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의 향

법정스님 행장

맑은 샘물 2010. 3. 11. 22:21

법정스님 행장

 

 

 

 

 

 

 

 

 

 

 

 

 

법정 스님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연꽃과 같은 영혼의 스승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메아리를 뜻한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가꾸는데 앞장 선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를 결심했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출가에 대한 스님의 변이다.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하셨다.


 

그 뒤 스님은 <불교사전> 편찬 작업,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 초반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의 전신)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내셨다. 1972년 첫 에세이 집 <영혼의 모음>을 동서문화원에서 출판,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73년 6월에는 함석헌이 주도했던 ‘씨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합세하면서 씨의 소리의 큰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스님은 또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기관원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가 괴롭혔다.


 

“피해자 처지에서 군사독재 당사자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핍박을 받는 처지였음에도 당시의 심정을 스님은 이렇게 회고하셨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위기에 봉착하자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조작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된다. 이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하였다. 그러자 독재 정권은 또다시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또 다시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그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여덟 사람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만든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법정 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산으로 들어가신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님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75년 10월 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 가셨다. 


 

부도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 스님은 토굴을 다시 짓고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수행하듯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쓰셨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바로 34년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무소유>이다.


 

1984년 스님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다. 4박 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이 1,080배를 하게 하고, 윤좌 모임을 열어 참선 실수실참을 하게끔 매년 여름 실시되던 여름 선 수련회 기틀을 잡았다. 매년 7월과 8월, 불과 두 달간 열리는 수련회 연 참가 인원은 평균 500여 명으로 불자는 물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받았다. 송광사 수련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뒤 웬만한 큰 사찰들은 거의 여름철 선 수련회를 실시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스님은 다시 한 번 버리고 떠나신다. 17년 간이나 살았던 정든 불일암을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 등쌀에 그조차 뒤로 하시고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드셨다. 1992년 일이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사실과 마주선다. 나라 지도자가 신앙하는 종교에 앞서 충성하려는 너무나 얄팍한 몇몇 사람 처사였음을 접한 스님은 아연실색하셨다. 그 어이없는 심정을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로 발표하신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시게 된다. 날로 각박해져만 가고 메말라만 가는 우리 심성을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자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신 것이다. 주변 친지들의 권유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작은 역할이나마 하시겠다며 1993년 8월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 시키고 1994년 1월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하며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스님 최조의 대중 강연을 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뜻을 함께 하겠다는 회원들을 오늘까지 17년 째 이끌어 주고 계시다.


 

한편 법정 스님이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성북동 대원각 터 7천여 평을 스님께 시주함에 따라 1997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가 개산되었다.


 

법정 스님의 이와 같은 발자취에 따라 오늘날 대중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하는 스님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는 불교계의 어른 스님으로, 주옥같은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온 국민의 스승으로, 한평생 청정하고 올곧게 수행하며 대중들 영혼을 맑히는 이 시대의 큰 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처럼 법정 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하셨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 이래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은둔하는 삶을 사셨다. 수많은 상좌와 지인들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다. 이렇게 맑은 삶을 스님은 주옥같은 산문으로 풀어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무엇보다 스님의 간결하면서도 쉬움 말씀은 일반 독자들이 불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데 큰 발자국을 남기셨다. 1976년 범우사에서 펴낸 <무소유>는 초판 발행 한 뒤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명 에세이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밖에 <산에는 꽃이 피네>, <일기일회> 들은 수십만 독자가 찾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네티즌이 가려 뽑은 스님의 주요 어록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 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에서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산방한담> 중에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에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에서)


 

법정 스님 행장 


 

법명 : 法頂(속명 朴在喆)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朴根培 씨와 金仁葉 씨의 아들로 출생. 우수영 초등학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년 수료. 


 

▶1954년 2월 15일
통영 미래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송광사에서 당대의 큰 스승이었던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1960년 초봄~1961년
운허 스님의 부름을 받고 통도사로 가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했고 이 일을 계기로 타고난 문재(文才)를 발휘해 글을 쓰기 시작함. 한편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함. 


 

▶1967년
동국역경원 개설에 참여하고 역경위원으로 활동 


 

▶1972년
스님의 첫 저서인 「영혼의 모음」발간됨


 

▶1973년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역임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으며 <씨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함. 


 

▶1975년 10월
불현듯 송광사로 돌아감. 인혁당 사건이 발생, 8명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음. 한편 반체제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송광사로 가 뒷산 중턱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수행함.  


 

▶1976년
스님의 대표적인 저서, 「무소유」발간 


 

▶1984년~1987년
송광사 수련원장 역임. 1971년부터 구산 스님이 시작한 송광사 선 수련회는 법정 스님이 수련원장을 맡으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한해 6~7차례에 걸쳐 5백여 명 이상이 참가할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고 이와 같은 4박5일간의 짧은 출가는 전 불교계로 확산, 지금은 많은 사찰에서 선 수련회를 하고 있다.


 


 

▶1987년~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역임 


 

▶1987년
미국 LA에서 김영한 보살(1999년 작고함)이 자신의 소유인 대원각의 대지 7천여 평과 건물(40여 동) 일체를 불교의 수행도량으로 바꾸어달라며 기증할 뜻을 밝힘. 이때 법정 스님은 ‘저는 평생 주지 노릇을 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주지가 될 생각은 없다’며 완곡한 사양의 뜻을 밝힘.  


 

▶1992년
저작 활동으로 명성이 높아져 불일암으로 많은 불자들의 방문이 이어지자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버리고간 오두막에서 지내기 시작함. 강원도 생활 17년째인 2008년 가을에는 묵은 곳을 털고 남쪽 지방에 임시 거처를 마련함.  


 

▶1993년 7월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해 정부의 종교 편향 정책을 지적함. 당시 기독교인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연꽃을 제거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각 현장을 직접 확인한 뒤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함. 이 글을 통해 날로 각박해지고 메말라만 가는 인심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기 위한 시민 운동을 주창함. 또한 불자들의 시주 덕분에 살아왔으니 그 빚을 갚는다는 뜻으로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이끌게 되었음. 이 글이 발표되자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실태를 파악한 후 잘못된 일이라며 시정하겠다는 뜻을 전함.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발기인 모임. 현호스님, 청학 스님, 윤청광, 박수관, 김형균, 이계진, 강정옥, 정채봉, 김유후, 이성용씨 등 지인들의 권유로 순수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시작함. 이 모임의 상징은 연꽃으로 하였고, 그 도안은 고현(조선대 교수)이 함.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 파리 길상사(송광사 파리 분원) 개원. 유럽 여행 도중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불자 교포들과 유학생들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재불(在佛) 화가들과 함께 뜻을 모아 법당을 마련하는데 나섬. 이때 도움을 받은 화주불자들을 위해 ‘길상회’를 결성, 서울 법련사 옆 출판회관에서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선가귀감> 등을 공부했으며 이 모임은 길상사 개원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창립에도 도움이 되었다. 당시 실무는 청학 스님이 맡음.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법회.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창립 기념 대중 법문을 함. 같은 해 4월 4일에는 부산에서 역시 대중법문을 하여 일반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킴. 맑고 향기롭게 모임은 순수 시민단체를 지향, 회원 각자가 자신이 정한 방식대로 후원을 하는데 힘입어 물이 흐르는 만큼 물길이 열리듯 회원들의 성의와 뜻을 모아 우선은 내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지니고, 이웃과 사회를 향한 나눔을 실천하며 소중하고 감사한 자연을 보전, 보존해가는 일에 힘쓰라는 스님의 뜻을 따라 전국 1만여 회원이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 등 6개 지역 모임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음.


 

맑고 향기롭게 장학금을 마련,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매년 학비 지원.. 


 

▶1995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이 조용히 정착하면서부터 김영한 보살이 거듭 대원각을 법정 스님께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힘. 네 차례나 사양하던 법정 스님은 주변 사부대중의 간청을 수락해 김영한 보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함. 다만 스님 개인이 아닌 조계종단의 이름으로, 자신은 상징적인 관리자(주지가 아닌 會主)의 입장에서 대원각을 기증 받겠다는 의지를 천명함. 


 

▶1995년 6월 13일
대원각 터와 건물 일체를 길상사(吉祥寺)로 창건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함. 


 

▶1996년 5월 20일
대원각 부동산 일체를 증여받음. 같은 해 6월 7일 서울지방법원 성북등기소에 등기를 마쳐 법적인 절차를 마침.  


 

▶1996년 8월
청도 운문사에서 1회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련회 실시. 임원 및 전국의 회원 80명 참석. 


 

▶1996년 9월 26일
김영한 보살의 대원각 기증과 길상사 창건 소식이 <동아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킴. 당시 민심이 흉흉하던 터에 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길상사는 창건 법회 이후까지 언론의 중심에 서게 됨.  


 

▶1996년 12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회원이 생기고 후원금이 들어오면서 모임의 공신력이 필요하다는 건의에 따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음. 이때 스님은 부득이 ‘이사장’이란 세속 직위를 받았으나 그것은 서류상의 직책일 뿐이라며 이사장 대신 ‘회주(會主)’라는 호칭을 사용함. 여기서 회주는 어떤 모임의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이후 불교계에서는 특정한 소임을 맡지 않은 어른 스님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게 됨. 


 

▶1997년 1월 말
사부대중으로 구성된 길상사 자문위원회를 통해 향후의 사찰 운영방안과 마스터플랜이 세워짐. 이때 같은 해 12월 14일을 창건 법회일로 정하고 차분히 개원을 준비함.  


 

▶1997년 6월 말
기존에 대원각 터를 임대한 영업주가 임대 기간 만료일인 6월 말을 넘겨 11월 초까지 영업 기간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고 길상사측이 이를 수락해 창건에 따른 보수 공사가 지연됨.  


 

▶1997년 8월
김천 직지사에서 2회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련회 실시. 전국에서 120명 회원이 참석하였고 3박 4일간의 일정을 스님이 직접 진두 지휘하심. 


 

▶1997년 9월~12월
길상사 초대(初代) 주지 청학 스님의 주도로 불철주야 창건 보수 공사를 실시함. 수십 년 동안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을 일소하고 주요 건물을 극락전, 설법전, 요사채, 후원, 시민 선방 등으로 개조하는 일에 박차를 가함. 당시 법정 스님은 강원도 산골 마을에 주석하면서 길상사 창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부대중을 여러 차례 격려함.  


 

▶1997년 12월 14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법회. 4천여 불자가 참여한 가운데 경내 극락전에서 이계진(현 국회의원) 아나운서의 사회로 창건 법회가 진행됨. 각 언론사의 열띤 취재 경쟁 속에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창건 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여 다시금 화제를 불러일으킴. 이 날 법정 스님은 “길상사가 가난하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길 바란다”면서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이며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는 내용의 법문을 함. 김종서, 윤용숙, 김유후, 공종원 님 등을 자문위원으로 모심.


 

한편 법정 스님께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은 김영한 보살은 개원 법회에 참석해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려야 하는데 있는 것을 내놓았을 뿐이니 의미가 없다”고 말해 모든 이들의 가슴에 환희심을 일으킴.


 

맑고 향기롭게 장학금을 길상화 보살의 뜻을 살려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바꾸고 이후 매년 전국의 중고교생 30명을 선정 장학금 지급함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성 100돌 기념 초청 강연. 김수환 추기경의 길상사 창건 법회 축사에 답례 성격도 있음.
글 쓰는 일 외에는 좀체로 하지 않으셨던 대중 법문을 「맑고 향기롭게」근본도량 길상사 창건에 대한 책임과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회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며 격월로 대중법문을 함. 


 

▶1998년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명예 퇴직자를 위한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개설. IMF로 갑작스레 직장에서 내몰리게 된 이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마음을 다스리고, 내일을 다시 준비할 용기를 낼 수 있는 수행과 휴식의 공간으로 운영함 


 

▶1999년
서울 제기동 보문선원과 연대, 노숙자 무료급식소 개설. 매일 300명 이상의 노숙자들에게 점심 무료 제공. 


 

▶2000년
결식이웃 밑반찬 지원 사업 시작. 노숙자가 늘어나면서 결식아동이 늘어나고 무의탁 노인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이들에 대한 지원을 위해 결식이웃 밑반찬 지원 사업을 100가구에서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0여 년간 지속하고 있음. 2010년 현재는 330여 가구를 지원함.
환경 문제의 올바른 인식 및 자연의 소중함을 체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찰생태문화 기행을 시작, 2010년 현재까지 실시하고 있음.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당시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이사장직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임원들의 거듭된 만류로 사임의 뜻을 철회함. 


 

▶2004년
그간 격월로 해 오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의 대중 법문을 연 2회, 4월과 10월 두 번 하심. 


 

▶2005년~2007년
‘맑고 향기로운 책’을 월 1권 선정. 3년 간 총 36권을 회원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읽기를 권유, 독서문화 확대 운동을 펼침.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음. 그러나 이 병고도 당신을 찾아온 친지 중 하나라며 어르고 달래며 지내시겠다는 것을 친지 및 상좌들이 수 차례에 걸쳐 간곡히 권유해 치료를 위해 도미함. 세계 최고 권위의 의사들조차 성공률 4%라며 치료를 주저하였으나 ‘이 분은 수행자로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친지들의 강력한 주장에 치료를 시작, 현대 의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담당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회복하심 


 

▶2008년 2월
미국에서의 치료를 마치고 귀국하심. 이후 다시 길상사에서의 정기 대중법문 하시고, 글도 다시 쓰실 정도로 회복하심.  


 

▶2009년 4월
병고가 재발하여 치료, 요양하심.  


 

▶2010년 3월 현재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길상사의 ‘어른 스님’으로 주석.


 


법정 스님 저서
 


 

법정 스님의 글은 정갈하며 향기롭고 여운이 남는 문체로 불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스님의 삶의 자취와 청정한 영혼이 담긴 수상록 등은 출판될 때마다 수십 만 독자의 관심을 끄는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는 했다.


 

독자들은 자연을 지키며 청빈한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호소하는 스님의 글을 통해 영혼을 정화해왔다. 따라서 스님은 청정하며 올곧은 수행승으로, 이 시대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영혼의 스승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가꿔주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존경받고 있다.


 

스님은 수많은 법문집과 경전 번역서, 여행서 등을 저술했는데 주요 목록은 다음과 같다. 출간년도와 출판사는 초판을 기준으로 정리했으며 일부 저서는 초판 발행 후 출판사와 제목을 바꿔 출간되기도 했다.  


 

<법문집>


 

산에는 꽃이 피네(1998), 일기일회(2009),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2009) 


 

<산문집>


 

영혼의 모음(母音)(1972), 무소유(1976), 서 있는 사람들(1978), 말과 침묵(1982), 산방한담(1983), 물소리 바람소리(1986), 텅빈 충만(1989),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1990), 버리고 떠나기(1993),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6), 오두막 편지(1999), 홀로 사는 즐거움(2004), 아름다운 마무리(2008),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 효봉선사의 자취(1984, 불일출판사),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2006), 맑고 향기롭게(2006) 


 

<역서>


 

불교성전(1972),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1976), 말과 침묵(1982), 진리의 말씀(法句經 1984), 불타 석가모니(1990), 숫타니파타(1994), 因緣이야기(1991), 신역 화엄경(2002), 스승을 찾아서-화엄경 입법계품(2002) 


 

지혜의 말씀(법구경, 백유경, 1978), 나누는 기쁨(보현행원품, 1984), 밖에서 찾지 말라(보조선서 법어, 1989),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숫타니파타 강론집 1990),  


 

<여행서>


 

인도 기행(1991) 


 

<공저>


 

아! 장준하 그 심지에 다시 불길을(1980, 공저), 


 

<영문판>


 

The Mirror of Zen(깨달음의 거울 영문판) / 출판사 동쪽나라 (미국:샴발라출판사) / 저자 Boep Joeng (법정스님) / 단가 US $14,95  


 

May All Beings Be Happy(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영문판) / 저자 법정 지음 | 류시화 번역 출판사 조화로운 삶 / 2006-05-12 출간 | 페이지수 263  


 

Sound of Water Sound of Wind(산문 모음집 영문판) / 법정 지음 / 브라이언 베리 번역 /


 

<중국어판>


 

無所有(무소유 역),


 

山有花(산유화, 산에는 꽃이 피네의 역)


 

凡活著的盡皆幸福(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의 역)
 


 

<일본어판>


 

無所有(무소유 역)

生きとし生けるものこ幸あれ(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역)
 


 

<어린이용 편저>


 

참 맑은 이야기, 참 좋은 이야기(2002), 슬기로운 동화나라(1, 2, 3권 / 2003) 


 

<관련 출판물>


 

봄여름가을겨울(2001), 대화(2004) 


 

<오디오 북>


 

산에는 꽃이 피네 - 낭독 ; 법정스님 / 이계진 / 이미선(동쪽나라, 1999)


 

연꽃 향기를 들으면서 - 낭독 ; 김세원(2007, 아울로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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