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노래

해방전후 영화 : 선구자적 영화 미치광이, 나운규 - 김종원

맑은 샘물 2010. 12. 20. 01:46

해방전후 영화 : 선구자적 영화 미치광이, 나운규 - 김종원

 

 민족정신을 담은 나운규의 아리랑



게시일: 2014. 8. 31.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http://www.ytnscience.co.kr/program/p...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노래, 아리랑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 아리랑이 백 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 아리랑이 만들어지고 불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1926년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영화가 우리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민요 '아리...

YTN SCIENCE


역사가 술술 - 영화로 민족 정신을 깨운 나운규



게시일: 2016. 11. 8.

공식 홈페이지 : http://home.ebs.co.kr/hihistory/main
영화로 민족 정신을 깨운 나운규,

국민 영화 1호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의 독립운동 시절과 아리랑을 만들게 되는 이야기,
재미있는 사건과 인물을 주제로 이야기를 꾸며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초등 대상 한국사 프로그램,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역사적 내용의 뒷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를 다뤄 교과서 역사에 흥미를 갖고, 단순 암기를 위해 생략된 교과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를 구성,

EBS 키즈




춘사 나운규 기념관

 

 

 

 

 

 

 

 

 

 

 

 

 

 

 

 

 

춘사 나운규 기념관 : 서울 성북구 돈암동 아리랑고개길 .. 사진, 연등불 촬영 2010.07.30

 

 

 

 

 

 

 

  

 

선구자적 영화 미치광이, 나운규 - 김종원

 

 

 

오늘날처럼 인간이 세속화하고 상식적으로 길들어지는 사회에서는 편벽한 삶을 누릴망정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존재가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게는 분명 옆으로 가지만 아무도 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게의 횡행적(橫行的) 생존의 생리는 체질화된 특유의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게는 모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는 것이 된다 게의 시각에서는 사람의 걸음이 오히려 역행(逆行)이 된다.

괴짜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모두 바로 가는데 이에 개의치 않고 혼자만 유독 모로 갈 때 괴벽성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조작성이 없다. 채취가 밴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끌림’이 강하게 작용한다.

기행이 통하고 기인이 발붙일 수 있는 사회는 그만큼 멋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낭만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연상의 처녀 사랑한 열세 살 소년

춘사 나운규는 유교적인 범절과 윤리관이 투철했던 대한제국 말기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은막의 별이었다.

나운규는 한국 영화사에 내려진 뿌리였고 메시아였다. 그는 평생을 뜨거운 민족정신으로 일관했고, 조국과 고향을 잃은 실의 속에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고난을 영상에 새겨 놓고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다. 하지만 그는 영화 생활 불과 13년 만에 어느 영화인도 감히 이루지 못한 값진 예술의 자취를 뚜렷이 남겨 놓았다.

나운규는 1902년, 고종 39년 10월 17일 함경북도 화령에서 구한국 시대의 무관인 나형권의 6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구한국군의 부교(副校, 지금의 중위)이던 나씨 집안은 그 때만 해도 지방에선 부끄럽지 않은 가문이었다.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뜬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한일합방이 되자 실의를 안고 낙향한 뒤엔 바깥출입을 삼간 채 오직 한의학 서적을 구해다가 공부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가 인재를 키우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뜻이 맞는 몇몇 사람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을 가르쳤다.

나운규가 태어나 자란 화령은 두만강변에 있는 국경 도시였다. 그래서 무역 도시로 통할 만큼 상거래가 활발했다. 두만강 건너편에 북간도가 있었다. 나라가 망하자 애국지사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학교를 세우고 독립 운동을 했다.

비교적 넉넉한 환경 속에서 4년제인 회령보통학교를 나온 그는 2년제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다. 여기서 그는 일생의 친구가 된 윤봉춘을 알게 된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오래 사귄 사이처럼 가깝게 어울렸다. 그가 열 살 때였다. 운규는 윤봉춘 외에 김용국과도 친하게 사귀었다. 그들은 모이면 패를 나눠 군대놀이를 하거나 독립군 흉내를 내며 놀았다.

운규는 그 중에서도 장난꾸러기로 통했다. 그렇다고 짓궂은 얄개는 아니었다. 이따금 혼자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유별난 소년이었다. 그만큼 조숙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회령 바닥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운규는 윤봉춘의 이웃에 사는 윤마리아라는 이 지방 최고의 미녀를 연모했다. 그녀는 신흥학교와 같은 기독교 계통의 보흥여학교에 다녔다. 윤봉춘의 먼 친척뻘인 연상의 그녀에게 운규는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 봉춘이 배달부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윤마리아가 일본 헌병의 첩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운규는 피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13세였으니 얼마나 당돌했는가.

첫날밤에 줄행랑친 어린 신랑

이 무렵 회령읍 장터에 연극 공연단이 들어왔다. 임성구가 이끄는 혁신단의 순회 공연이었다. 학과 공부보다 구슬피 울어대는 연극 선적 트럼펫 소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견디다 못해 어른들 몰래 천막 속으로 숨어들어가 연극을 구경했다. ‘육혈포 강도’라는 신파극이었다. 재미가 있었다. 그는 불현듯 연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916년 봄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무더운 8월 어느 날 오후, 회령읍에서 갑작스런 연극 소동이 벌어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난데없는 호각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짙게 무대 화장을 한 어린 배우들이 인력거에 앉아 무러고 지껄이며 웃어대고 있었다. 손님을 끌기 위한 선전 행렬인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들은 모두 읍내 유지들이 자제인 나운규, 윤봉춘, 김용국 등 신흥학교 학생들이었다. 인력거에는 이들의 이름과 함께 ‘이전반(二錢半)’이라는 연극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학교 뒷동산 솔밭에서 한 달 동안 연습을 했다. 공연 허가는 부모의 도장을 훔쳐다 찍고 승낙을 받은 것처럼 꾸몄다. 연극의 내용은 운규가 ‘육혈포 강도’를 모방해 쓴 것으로, 주연 역시 그가 맡았다.

이렇게 나운규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운규는 윤마리아에게 쏟았던 사랑의 상처를 간직한 채 부모가 정해준 배필에게 장가를 갔다. 그보다 세 살이나 위인 조정옥이라는 여자였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색시였다. 질겁한 열다섯 어린 신랑은 첫날밤을 친구인 봉춘의 집에서 보냈다. 윤마리아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운규가 윤마리아에게 보낸 편지가 불온 문서라는 낙인이 찍혀 압수당하자 그는 얼마 뒤 행방을 감추었다. 그가 유서를 써놓고 일본인 묘지가 있는 산에 올라가 자살을 하려고 막 약병을 드는 순간, 때마침 찾아나선 담임 선생과 급우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3천호 가량 되는 회령읍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건으로 하여 그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운규는 이튿날 밤, 집을 뛰쳐나와 두만강을 건넜다.

신출내기 대사부터 고치다

나운규는 교내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을 회령으로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차례 밤을 틈타 두만강을 넘곤 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종익이라는 사내아이를 얻고 이어 딸(진자)를 보았다. 하지만 신문을 회령으로 전달하는 모험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장재촌 일대에 불어닥친 기미년 독립 만세 사건이 여파로 검거 선풍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운규는 제정(帝政) 러시아가 모집한 삯군(외인부대)에 지원했다. 뒷날 그가 내놓은 영화 [풍운아](1926)는 바로 이 방랑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이 군대를 탈출할 때까지 한 러시아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망 나와 잠시 집에 들른 뒤 그는 서울로 왔다. 그리고 윤봉춘과 함께 서대문에서 하숙을 정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다. 1921년 20세 전후의 일이다.

이 때부터 영화에 미쳐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어두운 극장에 들어앉아 좋은 장면이나 해설은 노트에 적고 손거울을 갖고 다니며 화면에서 본 주인공의 표정을 흉내내곤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식당이나 친구집에 가도 가만있질 않았다. 으레 거울 앞에 앉아 온갖 해괴한 표정을 다 지어보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실로 우스운 짓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영화사가 창설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부산의 ‘조선키네마’에서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가 난 것은 얼마 뒤였다. 그는 이 가시를 보자 짐을 챙겨 부산으로 내려갔다. 1924년 가을이었다.

그런데 밤을 새워 연기 연습을 한 보람도 없이 한국식 예명을 가진 일본인 왕필렬 감독의 연기 테스트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 때 이 영화사에는 왕 감독 외에도 신진 감독 윤백남과 안종화, 이채전과 같은 전속 배우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의 연기를 본 안종화의 간청으로 그는 간신히 합격자 명단에 낄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한 달에 11원을 받는 연구생이 되었다. 안종화의 도움으로 조선키네마에 입사한 나운규는 1923년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雲英傳)]에 출연했다. 그가 이 처녀작에서 얻은 배역이란 보잘것없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다. 운영이라는 여주인공을 가마에 태우고 가는 교군(轎軍)에 지나지 않았지만, 풋내기인 그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큰 배역이었다. 그는 이 출연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영화의 스틸을 구해 고향의 친구들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한국 영화계의 귀재, 1920년대를 휩쓴 불세출의 풍운아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1925년 2월 윤백남이 서울로 올라와 백남프로덕션을 세우고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이경손 감독)을 선정했을 때, 그는 일약 주연급인 심봉사 역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이 작품에 이어 [농중조(籠中鳥, 조롱 속의 새)]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배역을 맡자 우선 자기 역의 대사부터 뜯어고쳤다. 이 당돌한 신인의 행동은 당시 영화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가 대표작 [아리랑](1926)을 내놓게 된 것도 실상 따지고 보면 이런 엉뚱함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작품을 제작할 때는 흔히 자기가 직접 감독하고 주연을 맡았는데, 대본은 이미 그의 머리에 들어 있었다. 대본도 없이 복잡한 장면을 앞뒤를 뒤바꿔 가며 거침없이 내리찍었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 속에서 덜덜 떨면서 호떡 한 개로 점심을 때우며 하루 종일 30여 장면이나 촬영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에 미친 사람, 바로 그것이었다.

외곬으로 영화 속에서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은 때문인지 그에게는 사람을 싫어하는 괴벽이 있었다. 문사니 지식인이니 하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쩌다 신문사에서 영화 관계를 묻고 싶다면 할 수 없이 출두했는데, 사냥 모자에 검은 망토, 게다가 감기 예방 마스크까지 하고는 두 계단씩 뛰어올라 편집실로 사라졌다.

이 고독한 선구자, 그가 마음 붙일 곳은 영화와 여자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천재, 영화왕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탕아라는 비난이 함께 따랐다. 전성기 때 지방 공연에서 벌어들인 그 많은 돈도 여자들에게 탕진하여 동료들의 고생은 돌보지 않았다. [벙어리 삼룡]을 촬영할 때는 도중에 카메라를 잡히고 기생과 함께 며칠씩 행방을 감추기도 했다.

그는 항상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영원히 남을 걸작을 남기고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하더니 한창 나이인 서른여섯에 폐병을 앓다가 [오몽녀] 연출을 마지막으로 짧은 생애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이 병이 깊어진 몸으로 [오몽녀]를 연출할 때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쳐가며 주치의를 대기시켜 놓고 피를 토하며 지쳐서 실신할 때마다 주사를 맞아가면서 작업을 강행했다.

1937년, 그는 옆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곡에 맞추어 손을 들어 지휘하면서 눈을 감았다. 타오르는 열정 때문에 영화 미치광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춘사 나운규. 그가 외롭게 떠나는 이승실을 눈물로 지켜본 사람은 오직 [무화과](1935)에서 공연한 최후의 애인 현방란 한 사람뿐이었다.



김종원(金鐘元) 1937년 제주도 출생이다. 서라벌예술대학 및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2002년 현재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 겸임 교수이며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세계 명배우>, <시네마 에로티시즘>, <영상시대의 우화>, <스크린 인생론>, <한국 영화감독 사전> 등이 있다.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노래 ‘아리랑’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살 꽃본듣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밀양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만 주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정선아리랑)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 ... 아라리가 났네(진도아리랑)”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노래로 꼽히는 아리랑은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요답게 지역마다 불리는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 아리랑에 관련한 사건이 근현대사에 두 번이 있었지요.

하나는 1926년 개봉한 영화 아리랑이고, 또 하나는 1991년 남북이 세계무대에서 함께 쓸 단가 ‘아리랑’ 제작입니다.

먼저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는 나운규 감독 ㆍ주연의 “아리랑”이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개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는데 개봉 첫날부터 유례없는 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지요.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주제가인 민요아리랑은 마치 조국을 잃은 겨레가 애국가처럼 부르게 되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아리랑"은 항일저항정신을 필름에 아로새긴 민족영화였다는 평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1991년에 또 생겼지요. 아직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북이 공동으로 부르고,

남북이 하나의 겨레임을 드러내는 노래가 아리랑임을 온 세상에 선언한 것입니다.

4차에 걸친 판문점 회담 끝에 1991년 단일팀 구성에 따른 공식적인 ‘합의서’

곧 선수단 호칭은 “코리아”, 선수단 단가는 “아리랑”, 선수단 단기는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로 합의를 보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북한이 악보를 보내오고 남한이 제작한 아리랑이 1991년 4월 12일 탄생한 것입니다.

어쩌면 남북한 공동의 “아리랑의 날”이 새롭게 만들어진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