않았다.

말하자면 율사에 얹혀서 사는 꼴이었다. 그러므로 독자적인 생활규칙은 물론 사원(寺院)의 지위도 특별히 주어진 것이 없고 선승에게 죄과(罪過)가 있어도 그를 다스리는 규범이 없었 다.

<전등록(傳燈錄 6권)> 백장회해전에 보면 백장이 선문의식(禪門儀式)을 지었다 했는데 백장 고청규(百丈古淸規) 또는 백장총림청규(百丈叢林淸規)가 그것이다. '총림청규'라고 하는 말 이 시사하듯이 백장의 청규는 선종(禪宗)을 하나의 교단으로 독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 그 청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백장이후, 백장의 청규를 이어받아서 만들어진 선원 청규(禪苑淸規) 등에서 그 중요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전등록>에 의하면 이 같은 백장의 법을 이은 선사(禪師)는 30인이나 되고 그 중 13인의 기록이 보이는데 그 필두(筆頭)에 위산 영우가 있다. 이것은 위산 영우가 백장 회해의 법을 이은 문인(門人)중, 제 1인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선종(禪宗)을 독립시킨 백장의 교 단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대표자로 위산 영우는 손꼽히고 있으며, 그는 그의 제자 앙산 혜적 (仰山慧寂)과 함께 위앙종( 仰宗)이라고 하는 선종 오가(五家) 중 최초의 종파를 세웠다.

위산 영우는 15세 때, 생가(生家)가 있는 향리(鄕里)의 율사(律師)인 건선사(建善寺)에서 출 가하여 법상 율사(法常律師)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영우는 그 때 받은 승명(僧名)이다.
19세(혹은 20세) 때, 항주(抗州)의 용흥사(龍興寺)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그는 대소 승(大小乘)의 경전과 율장(律藏)을 배웠다. 조당집(祖堂集)은 이 때, 영우가 "소승은 대충 보고 대성은 정밀하게 읽었다." 고 함으로써 영우가 대승에 대해서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23세 때의 어느 날, 영우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고 심오하나 끝내는 내 마음이 안정 할 곳이 아니다."라고 탄식하고 교학(敎學)을 버렸다. 교학을 버린 그는 천태산 (天台山)으로 지자 대사(智者大師)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그 도중에서 한 은인(隱人)을 만났는데 그가 영우의 손을 잡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면서 마흔 말이 "그대의 여생(餘生)은 인연을 따라 나이가 들수록 훌륭하게 될 것이다. 륵담( 潭)을 만나면 머물고 위산( 山)을 만나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륵담은 마조 도일(馬祖道一)이 입적(入寂)한 곳이고, 백장 회해는 마조 도일에게 사사(師事) 하였으므로 륵담은 백장 회해가 이어받은 마조 도일의 법의 근원을 뜻한다. 따라서 륵담은 만나는 것은 백장회해를 만나는 것이다. 위산은 영우가 제자 앙산 혜적과 함께 법을 크게 떨친곳이다.

이 말을 한 은인은 한산과 습득으로 잘 알려진 한산자(寒山子)였다.
영우가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렀을 때, 습득(拾得)이 영우 한 사람만을 떠받들고 기뻐하므로 주지가 편애하는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습득이 "이 사람은 1천 5백인의 선지식으로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 뒤, 강서(江西)지방을 유력(遊歷)한 영우는 백장 회해를 만 나 깊은 선지(禪智)를 체득하고 백장 회해의 곁에 머물러 따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중에 영우가 백장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백장이 "거기 누가 있느냐?" 물었다.
"영우 입니다."
"화로 안에 불이 있느냐?"

화로의 재를 부젓가락으로 뒤적거린 영우가 "없습니다."하였다. 그러자 백장이 일어나 부젓 가락으로 재속을 뒤척여 작은 불씨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보이면서 "없다고 했는 데 이것은 무엇인가?" 힐문(詰問)하였다. 순간 영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백 장에게 사례(謝禮)하고 자기가 깨달은 견해를 이야기하였다.

그것을 다 듣고 난 백장이, "그러한 깨달음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열반경>에 '불성을 보고자 하면 마땅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시절인연 이 성숙하면 미혹(迷惑)이 홀연 깨달음이 되고 잊었던 것도 기억이 홀연 되살아 난다. 거기 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구명(究明)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제다가존자(提多迦尊者.什法藏의 第5祖)가 '깨달으면 깨닫지 않은 것과 다르 지 않다. 깨닫는 마음도 없고 깨달을 대상도 없다'고 한 것이다. 허망이라든가 범성(凡聖) 따위의 마음이란 없다. 본래의 심법(心法, 마음과 사물)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잃지 않도록 잘 지키고 지니기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왜 이 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미래사에서 밤이 깊도록 효봉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 스님께서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백장이 영우에게 한 바로 이 말씀을 들려 주셨기 때 문이다. 그 때,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 쓴 글과 똑같지는 않다. 기억이 희미하므로 전등 록에 있는 것을 옮겨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 때, 효봉 스님은 또 시절인연의 성숙에 관한 사례로 위산 영우화 향엄(香嚴)선사의 이야 기도 하셨다.
향엄이 처음 위산의 도량에 왔을 때, 수많은 젊은 선승들이 좌선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 로 ' 이 젊은 선승들은 아무런 학문도 없을 것이다.

교리를 충분히 배운 다음에 참선을 해도 해야 할 것인데 교리도 배우지 않고 좌선을 하는 것을 보면 머리들이 나쁜 모양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향엄에게 어느 날, 위산 영우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총명 하고 박학(博學)하다. 그러나 나는 네가 책에서 배운 것에는 관심이 없다. 네가 갓 태어났을 때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너의 천성(天性)에 대해서 한 마디 해 보아라"하였다.

이에 향엄이 대학자답게 인간의 천성에 대해서 웅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영우가 " 잠깐 기다리게, 갓 태어난 어린애가 그런 것을 알고 있었는가. 그것은 태어난 뒤에 자라서 배우고 익힌 쓸모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진짜 네 천성을 말해 보라."하였다.
향엄이 무어라 한 마디 하면 이내 "그것은 눈으로 본 것이다."하고 "그것은 귀로 들은 것." "그것은 책에 쓰여 있는것."하면서 향엄을 궁지로 몰아 부쳤다. 드디어 향엄이 어찌할줄을 몰라 "아무쪼록 저를 위해서 가르쳐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위산 영우. "내가 설하는 것은 내 말이지 너와는 관계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 였다.

향엄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그가 배운 책을 꺼내 아무리 살펴보아도 영우가 요구 한 것을 한 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한 향엄, 여기에서 비로소 '그림의 떡은 배를 불리지 못한다..'고 깨닫고 책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승에서 불법(佛法)을 배우는 것 은 단념하자. 한낱 범승(凡僧)으로 살자. 더 이상 엄격한 구도생활로 마음을 괴롭힐 일이 아 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울며 위산을 떠나 남양 혜충(南陽慧忠)이 살던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초암 을 짓고 그 주위에 대나무를 심고서 그 대나무와 멋해 살면서 좌선에 힘썼다. 그러는 어느 날, 길을 쓸고 있는데, 비 끝에 튕겨나간 돌이 대나무에 맞아 '타-ㅇ'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향엄은 활연히 대오(大悟)하였다. 이에 향엄은 곧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고 멀리 위산을 향하여 예배하고 말하였다. "대위산의 대화상님, 그 때 저에게 한 말씀 해 주셨으면 오늘의 이 기쁨은 도저히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님의 은혜는 부모의 은 혜보다 훨씬 더 합니다." 하였다.

참으로 각고의 수행 끝에 시절인연이 성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경수좌(斷莖首座)
글/ 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나는 효봉 스님께서 미래사(彌來寺)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면 되도록 미래사로 스님을 뵈러 갔다. 화두를 일러주신 스님이므로 화두를 들고 공부한 그동안의 이런 저런 말씀을 드 리기 위해서 찾아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님의 사람 대하시는 품이 포근하여 그에 끌려 서 자주 뵙고 싶어했다.

어느 해던가, 미래사로 스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월간 「자유문학」에 설창수 씨가 쓴 '단경수좌(斷莖首座)'라고 하는 시가 실렸다.
지금 그 시를 기억하지는 못하나 기억하는 내용은 어느 젊은 스님이 성욕을 끊기 위해서 남근(男根)을 잘랐는데 수행인으로서의 그 용기는 달마(達磨) 대사를 찾아간 혜가(慧可) 스 님이 구법(求法)의 굳은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팔을 자른 것과 비교하여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다고 찬탄하는 시였다.

이 단경수좌에 관해서 그 무렵, 내가 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다. 남해 보리암에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매주 토요일이면 스님에게 연정(戀情)을 품은 어느 젊 은 여교사가 찾아와 묵어갔다고 한다. 보리암은 우리나라에 있는 관음도량(觀音道場) 세 곳 중 한 곳이어서 기도하는 신도가 끊이지 않는 절이다. 처음에 스님은 여교사를 대하기를 기 도하러 오는 수많은 여느 신도와 같이 대했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되는 사이에 여교사의 품은 연정을 느끼게 되고 여교사의 연정이 깊 어질수록 스님에게도 무게가 더해져서 공부에 장애가 되고, 스님 생각에 여교사가 스님을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할진대는 남성의 상징인 남근을 잘라 없애 버리면 화근이 없어지리라 해서 남근을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미래사에 갔을 때, 이 사건은 자연히 화제가 되었다. 동석한 수좌들은 효봉 스님에게 서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지 여쭙게 되었다. 좌중에 나이가 많은 스님 가운데는 가 상하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젊은 스님 중에는 도리어 수행의 의지가 약해서 저지른 자해 (自害)라고 비난하는 이가 있고, 어떤 스님은 불구가 어찌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걱 정하기도 하였다.

그 때, 효봉 스님께서 혜외(慧嵬) 선사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혜외 선사는 399년 법현(法顯 340~420)과 함께 인도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고 「양 고승전(梁高僧傳)」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를 초조(初祖)로 하는 중국의 선종 이 시작하기 훨씬 전의 선사이다. 달마 대사가 520년에 중국의 광주(廣州)에 왔다고 하는 설 을 기준으로 하면 혜외 선사는 달마로부터 무려 120년 전의 인물이다. 흔히 달마 대사가 처 음으로 중국에 선(禪)을 가져와 달마 대사로부터 선이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달마 대사 이전에 이미 중국에는 많은 선사들이 있었고 혜외 선사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계행(戒行)이 청정한 혜외 선사는 생애의 대부분을 심산유곡에 초암(草庵)을 짓고 숨어살 면서 오로지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눈이 내 리는 어느 날, 한 여인이 선사의 초암을 찾아와 하루 밤 재워주기를 청하였다. 여인의 용모 는 단정하고 입은 옷은 깨끗하였으며 자태는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요즘 말로 표현해서 매 력 만점에다 섹시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은 스스로 자기를 천녀(天女)라고 소개하였다. 그리 고 선사에게 "스님은 대단히 덕이 크신 분입니다. 때문에 하늘은 저를 보내서 스님을 위무 (慰撫)해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여인은 갖은 교태와 말로써 선사를 유혹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비록 여인과 살을 섞지는 않을지라도 추운 겨울밤을 초암에서 지내도록 허락할 만도 한데 여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선사는 여인에게 "나의 마음 은 죽은 재(灰)와 같다. 아름다운 여인의 뜨거운 몸을 가지고 나를 시험해도 소용이 없다." 고 말하였다. 도저히 선사를 유혹해야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여인은 초암을 떠나면서 "바닷물이 다 마르고 수미산(須彌山)이 넘어진다 해도 저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으리라." 고 찬탄하였다. 이것이 『양고승전』에 전하는 혜외 선사의 모습이다.

효봉 스님은 혜외 선사의 이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신 다음, 혜외 선사가 여인을 받아들이 지 않고 거절한 것은 수행의 경지가 얕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뒷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파 계(破戒)한 선승(禪僧)이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일 수도 있으니 공부하는 사 람은 경계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한편, 혜외 선사의 경우와는 반대로 여인을 받아들인 설화가 우리나라에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 때 관음 정진을 하는 두 사람의 도반(道伴)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산 위와 아래 에 초암을 짓고서 선정(禪定)을 닦았는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때까지 깨닫지 못한 도반을 제도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어느 날, 눈비가 몰아치는 추운 밤, 한 젊은 여인이 산 아래에 있는 초암을 찾아와 재워 달라고 청하였다. 산아래 초암의 스님은 여인을 받아들이면 그 동안 생사를 걸고 쌓은 수행 이 보람 없이 무너진다 생각하고 추위에 떨며 간청하는 여인을 초암 밖으로 내쫓았다.

내쫓긴 여인은 산을 올라 산 위에 있는 초암에 이르러 하루 밤 재워달라고 청하였다. 산 위 초암의 암주(庵主)는 아무 말 없이 여인을 받아 들였다. 단칸인 초암 안으로 들어선 여인 은 암주에게 목욕을 하고 싶으니 물을 데워달라고 청했다. 암주는 말없이 물을 데워 큰 통 에 담아서 방안에 들여 주었다. 훨훨 옷을 벗은 여인은 알몸이 되어 통 속에 들어앉아 몸을 씻겨달라고 하였다. 암주는 이번에도 말없이 여인이 시키는 대로 여인의 몸을 씻어 주었다. 마치 마른 고목을 만지듯이 젊은 여인의 몸을 씻었다. 어느 순간, 여인은 서방(西方)을 향하 여 사라지고 통 속의 물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날이 새자 아래 도반은 생각했다. 간 밤 산 위로 올라간 여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여인이 산 위의 초암에서 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산 위의 도반은 틀림없이 파계하 였을 것이다. 내가 가서 확인하고 그 잘못을 깨우쳐 주리라 생각하고서 의기양양 산 위의 초암으로 갔다. 가까이 가니 초암이 빛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초암 안으로 들어가니 찬란한 빛은 방안의 목욕통에서 나오고 있었고 초암의 주인은 서방을 향해 합장하고 앉아서 삼매에 들어 있었다. 아뿔싸, 산아래 도반은 간밤의 여인이 관음 보살이었음을 그제서야 깨 달았다.

효봉 스님은 선수행을 하는 사람 중에 계율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도리어 자랑삼는 풍토가 확산되어 가는 것을 그 때 이미 걱정하셨다.
아름다운 여인의 뜨거운 육체를 고목을 만지듯이 만질 수 있고 여인의 몸을 씻어주면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사람만이 여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혜외 선사의 수행의 경지가 미숙하 다 할 수 있고 단경수좌의 단경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 람이라면 결코 혜외 선사나 단경수좌를 가볍게 보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금오(金烏)스님이야기

 

 

부처님의 무게

글? 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옛말에 "비 맞은 중"이라는 말이 있다. 비를 맞아서 행색(行色)이 추레한 것을 두고 하는 말 이다. 한편, 스님은 산에 살고 산에 살기 때문에 산길을 다니는 것은 예삿일이고 산길을 가 다가 비를 만나면 오는 비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으니 스님이 비를 맞는 것 또한 예삿일 이므로 사람이 예사로 당하는 일을 두고서도 이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과 비숫하기는 해도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말로 '비맞은 용대기(龍大旗)'라 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깔이 드세고 풋풋하던 사람이 비를 맞고서 축 늘어진 깃발과 같이 풀이 죽어 있는 모양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전혀 다른데 사람들은 흔히 이 두 말을 같은 뜻으로 쓴다. 이것은 잘 못이다. 축 늘어진 용대기는 측은한 생각을 하게 하는 데 비해서 스님의 행색이 추레한 것 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출가하여 세속을 떠난 스님은 겉치레에 관심을 두기 않는다 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해 여름의 내 옷차림새는 늘 비 맞은 꼴이어서 눈쌀을 맞기도 했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무더웠고 소나기가 잦았다. 그 때, 내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서건 옷은 무명 옷이었다. 시골 아낙네가 베틀에 올라앉아서 짠 올이 성긴 무명옷이었다. 지금은 그런 무명 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그 때만 해도 흔했다. 많은 스님들은 광목(廣木)이라고 해서 기계로 짠 바탕이 촘촘하고 탄탄한 무명옷을 입거나 여름이면 삼베옷을 입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옷을 입을 복이 없어서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비를 맞으면 그 추레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단벌이어서 벗고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입은 채 말려야 했다. 때로는 조계사 회계를 맡아보는 운영(云榮)스님 방에 가서 숯불 다리미로 다려서 말리기도 했지만 번번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틀 추레한 모양이 스님의 낯을 깎는다고 눈총도 받았고 심지어는 무슨 개멋이냐는 질타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조계사에서 선학원으로 가는 도중에 소나기를 낮아 흠뻑 젖었다. 그때 함께 간 스 님은 효봉 스님을 시봉하는 월타(月陀)스님이었다. 이 스님이 입고 있는 옷은 바탕이 고운 모시옷이었다. 횐 모시에 숯불로 회색 물을 들여 잘 손질을 해서 입고 햇볕에 나가면 그 연 한 회색바탕에서 아지랑이가 일 듯 빛이 났다. 신선이 입는 옷이 있다면 참으로 이런 옷이 아니겠는가 싶으리만큼, 날아갈 듯한 멋을 풍겼다. 이 멋진 옷도 흠뻑 젖었다.

월타 스님은 내 은사이신 금오(金烏)스님의 상좌이다. 흔히 큰스님의 시봉은 상좌나 손주상 좌가 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때는 어떤 까닭인지 월타 스님이 효봉스님 시봉을 했다. 이유 야 어찌되었건 파격이라면 파격이었다. 이 시봉게게 효봉 스님을 깊이 믿고 따르는 신도 가 운데 한 사람인 법련화 보살이 큰스님 시봉을 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모시고 두루마기서건 일습을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스님들이 기성복을 사 입거나 맞추어 입는다고 하는데 그 때만 해도 절마다 재봉틀을 들여 놓고 보살들이 옷을 지었다. 혹은 특별히 자기 집에서 옷 을 지어서 스님에게 드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각설하고, 나와 월타 스님은 비에 흠뻑 젖어 선학원에 이르러 효봉 스님과 나의 은사스님을 뵈었다. 네 사람이 앉으면 가득 찰 좁은 방에 6, 7인의 스님들이 앉아서 담소를 하고 계셨는 데 나의 추레한 옷차림을 보신 효봉 스님께서 월타 스님을 시켜 광목으로 지은 저고리와 바 지를 내주라 하셨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때는 큰스님에게서 옷을 받으면 그 옷이 비록 법의(法衣), 즉 가사 장삼이 아니더라도 큰 절을 세 번하고서 받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한 관습은 부처님 때로부터 법을 상징하는 의발(衣鉢)을 전하고 받음으로써 법을 이은 사자상승(師資相承)에 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러한 관습은 수행하는 수좌(首座)에게 늘 부처님으로부터 스승과 제자에게 로 이어져 내려온 불법(佛法)을 생각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매우 좋은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한 벌의 옷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하고 전해 받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속 에 어길 수 없는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큰 절을 세 번 하고 받은 옷을 무릎에 올려 놓 고 앉아 있는데 나의 은사스님께서 불쑥, "마삼근(麻三斤, 삼세근)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그때는 불교정화 직후여서 선풍(禪風)이 크게 일어났을 때라 '마삼근'과 같은 화두는 수좌 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으므로 나도 익히 듣고 있었고 선서(禪書)를 통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물으시므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신 은사스님께서 다시 "마삼근도 모르는 주제에 옷은 어찌 받느냐"하시며 준엄 하게 물으셨다. 그제서야 스님께서 제자인 나를 시험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내 머리 속은 내가 가진 온갖 지식을 동원해서 대답할 말을 찾는데 엉뚱하게도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은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였다.

아뿔싸!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이미 후회를 하고 있었다. 스님께서 톤음의 사이 를 두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은 소용이 없다. 네 스스로 안 것을 말하라."고 다그치셨다.
화두 '마삼근'은 당나라가 멸망한 뒤, 오대(五代)로부터 송(宋)나라 초기를 산 동산 수초(洞山守初, 910~990)선사가 한 말이다. 이 화두는『벽암록(碧岩錄)』과 『무문관(無門關)』에 실려 있는 대표적 화주 중 하나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한 운수(雲水)가 동산 수초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동산 수초 선사가 '마삼근'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뒤로 이 화두는 수많은 선승(禪僧)들이 참구하는 대표적인 화두가 되었다. 우리 나라 선 가(禪家)에서도 이 '마삼근' 화두는 한때 대단히 유행을 했는데 마삼근이 무어냐고 물으면 ' 세근의 담씨'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선사들이 직관(直觀)에 따라서 하는 말은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이다. 그 러나 문헌에 있는 대로 말하자면 '마삼근'은 마사(麻絲)를 계량(計量)하는 단위(單位)의 기 준이다. 이것은 당(唐)나라의 법전집(法典集)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 실려 있다. 이것을 운 문 문언(雲門文偃)선사는 그의 어록인 『운문록(雲門錄)』의 유방유록(遊方遺錄)에서 "세 근 의 삼은 한 필의 베이다(三斤麻一疋布)"라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마삼근은 한 벌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삼베의 분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안다 해도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마삼근'이라고 답한 동 산 수초 선사의 참뜻을 짐작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모르면 모른다 하면 될 것을, 내딴 에는 머리를 굴려 "부처님의 옷 한 벌입니다.."하였다.

나의 이 대답을 들으신 은사스님께서는 혀를 두어 번 차시고 "마삼근은 부처의 무게이니 라."하셨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 문답을 지켜보신 효봉스님께서 나에게 "금오(金烏)가 바 쁘긴 바쁜가 보다."하셨다.

이 말은 동산 수초 선사의 마삼근에 대하여 그의 법형제(法兄第)인 설두 중현(雪竇重顯)선 사가 "금오(金烏, 해)는 급하고 옥토(玉 , 달)는 빠르다(金烏急玉 速)"고 한 송(頌)을 그대 로 인용한 것이다.

송이란 일종의 코멘트라고 할 수 있다. 효봉 스님은 설두 중현 선사의 마삼근에 대한 코멘 트를 인용하여 내 은사스님과 빠른 세월을 동시에 거론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한 은 사스님의 노파심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참 으로 세월은 빠르다는 엄연한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부부싸움

글? 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얼마 전에 젊은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결혼한 지 4년이 된 부부인데 옆에서 보기에는 매우 단란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소주를 두어 잔 마신 남편이 아내에게 불쑥 하는 말이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바보짓만 하나. 아무 쓸모 없는 것을 돈을 주고 왜 사나. 살려면 좀더 쓸모가 있는 것을 사야지." 했다.

아내가 볼멘 소리로 '내가 바보인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내가 무엇을 사든 내 마음대로라구요. 내가 벌어서 내가 사는데 무슨 참견이에요. 그것보다도 당신이 나에게 사준 것이 무엇이 있어요. 돈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아무 것도 사주지 못하면서 참견은 웬 참견이에요."
남편 "말 말라고. 월부를 갚은 것 만으로도 숨이 차다고. 당신이 잘 알지 않는가. 알면은 돈을 절약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내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그러는 당신은 왜 매일 밤 비싼 술을 마시지요."
남편 "…."
아내 "왜 말이 없지요. 그것 보세요. 당신이야말로 아무 말 못하지 않아요."
나는 이들 부부가 장군멍군하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말다툼을 들으면서 예기치 않은 요즈음 젊은 부부들의 생활상을 목격한 듯 했다. 신혼 때의 그 부지런하고 화목하던 모습은 어느 새 사라지고 서로 상대방의 단점을 들추어내서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아, 이들도 생활에 지쳤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옛말에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러다가 이들이 이혼하는 것은 아니가 하는 부질없는 걱정까지 했다.
이혼이 잦은 세태 때문이겠지만, 이 젊은 부부도 이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 경망스럽다고 자책하면서 오늘, 차라리 실컷 다투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그래서 실컷 장군멍군하고 나면 가슴 속 응어리가 풀려서 새롭게 사랑이 움트고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이튿날 아내와 남편이 따로따로 전화를 해서 내 앞에서 다툰 것을 사과하고 남편은 "추태를 보여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어제 밤은 유익했습니다. 우리 둘 사이의 담이 없어진 느낌입니다." 하고 아내는 "그이가 어려움 속에서도 그렇게 너그러운 것은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남편을 너무 몰랐고 또 이기적이었음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나는 그들이 한층 더 미덥고 아름다운 부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고 그러한 자리가 필요하면 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나의 은사(恩師) 스님이신 금오(金烏)스님께서 총무원장직을 내놓으시고 금산사로 가시는 길에 잠시 수원의 팔달사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궁금해서 문안을 드리려고 찾아 간 나에게 스님께서 함께 청계사에 가자 하셔서 동행을 했다.

그 무렵 안양에서 청계사로 오르는 산 밑 후미진 곳에서는 밀도살이 성행했다. 여름 날의 해질녘, 산 밑에 다달했을 때였다. 한 농가에서 남녀의 고성이 울리고 아이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담 너머로 들여다 보니 도끼를 든 남자와 남자의 허리를 안은 여자가 고성을 지르면서 싸우는 데 겁에 질린 아이들은 발을 동동거리며 울부짖고 동리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구경할 뿐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께서, "월탑아, 우리도 구경을 하고 가자."하시고 성큼 싸리문을 제치고 마당으로 들어 서셨다. 그리고 주장자를 높이 들어 사내의 어깨를 내리치셨다.
"이놈, 소 잡는 도끼로 사람을 잡느냐."
놀란 사내가 도끼를 놓치고 스님을 향해 돌아섰다.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순간 조용해졌다. 스님은 사내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부부싸움은 안방에서 하는 거여. 더 싸울 일이 남아 있는가."
그제서야 동리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서서 "아주머니가 참으시오." "자네가 참게." 하고 말렸다.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꺼이꺼이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고 남편은 툇돌에 앉아 담배를 물고서 핏발 선 눈을 허공으로 보냈다.

스님은 아무 일 없었던 양 돌아서 산을 올랐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사람소리가 웅성거려 밖으로 나가 보니 어제의 그 싸우던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절에 와서 스님을 찾았다. 그리고 불공을 드리겠다고 한다.

두 부부는 도끼를 들고 싸운 부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란하고 화목했다. 사시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 아내가 하는 일을 남편은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옆을 떠나지 않았다. 나물을 다듬는 아내 옆에 앉아 함께 나물을 다듬으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이 깊었다.

그러는 남편을 귀찮은 듯 핀잔을 주는 아내의 눈에 믿음과 사랑이 넘쳤다. 찰떡을 찧는 남편, 추스르는 아내.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인간사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를 올리고 축원을 한 다음 스님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셨다. 법문은 육방예경(六方禮經)이 주제였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부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부부의 화목을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존경하고 예절을 지켜야 한다. 남편은 또 아내에게 집안 일을 맡기고 힘이 닿으면 패물도 사주도록 하라. 그리고 아내는 집안 일을 열심히 성의껏 하고 일하는 사람을 적절하게 부리며 정조를 지키고 남편의 수입을 낭비하지 않고 재산을 저축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기억하건대 육방예경의 이러한 요지를 말씀하였다. 그리고 옥야경(玉耶經)의 일곱 가지 아내에 대해서도 설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 대강을 간추리기로 한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에게 말씀하셨다.
"수자타, 세상에는 일곱 가지 아내가 있다. 첫째는 살인자와 같은 아내로서 더러운 마음을 갖고 남편을 존경하지 않으며 다른 남자를 넘보는 아내이다. 둘째는 도둑과 같은 아내로서 남편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허영만을 좇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편의 수입을 낭비하고 남편의 재물을 훔치는 아내이다.

셋째는 주인과 같은 아내로서 집안 일을 돌아보지 않고 게으르며 제 욕심 채우기에 바쁘고 항상 남편에게 사나운 말을 하는 아내이다.

넷째는 어머니와 같은 아내로서 남편에게 자상한 애정을 갖고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이 남편을 지키고 남편의 수입을 귀중하게 여기는 아내이다.

다섯째는 누이와 같은 아내로서 성의를 가지고 남편에게 봉사하며 자매와 같은 애정과 수줍은 마음을 가진 아내이다. 여섯째는 벗과 같은 아내로서 항상 남편을 대하면 기뻐하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이 남편을 대하며 정숙하며 남편을 존경하는 아내이다. 일곱째는 하인과 같은 아내로서 성의껏 남편에게 봉사하고 남편을 공경하고 남편에 대해서 인욕하여 성내거나 한을 품지 않으며 남편을 소중히 대하는 아내이다.

수자타, 그대는 이 중에서 어떤 종류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가."
요즈음의 아내들에게는 귀에 거슬리고 넌센스라는 비난을 받을지 모르나, 스님은 옥야경을 설하신 다음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뒤집으면 남편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하셨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충분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공을 마치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 나는 스님에게 궁금한 그들 부부의 변화에 대해서 물었다.

"스님, 어제 그렇게 싸운 저 부부가 어떻게 해서 오늘은 저렇게 다릅니까?"
스님께서는 "네가 그것을 알면 중노릇을 못한다. 그러니 안 일러 준다." 하셨다.

선사(禪師)의 거지생활

글?박경훈/역경위원, 법보신문 주필

청계산에서 안양으로 내려오는 길목, 마을 뒤에 움막이 하나 있었다. 스님이 이 움막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움막 속을 향해 "계시는가." 하고 주인을 찾았다. 두세 번 불러도 대답이 없자 스님이 움막의 출입구에 드리워진 천막 조각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제서야 안에서 바튼 기침을 g라는 중년 사내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맑은 햇빛에 얼굴을 찡그린 사내의 표정이 스님을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스님은 그러한 사내를 아랑곳하니 않고 옷자락을 잡아끌어 움막 앞에 나란히 앉았다. 사내는 스님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재구는 학교 갔는가?"

스님의 물음에 "네" 하는 사내의 대답이 떨떠름하다. 스님이 시자(侍者)의 걸망에서 조그만 꾸러미를 꺼내 "가라스 양말이네. 재구 학교 갈 때 신으라 하게, 돈을 좀 넣었으니 신발을 사주게."하셨다.

그러자 사내가 퉁명스레 "거지 새끼가 학교는 댕겨서 무얼 합니까. 다 일 없습니다." 했다.
스님 "자네는 거지 자격도 없네."
사내 "거지가 무슨 자격이 있답니까. 밥빌어 먹고 남에게서 돈 거저 얻어 쓰면 거지고 남의 집 담 넘어가면 도둑이고 그렇지." 사내의 얼굴에 노기(怒氣)가 서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스님 "하심(下心)해야 거지가 될 수 있는 거여. 자네처럼 세상만사를 불평하고 불만만 해서는 거지가 못되네. 자, 이것이나 받아 두게. 또 봄세."

스님은 꾸러미를 사내의 무릎에 놓고 일어섰다. 그날 저녁, 수원 팔달사로 돌아온 스님은 돋보기를 끼고 구멍난 양말을 손수 꿰맸다.

1950년대 말, 스님들 사이에 '가라스 양말'은 대 인기였다. '가라스'라고 하는 말은 영어의 '글래스(Glass)'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 때, 일본에서는 나이롱이 등장해서 투명한 나이롱 실로 짠 양말을 그렇게 불렀다.

이 양말은 여간해서는 닳아서 떨어지거나 구멍이 나는 일이 없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 면양말을 선호 하지만, 그 때는 면양말의 질이 요즘보다는 훨씬 떨어져서 금방 해어지고 구멍이 뚫려서 꿰매 신는 것이 예사렸다. 더욱이 스님들은 고무신을 신고 산길을 가는 것이 일쑤이므로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면 양말은 금방 구멍이 나고 고무신은 또 양말의 뒤꿈치를 물어뜯었다. 때문에 질긴 가라스 양말이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양말을 구하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 때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트이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에 무역이 활발한 것도 아니어서 가라스 양말은 일본을내왕하  선원들이 들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일본을 내왕하는 배가 닿는 부산에서는 그런대로 구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누구인지 스님에게 가라스 양말을 선사한 사람은 부산에서 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양말을 스님은 거지에게 주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는 돋보기를 끼고 손수 해어진 양말을 꿰맸다.

나는 양말을 꿰매는 스님을 지펴보면서 스님이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서 30대에 하셨다는 거지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거지를 자칭하는 사내를 만난 뒤부터 줄곧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스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스님이 거지패를 찾아가 거지노릇을 함께 하자고 하니, 거지들이 비웃으며 아무나 거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스님이 거지패에 끼워 달라고 재삼 청하니 왕초가 거지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스님은 어떠한 조건이든 다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거지패에 끼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세 가지 조건이란 첫째, 끼니는 어떠한 것이든 맛있게 먹을 것. 둘째, 옷은 넝마여야 할 것. 셋째, 잠은 아무데서나 잘 것이었다. 스님이 들으니 세 가지 조건이란 것이 별것이 아니었다. 스님이면 다 하는 두타행(頭陀行)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두타행이란 번뇌를 없애고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탐욕을 없애는 수행으로서 주로 밥은 걸식(乞食)을 하고 노숙(露宿)하면서 여러 가지 고초(苦楚)를 이겨내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두타행은 부처님 당시부터 비구스님들이 해온 생활 방식인데 열두 가지로 나누어 그것을 십이두타행(十二頭陀行)이라고 한다.

이 십이두타행 가운데 식사에 관해서 항상 걸식을 하라. 음식을 남겨 두지 말라. 자리를 옮겨 다니지 말고 한곳에 앉아서 먹되 하루 한끼만 먹어라. 음식은 가리지 말고 흘리지 않게 먹으라는 규율이있다. 이것은 거지생활의 세 가지 조건 중 첫째 조건과 일치한다.
또 옷에 관해서는 분소의(糞掃衣)만을 입으라고 했다. 분소의는 남이 입다가 해어져서 버린 옷의 넝마조각을 주어서 만든 옷이다. 그러므로 분소의는 둘째 조건과 부합한다. 스님들이 누더기를 입는 것은 이 분소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기거(起居)하라. 무덤 사이에 앉아서 참선을 하라. 나무 아래나 노지(露地)에서 생활하고 좌선(坐禪)을 하라 하였다. 이것 또한 셋째 조건과 같다. 따라서 스님으로서는 기왕에 해 온 생활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참선수행하는 스님들이 행하는 두타행을 만행(萬行)의 하나라고도 한다. 만행은 온갖 수행을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온갖 쓰라리고 괴로운 일을 통해서 심신을 단련하는 수행이 두타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선수행하는 스님들은 수행을 위해서 두타행을 비롯한 만행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수행을 해서 얻은 경지가 쓰라리고 괴로운 온갖 일을 당해서도 요지부동한지 시험하기 위해서 두타행을 하고 만행을 한다.

이러한 두타행이나 만행을 행지(行持)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행(行)은 수행을 지(持)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그 수행으로써 얻은 경지를 길이 지속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님이 거지생활을 한 것은 하심을 기르기 위한 것뿐 아니라 당신의 경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한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스님은 이미 보월(寶月)스님과 보월 스님의 스승인 만공(滿空) 스님에게서 법을 인가 받은 뒤였다.

스님이 전주에서 거지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출가해서 남원에 살고 있는 누이동생이 곡성 태안사를 갔다가 어느 스님에게서 스님이 전주에서 거지 노릇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겨울은 다가오고 날씨는 추워지는데 거지노릇을 한다니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리움이 가슴에 복받쳐 올랐다. 솜을 놓아 바지와 저고리를 지어서 남편과 함께 전주에 가서 거지굴을 다니면 스님을찾았다. 며칠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다리 밑 거지굴에서 "이러 이러한 스님을 못 보았소."라고 물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실망을 하고 돌아서는데 거적대기를 깔고 누워 있던 나이든 거지가 "혹 그 사람인지 모르겠소. 자기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조금 있으면 내 약을 가져 올 것이니 기다렸다가 만나 보시오." 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나타난 거지가 바로 오라버니였다. 누이동생은 스님을 붙들고 울면서 "먹을 것이 없으면 제 집으로 갑시다. 오빠 한 사람 먹을 것이 없겠소. 스님이 되어서도 거처할 암자 한 칸이 없소."하며 매달렸다.
스님 "천지간이 다 내 집이고 굴뚝에 연기 나는 성안의 모든 집이 다 내 밥을 짓는데 거처할 곳이 없고 먹을 끼니가 없겠냐. 자, 네 서방하고 함께 얼른 집으로 가서 시부모나 잘 모셔라."

울며 매달리며 애걸복걸하는 누이동생을 뿌리치는 스님에게 누이동생은 단념하고 솜옷을 드리면서 "날씨가 추우니 이 솜옷으로 갈아 입으시오. 그리고 뒤에 남원을 지나시면 꼭 제 집에 들리소오. '하였다. 솜옷을 받아 든 스님, 거기에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누워 있는 거지를 일으켜 앉히고서 넝마를 벗기고 솜옷으로 갈아 입혔다.

그리로 "형장은 나보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한 것 같소. 밤이면 등창 때문에 오한이 날 것인데 아주 잘 되었소." 하셨다. 그리고 누이 동생에게는 "너 참 좋은 일 했다. 복전(福田)을 닦는 것은 보시보다 더한 것이 없느니라." 하셨다.

은사(恩師)스님의 유교(遺敎)

글? 박경훈/역경위원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가 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의 3선을 반대하는 측에서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였기 때문에 총무원장 선거는 상당기간 늦추어진다고 하는 보도를 접하고서 볼 일이 있어 미국에 갔었다.

그 며칠 뒤였다. 미국의 CNN방송이 서울발(發)로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 후보를 사퇴하였다는 단신(短信)을 내 보냈다.

CNN 보도가 비록 짧은 뉴스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듣는 순간, 나는 한국 불교가 이제는 세계의 이목(耳目)을 끄는 위치에까지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CNN이 보도할 가치가 있는 엄선된 뉴스를 전세계를 향해서 동시에 전달하는 매체(媒體)인 점을 감안했을 때, 이제 한국 불교는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로 있을 수만은 없게 된 사실을 실감하였다.

이것은 한국 불교가 그만큼 성장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세계인이 주시(注視)하는 속에 있음을 깨닫고 그 언동(言動)이 신중해야 한다. 그 점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이번에도 총무원장 선거를 두고서 세인(世人)의 지탄을 받았다.

한편,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 후보를 사퇴하였다는 CNN 보도를 보고서 내가 느낀 또다른 느낌은 ‘그러면 그렇지’였다. 그것은 총무원장 후보를 사퇴한 월주 스님을 비롯해서 조계종 스님들에게 아직도 수좌 기질(首座氣質)이 살아 있구나 하는 반가움과 안도감 때문이었다.

수좌 기질이란 바로 비구승 기질이다. 비구승 기질은 첫째가 무소유(無所有)다. 재물(財物)만 무소유가 아니라 지위도, 명예에 대해서도 무소유다. 그러니 주지라든가 원장 따위의 직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비구승 기질이고 수좌 기질이다. 오직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걸망 하나에 자기 모든 것을 담아 메고서 운수행각(雲水行脚)하고 선방(禪房)에 들어앉아 참선수행하는 정진(精進)에 집착할 뿐이다.

이러한 수좌 기질 때문에 불교정화 때는 주지 맡기를 꺼려 하고 종단의 행정직을 사양하는 분위기였다. 불교정화로 인하여 대처승이 떠난 절과 암자가 주인 없이 비어 있는 예가 허다했던 것도 그러한 수좌 기질 때문이었다.

이때 종정인 효봉 스님과 금오 스님께서는 빈 절을 비워 둘 수 없으니 대처승을 당대(當代)만 인정해서 빈 절을 맡기자 하셨다. 이 제안은 사찰관리를 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님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지 않고 공양도 올리지 않는 것은 부처님 제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소박하나 간절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과격한 스님들에 의해서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격한 스님들 중에는 절을 비워 두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대처승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비구승의 불교정화가 부처님을 굶긴다.”고 춘성(春城) 스님은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

마지 못해서 총무원에 나가서 소임(所任)을 맡거나 큰절의 주지를 맡으면 그것을 공부하고 정진하는 스님들의 수행을 돕는 봉사로 생각하였지 직책이나 직위를 가지고 남 위에 군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 때고 일에 지치거나 뜻에 맞지 않으면 걸망 하나 달랑 메고 떠나는 것이 비구승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 비구승의 행보(行步)였다. 미련없이 떠나는 이같은 비구승의 행보를 두고서 수좌(首座) 걸음이라고 한다. 그 수좌 걸음을 나는 나의 은사이신 금오 스님에게서 본 적이 있다.

1958년, 금오 스님은 총무원장을 맡고 계셨다. 그때, 스님께서는 여러 차례 나를 부르셨다. 전보도 치시고 인편(人便)에 상경(上京)할 노자(路資)도 보내셨다. 더는 사양할 수 없어서 총무원으로 스님을 뵈러 갔다. 나는 스님을 뵙자 총무원장직을 맡으신 스님의 뜻을 여쭈었다. 스님은, “종단이 너무 혼란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화불사의 보람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네가 알다시피 나는 행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혼란한 종단을 수습해서 정화불사를 부처님 법에 따라 회향하고 불조의 혜명(慧命)을 잇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 한다고 종정 스님과 여러 스님들이 권하기 때문에 맡았다. 내 한 몸 편하자고 모른 체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혼란이 가라앉으면 그만둘 것이다.” 하셨다.

그 무렵, 총무원장직을 맡은 금오 스님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그 중에는 ‘선방 수좌인 금오 스님이 총무원장을 맡은 것은 명예욕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때도 마음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였다.

그 뒤, 스님은 총무원을 떠나도 되겠다 싶은 때에 종정스님의 재가를 얻어 임시총회를 소집하셨다. 이 임시총회가 열리기 전날, 저녁 예불이 끝난 뒤에 스님은 사표를 써서 월주 스님에게 맡기시고 종회가 시작하기 전에 사표를 제출하라 이르셨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예불을 마치신 스님은 시자를 데리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울을 떠나셨다. 그때 스님은 종회에 참석해서 당신이 직접 사표를 제출하지 않는 까닭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종회에 참석해서 사표를 제출하면 사표의 수리 여부를 두고서 논의가 분분할 것이 아니냐. 그것은 좋지 않다.”
아마 스님은 그때 당신을 지지하는 스님들과 다음 총무원장이 되고 싶어하는 스님을 지지하는 스님들 사이의 화합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떠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하셨다. 떠나는 사람이 뒷일을 이러쿵 저러쿵 해서 많은 사람을 번거롭게 하고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꺼려 하신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평생에 한번 종단의 앞날을 걱정하시고 종단 일을 맡은 스님들을 질타하신 적이 있었다. 내가 대한불교신문에 있을 때였다. 스님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동봉한 글을 신문에 실어서 납자(衲子)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라는 말씀이었다. 지금 총무원장 선거로 인해서 만신창이가 된 종단을 보면서 그 때의 스님 말씀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간추려서 옮기기로 한다.

“근래에 와서는 주지를 사는 것으로 장기(長技)를 삼는 주지승(住持僧)이 있는가 하면 사무승(事務僧)이 있고 무사방일승(無事放逸僧)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승명(僧名)이 대두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정화불사를 원만하게 회향하기 위해서는 사무승도 있어야 하고 주지승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스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승려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잃어서야 그 주지의 직무와 사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전국 사찰의 거의가 참선도량으로 보다는 주지승과 사무승과 무사방일승들이 집거(集居)하여 있고 공부에 힘을 기울이는 선원(禪院)은 몇몇뿐이다. 총무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승려는 오늘 참선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선방(禪房)을 잃은 납자가 깃을 펼 암자를 달라는 목마른 소리에도 총무원은 외면을 하고 말았다. 총무원이 그러하니 전국의 승려가 어떻게 할지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종회의원들에게도 얘기했으나 귀기울이는 승려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총무원의 획기적인 쇄신과 과감한 용단을 바라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나 상금 일호(一毫)의 미동(微動)도 없으니 이는 부처님의 혜명을 가리는 마구니 종자가 승복(僧服)을 입고 횡행하는 느낌을 불금(不禁)하는 바이다.

이제 정화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3천을 헤아리는 대처자(帶妻者)를 내쫓은 우리가 공부에 마음이 없다면 내쫓긴 그들에 비해 무엇이 더 나은 것이 있어 정화를 하겠다 하겠는가.

삼계의 중생이 불법이 아니면 어느 곳에 가서 살 것인지 추호라도 생각한다면 1천5백 정화승(淨化僧)과 그 무수한 신도들의, 당시의 발원이 오늘 이렇게 황폐하지는 않으리라.
지금 여기에 누가 있어 감히 불법이 우리 속에 역력히 살아 있다 하겠는가. 우리 모두 불법을 바로잡고 바로 배우고 바로 가르치며 행하여 만천하에 불법의 빛이 휘날리기를 빌어마지 않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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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문중의 대들보
정금오(鄭金烏, 1896~1968)

보월스님의 사법제자

근세의 고승이 많은 스님들 중에서도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척박한 세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근세 스님들은 한결같이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서 끊임없는 격랑의 한 생을 살다 간 스님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풍전등화의 조선조 말기에 태어나 출가하여 일제 36년의 암울한 세월 속에서도 수행자로서의 면목을 잃지 않았다. 대다수의 스님들이 일본의 불교침략에 동조하고 왜색불교를 신봉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전통을 버리고 있을 때 산간에서 불조(佛祖)의 혜맥(慧脈)을 계승하며 개오를향해 끊임없이 정진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근세의 많은 스님 중에서 그렇듯 수행자로서의생을 훌륭히 경작해낸 고승을 몇 분이나마 꼽을 수 있다는 기쁨을 만난다. 그 중에 한 분이 금오(金烏)스님이다.

금오스님이 태어난 것은 1896년 7월 23일이다. 고향은 전남 강진군(全南 康津郡) 병영면(兵營面) 박동리(朴洞理). 아버지 동래 정(鄭)씨 용보(用甫)와 어머니 조(趙)씨의 2남 3녀 중에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태선(太先), 휘(諱)는 태전(太田)이요. 금오(金烏)는 호(號)다. 1896년이면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이 앞을 다투어 침략의 마수르 뻗던 때, 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아났으며, 이 해 6월 김홍집(金弘集) 등에 의한 갑오경장이 있었던 해였다.다음해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민비(閔妃)가 살해되기도 한다. 급기야 러시아 세력들이 들이닥쳐 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친러 내각이 들어서는 등 조정은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각처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7월에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구성하고 민간차원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조는 주권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고치고 연호도 광무(光武)"라 불렀다. 그야말로 이 민족 최대의 격동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촌에서 태어난 금오스님은 대개가 그렇듯 서숙(書塾)교육을 받았다. 어려서 천성이 영민하고 기질이 출중하여 서숙 학동 중에서 공부가 늘 앞섰다고 한다. 그런데 금오스님이 출가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다. [금오집(동국역강원刊)]에 의하면 가형(家兄)으로부터 공부를 게으리한다는 꾸지람과 매을 맞고는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무엇을 하느냐"며 집을 나와 그 길로 출가를 하였다고만 적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금오스님의 출가에 대한 나름의 당위적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근세 고승 중에 동산(東山). 효봉(曉峰). 청담(靑潭)스님 등은 모두 서숙과 현대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금
오스님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아마도 동학운동 등 구세적 차원의 민중운동이 활발하던 곳이 전라도 지방이어서 현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나이들어 세사을 보는 눈이 넓어짐에 따라 척박한 현재의 상황을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자기 자신을 투척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집을 나온 것은 16세, 1912년이 된던 해 3월 15일이었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사살사건이 있었고, 이듬해
치욕의 한일합방이 있었다. 도처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투사들이 투옥됐다.

이러한 난세에 누구보다 영민한 그가 서숙에서 글만 읽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한
좌절감이 그를 압도하였을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기투신을 감행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스님은 가출한 길로 강원도 금강산 마하연선원(摩?衍禪院)을 찾아 도암긍현(道庵亘玄) 선사에게 축발(祝髮)하고 득도하였다. 스님은 초년시절 득도 도량인 마하연과 안변 석왕사에서
주로 선정을 닦았다.

이러기를 10여 년, 만 26세 되던 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수안거를 성만했으며, 한국선풍(禪風)을 진작시킨 경허(鏡虛)선사 등이 있던 통도사 보광전과 혜월(慧月)스님이 회주로있었던 천성산(天聖山)미타암 등에서 수행 정진하면 제방의 선지식과 교유하였다.

28세 되던 1923년, 당대의 선지식 만공(萬空)선사의 수제자로서 투철한 안목으로 회중(會
衆)을 이루었던 보월(寶月)선사를 찾아 예산 보덕사(報德寺)로 갔다. 보월선사를 예참한 스
님은 그렇게 의기가 투합될 수 없었다.
스님은 그간 공부한 경계를 여실히 털어 놓았다.

시방세계를 투철하니
있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

이를 점검한 보월선사는 금오스님이 내밀히 득처(得處)가 있음을 간파하고 인가하였다. 이로써 보월선사의 사법(嗣法)제자가 되었다. 금오스님은 그 후 2년간 보월선사 회상(會上)에서 개오를 위한 대 정진을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보월선사는 스님에 대한 입실건당식(入室建幢式)을 갖지 못한 채 입적했다.

이같은 사제지간이 딱한 사실을 알고 있는 만공스님은 금오스님이 보월선사의 사법임을 증
명하는 건당식을 대신하고 전법게를 내렸다.

덕숭산맥 아래
무늬없는 인을 지금 전하노라
보월은 계수나무 아래 내리고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으네.

보월선사의 법계를 이은 스님은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법담을 나누고 때로는 승속의 경계도넘나들며 내면의 개오를 위한 투철한 만행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기를 10여 년, 스님의 나
이 40세에 김천 직지사에서 종문(宗門)의 법석(法席)을 마련하고 조실을 지냈다.

납자를 제접하니 전국 수좌들이 모이고 그 이름이 널리 회자됐다.
이 때만 해도 한국 불교계는 꼼짝없이 일제의 족쇄에 채여서 기를 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쌍계사와 칠불선원, 그리고 서울 선학원(禪學院)등에서 회주(會主)로 계시면서 후인을 채찍하고격려하였다. 해방 후 그동안 해이해진 승풍(僧風)을 바로 잡기 위해 정화불사에 투신 1955년 조계종 부종정을 역임했고, 58년에는 총무원장을 맡아 일선 행정을 보았다. 그동안 봉은사, 화엄사의 가람수호와 도제 양성에도 정열을 기울였다.

스님은 말년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법력으로 많은 문도와 납자들을 제접, 당대의 이름난 법석을 마련했다.

스님은 1968년 9월말 세연을 다했음을 예견하고 월산(月山)스님에게 전법을 한 후 10여일 후인 10월 8일(음8월 17일) 홀연히 입적했다. 세수는 73세, 법랍은 57세였다.

스님이 입적한 지 올해로 만 23년이 되었다. 스님의 법석이었던 법주사는 스님의 수제자인월산스님이 조실로 오늘에도 그 법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육신은 멸해도 법은 결코 멸하지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금오스님에게서 또 본다.

거지생활 자청해

예로부터 성인이나 위인의 탄생에는 한 두 가지의 특별한 일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대체로 어머니에게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태몽은 대표적인 일화가 되고 있다. [금오집]에 보면 금오스님에게도 그렇나 태몽에 대한 일화가 있다. 스니의 어머니 조씨 부인은 스님을 잉태하기 전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밤중에 한 노인인 나타나 그릇을 품속에서 내주며 그것을 열지 말고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그릇을 받아든 조씨부인은 치마폭에 싸기지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흰 학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
그 학은 순간 오색이 영롱한 짐승으로 변하여 부인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이때 조씨 부인은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스님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태몽은 예사일이 아니어서 금오스님이 네 살 되던 때까지 "두려움"을 느꼈다고 조씨부인은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탄생일하는 대체로 착색되기 마련이지만, 금오스님이 성장함에 따라 시정의 범인과
다르다는 것은 그의 풍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스님의 귀와 턱이 그러하다. 사
람들은 천품과 개성이 다르듯 얼굴 생김새나 모양도 각양하다. 그러나 특별나게 다른 모습이 있을 때, 우리는 그를 범상하게 보지 않는다. 턱은 마치 이중으로 겹쳐 있는 듯 두툼했고 귀는 넓고 컸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턱과 귀를 쏙 빼 닮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스님의 구도행각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열정적 구도심으
로 풀었다. 선원에서의 참선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선지식과의 법담, 그리고 만행(萬行)생
활로 자기와의 싸움을 실험했다. 견성체험을 위한 자기 버림은 한 때의 거지생활로 나타난
다.

거지생활은 무엇보다 하심(河心)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선 거지굴로 들어가 거지생활을 자청했다. 거지들에게는 세 가지 수칙이 있었다. 첫째, 밥은 어떤 밥이든 트집을 하지 않는다.둘째, 옷이 헤져 살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세쨋, 잠자리는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는다. 이 수칙을 지키기로 서약하고 7일간의 거지생활을 하였다.

전주에서도 신분을 감추고 약 2년간 거지생활을 했다. 고행과 걸식의 수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신분이 드러나 "움중", "움막중" 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거지들의 숭앙을 받았다. 스님은 산사만이 아닌 밑바닥 삶의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스님은 선지식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만났다. 그것은 공부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이미 보임(保任)으로 높은 경계에 들어서도 그랬다. 당대의 선지식으로 알려진 수월(水月)선
사를 만나기 위해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들어설 즈음 경비병이 증명을 제출토록 요구했다. 그러나 세간사에 무심한 도인이 출국증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얼떨결에 "안거증(安居證)"을 보여 주었다. 경비병이 "무슨 증명이냐?"고 물었다. "이거야말로 국가가 인정하는 제 1급 출국증"이라고 임기응변으로 대답했다.

경비병은 그만 묵묵부답, 스님을 통과시켰다. 스님은 수월스님을 만나 토굴에서 1년간 함께참선수행을 하였다. 스님의 토굴수행은 너무도 유명하여 일화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온갖 곳을 다니다 날이 저문다든지 교화(敎化)의 연(緣)이 다하면 천막을 치고 며칠이든 묵으면서 정진했다. 그래서 스님의 재산은 가사. 발우. 법의(法衣). 천막이 전부였다.

이런 만행공부는 서산 안면도 백사장에서도 이루어졌으며, 지리산 반야봉에서도 행해졌다.
이곳에선 3일씩 지내며 옛 선사들의 기거처인 묘향대를 찾아 헤매이기도 하였다. 스님은 납자나 제자들에게 언제나 따뜻하게 대했다. 그러나 사사로운 일일지라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용서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엄격했다. 아마도 스님의 많은 제자들이 한국불교의 기둥으로 서게 된 것은 그러한 스님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타파해 마친 스님은 곳곳에서 종풍(宗風)을 드 날렸다. 그 중에서도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에서의 수행은 눈물겨운 바가 많았다. 칠불선원은 1천9백여 년 전 보옥(寶玉)선사가 초암을 짓고 가락국 수로(首露)왕자 7형제를 견성케 한 곳이다. 아자방(啞字房)이 유명하다. 그래서 납자들이 호기심으로 모여들기도 하였다. 금오스님이 시자
와 더불어 이곳에 왔을 때 10여 명의 납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각처로 떠나기로 하고 있었다. 이런 낌새를 안 금오스님이 "우리 종단은 선풍이 해이해져 문제인데, 미진한 공부를 이 아자방에서 결단해 한국불교 증흥에 우리가 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결제중 반(半) 살림은 탁발행각을 하고 반 살림은 용맹정진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러기를 10여 일, 한 학인이 정진을 게을리하여 죽비를 맞자 반항하는 사건이 났다. 그 학인은 완력까지 휘둘렀다. 학인 중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이 때에 금오스님이 "누구를위해 경책을 하는데 도리어 반항을 하는가? 대중들은 모두 저 업장을 때려 부숴라. 저놈이항복하기까지 사정없이 때려라." 추상같은 소리에 대중은 미치 자기 업장에 매질을 하듯 그
학인을 때렸다. 그제서야 그 학인은 용서를 빌었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다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엄격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면이 많았다. 수행중 납자의 의중을 찔러 공부를 격려했다.

다음은 전월사(轉月舍)에 있었던 일이다. 뜰 앞에는 만공스님이 쓴 "반야란(般若蘭)"의 패가붙여진 화분이 있었다.

그 화분을 보고 서 있는 납자에게 스님이 물었다.
"그 꽃 이름이 무엇이요?"

그러자 납자는 대갈(大喝)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절반 밖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자 그 납자는 어리둥절 하였다. 이 때 옆에 있던 만공스님이 빙그레 미소를 짓었다.

안변 석왕사에서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다. 스님은 어느날 허주(虛舟)선사이 행적을 말하고대중에 물었다.

"허주선사가 전주에서 누더기를 기우려고 허수아비의 헝겁을 벗겨냈다. 이 광경을 본 신도가 허주선사에게 "그 헝겁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허주스님은 꽉 막혀 답을 못했으니 대중은 의중을 말해보라." 대중이 대답이 없자 스님은 그 답처를 말했다.이렇듯 스님은 근기에 따라 심안(心眼)을 밝혀주었다.

금오스님은 역사적 격동기에 태어나 뜻한 바 있어 출가하여 수행승으로 외길을 살다 간 당
대의 고승이다. 스님의 투철한 수행과 납자들에 대한 경책은 아마도 근세에 어는 스님보다탁월하게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식 찾아 자기 확인

금오스님은 만행을 통한 투철한 견성체험과 참선을 통한 내재적 개오를 줄기차게 추구한 대표적인 스님이다. 따라서 금오스님은 우리들에게 이 두 가지 행위를 통해서 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금오스님의 주된 사상은 이 두 가지에서 찾아진다. 격동의 시대에 글만 읽어서 무엇하느냐는 단순한 출가동기는 출가 후의 그에게 일관된 내적체험이 얼마나 깊이있게 다뤄져
가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님의 끝없는 정진과 만행 그리고 선지식을 통한 자기증득은 모두 이렇나 내적 욕구에서
출발되어 진다.

누구나 그렇듯 출가 초기에 스님은 선정에 탐한다. 금강산 마하연과 안변 석왕사 내원암에서 서래선(西來禪)에 몸을 묻었다. 스님의 화두는 일관되게 "무(無)"자 였다.

스님은 화두를 드는 납자에게 이렇게 이른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자야, 화두에 쉴새 없이 매달리어라. 화두를 들면 산 사람이요 화두를 놓치면 죽은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은 이와 같은 것이다. 화두를 깨치지 못하면 마음의 눈이 봉사되어 답답해 어찌할꼬."

그러면서 선지식을 예방하여 자기를 점검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월정사, 통도사, 보광전, 천성산, 미타암, 예산 보덕사의 방문은 당대 선지식을 친견하여 자기공부를 넓히고 점검을 하려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래서 스승에 대해서는 늘 엄격했다.

"스승을 공경하는 법도를 말한다. 우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하며, 스승의 높은 지혜를 항상 우러러야 하며, 스승의 깊은 은혜에 보은해야 하느니라."

금오스님이 예산 보덕사에서 보월(寶月)스님과 그의 스승인 만공선사를 만나게 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스님은 그들에게서 한국 선의 본지를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오스님은 선이 관념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대표적인 스님이다. 수행. 자가. 자아의 당처
를 찾기위해 좌선과 정관을 해야 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이로 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관념의함정에 빠지기가 십상이다. 금오스님은 이 점을 경계하여 제방의 선지식을 찾았고, 또 만행을 통해 자아를 찾아내는 수행방법을 병행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거지생활이다. 거지는 하심(下心)의 법당이다. 거기에는 가식과 위선이 존
재하지 않는다. 던져진 상태의 자기 알몸이 거기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의 일주일과 전라도에서의 2년간의 거지 생활로써 승(僧)과 속(俗)이 결코 둘이 아님을 스님은 체험한다. 무애(無愛)란 걸림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된다. 그것은 원초적인 자기이며, 그것은 곧 때묻지 않고 아무 것도 걸림이 없는 마음바탕이다.

금오스님은 그래서 "마음" 찾기를 언제나 이렇게 강조했다.

"불자들이여! 불법은 다만 마음을 돌려 비춰보는 데 있는 것이니 마음을 반조(返照)하지 못하면 바깥 물(物)에 쫓기고 전도(顚倒)되어 억겁토록 고향엘랑 돌아가지 못해 부자유함이 한정없을 것이니 그 괴로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마음을 깨쳤고, 삼세의 보살도 마음을 배웠으며 역대 모든 조사님과 천하의 납승들도 이 마음의 근원을 깨닫고자 하였다. 8만 대장경도 모두 마음을 발현한 것이니, 즉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나아가 53선지식을 두루 참배하여 선지식들에게서 배움을 청한 것도 마음을 깨닫기 위한 것이었다."

금오스님은 마침내 깨친 마음은 그것이 곧 법(法)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만법을 성취하고자 하면, 자기의 심성(心性)을 찾아 알면 만사를 다 이룰 수 있다
. 마음이 사람되었으니 코와 눈과 사람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스님은 마음은 마치 여의주(如意珠)와 같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그 마음 먹은 대로 된다고말한다. 따라서 마음만 정화하면 근심과 걱정과 일체의 고통을 여월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금오스님의 참선수행과 고행은 결국 자성(自性)을 찾는데 있었다. 마음밖에 법(법)이 없으며진성(眞性)의 자아(自我)를 발견하기 위한 피나는 자기 투쟁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읊었다.

"경계(경계)를 뒤집어 마음의 골수에 들어가면 남자가 아니나 남자를 나툴것이며, 여자가 아니나 여자를 나툴 것이며, 모양달이도 아니나 모양달이를 나툴것이며 나는 것은 아니나 나
옴을 나툴 것이며, 마음도 아니나 마음을 나툴 것이다."

금오스님의 선적(禪的) 경지를 가늠케 해 주는 일화가 있다. 금강산에서 수행할 때의 일이
다.

산길을 가는데 한 중년신사가 그를 불렸다.
"스님 나하고 얘기나 한번 합시다."
"그래 할 말이 있으면 해보구려."
"스님은 우주가 창조된 지 몇 해나 되었는지 아시오"?

그의 질문은 도전적이며 또 시험적이었다.
스님은 사뭇 대꾸도 않고 걸었다.
"왜 대꾸가 업소, 하기야 스님이 그 문제를 알 까닭이 있겠소."
깔보는 투였다.
"내가 답을 아니하는 것은 당신이 알아들을지 염려가 돼 그러는거요."
중년신사는 불쾌한 듯
"스님 그렇게 사람을 무시할 수 있소. 우주창조 연대도 모르면서..........."
"무시하는 것은 당신이오."
"그럼 스님이 안단 말이요."
"알다마다요. 그 쪽에서 먼저 말해 보시오."
"그러리다. 우주가 창조된 것은 39년 전이요."
그 사내는 어떠냐는 듯 으쓱댔다.
"거참 소견이 그 뿐이요, 당신 나이가 아마 39센가 보구려."
"그럼 스님이 말해 보시오."

"우리 인간은 항상 아만 때문에 진리이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당신의 아만을 깨뜨리면 당신이 큰 일이 날 일이니 당신소견에 맞춰 답하리다. 우리의 우주 창조연대는 약 5분
전이었소."

금오스님의 또 하나의 사상은 근세의 큰스님이 그렇듯 정화사상이다. 당시만 해도 비구승은대처승의 홀대 속에 그들의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그는 승려라 함은 세상만사를 헌신짝 같이 던져버리는 수도로써 그 목적을 삼아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효봉(曉峰). 동산(東山). 청담(靑潭)스님과 정화에 뛰어들었다. 한때 부종정(副宗正). 총무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화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종단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무사방일(無事放逸)함에 통탄한다. 선풍진작에 노심초사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원장직을 "헌신짝 버리기도 하였다.

기라성 같은 제자 배출

덕숭산(德崇山)은 경허(鏡虛)선사가 근대에 이르러 한국 선종을 증흥시킨 개산지이다. 이곳에서 당대 "선지식 만공(萬空). 혜월(慧月)선사가 이어지고 만공회상에서 용음(龍吟). 고봉(古峰). 적음(寂音). 혜암(惠庵). 전강(田岡). 운봉(雲峰)선사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덕숭산을 한국 선종(禪宗) 증흥의 개산지라 일컫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이 덕숭산의 선맥은 뛰어난 고승들의 가풍에 의해 그대로 오늘의 한국불교, 특히 선지(禪旨)를 계승해가는 큰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선사들은 한결같이 부단한 정진과 수행을 통해 개안을 체득하였고, 선종 특유의 무애가풍을진작시키고 있다. 보월선사가 금오스님의 내적 검증을 통해 그가 보통 법기(法器)가 아님을알고 인가한 것은, 금오스님에게서 덕숭산 가풍 특유의 선지(禪旨)을 이미 발견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금오선사의 선지는 한국 정통선의 맥을 이었으며, 또 그것이 그의 회상(會上)에서 공부했던 스님들이나 직계 제자(恩法)들에게서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선맥을 진작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오스님과 함께 같은 시대를 열어간 당대의 큰 스님들이 많았지만 동진(童眞)출가의 몸으로 한국 정통선을 추구한 스님은 몇 분이나 있었을까.

수좌(首座)정신으로 일관한 끊임없는 발심, 그리고 용맹정진으로 이어지는 청정비구가 곧 금오스님이었다. 스님의 화두는 주로 "시심마(是甚?)"였으며, 제자들에게도 이를 권하였다.그만큼 참선을 중요시한 것이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스님은 "중 자격이 없다"고 질타하였다.

한국불교 근세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근세에 금오스님만한 위상을 갖고 있었던 스님이쉽게 눈에 띄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금오스님에 대한 재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월(寶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득하고도 만행을 통한 견성 체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가 하면 제방의 선지식을 만나고 금강산. 오대산. 월정사. 쌍계사. 망월사와 지리산 칠불선원, 그리고 말년의 법주사 등에 이르는 수행공간은 금오스님의 정신적 공간과 부합된다.이곳 저곳을 할일 없이 기웃거리는 그런 유행(遊行)이 아니라 자기의 당처를 확인하고 검증
하기 위한 보폭이라 할 수 있다.

칠불선원에서의 정진은 금오스님의 선지(禪旨)가 구체적으로 확립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서암(봉암선원 조실). 일각(조계총림 방장). 성찬(도성암 주석) 도광(導光, 전화엄사 주지). 도천 스님등이 그의 회상에서 정진과 수행을 함께 한 스님이다.

이들 스님은 금오스님으롭주터 일정한 예의를 갖춘 제자(恩思)는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금오스님을 존경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들 스님이 매우 뛰어난 선승으로 활약하게 된 것은 각자의 "은사"나 "법사"의 가르침도 있겠지만 금오스님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금오스님은 만행을 통해 자기 개오를 증득하고 때때로 선지식을 찾아 법담을 나누며 이를 점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스님이다. 혜월선사를 찾아 만주행각에 나선 일은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고현(高賢)들이 머문 유적지나 처소를 두루 심방하여 그들의 유지로 안목을 넓혔다. 그것은 모두 스님에게 있어 "스승"이었다.

스님은 스승을 공경하는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마도 그러한
그의 스승과 제자 법도 때문에 스님화상에 많은 제자와 납자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근세 한국 고승중에서 금오스님 만큼 그 문하에 뛰어난 제자를 많이 둔 스님도 드물것이다.

현존해 있는 사법(嗣法)제자만 해도 20여 명에 이르고 있다. 불국선원 조실로 조계종 원로회의의 의장인 상주제자 월산(月山) 조실스님을 필두로 월남(月南). 범행(梵行). 탄성(呑星).이두(二斗). 혜정(慧淨). 월성(月性). 월주(月珠). 월서(月捿). 월탄(月誕). 정일(正日). 월태(月太). 월용(月龍). 천용(天龍). 월선(月禪). 월복(月卜). 월은(月隱). 월학(月鶴). 월국(月國). 삼덕(三德). 남월(南月)스님 등이다.

금오스님은 맏 사법(嗣法) 제자인 월산(月山)스님에게 업적 전 정진과 문도들의 화합, 그리고 사후를 각별히 당부하였다고 한다.

이들 문도 중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종회의장, 교구본사 주지를 상당수 역임했다. 명실상부
하게 한국불교를 이끌어가는 충추적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 스님들은 금오스님으로부터 은법(恩法)을 모두 이어받았는데, 스승(금오스님)에 대한 지극함이 얼마나 큰 가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금오스님의 "스승"에 대한 절제있는 태도가 이들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일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불국사. 법주사.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증흥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또 후학을 가르친다. 이들은 은사 금오스님의 맥을 긍지로 삼는다. 금오스님의 혜월(慧月)-긍현(亘玄)으로 이어지는 은계(恩系)와 만공(萬空)-보월(寶月)로 전해지는 법계를 그
대로 이어 받음으로써 한국 정통선맥을 고스란히 잇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근세의 "마지막 수좌"로 존경을 받았던 금오스님의 가풍은 한국불교의 중추로서 이들스님들에게서 더욱 꽃 피워가고 있다. 효봉. 동산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위해 매진한 금오스님과 불교 정화운동은 그가 오늘날 한국불교에 끼친 또 하나의 공적이다.

동진(童眞) 출가한 몸이기도 해서 스님의 정화원력은 더욱 남다른 바가 있었다. 그러나 금오스님의 정화이념은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깊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정화(淨化)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마음에 있어서는 불량한 마음의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곧 정화요, 몸에 있어서는 일체비행(一切非行)을 고치는 것이 바로 정화이다."

정화의 방법론에도 법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중이라면 정법을 수호하고 정법을사유하여 중생에게 이로움이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

여기에서 보듯 정화는 각자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며, 어디까지나정법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정화가 대처승들을 절에서 몰아내고 절을 점검하는데만 그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정화 후 수행승들이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