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 바람처럼 살다 간 미친 중, 경허 - 석지현
때는 구한말, 밖으로는 일제 침략이 시작되고 안으로는 기존의 봉건 세력들이 흔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장대 같은 수염의 중이 양반집을 찾아다니며 시주금을 걷고 있었다.
“대사는 어느 절에서 왔으며 무슨 일로 이렇게 동냥을 하고 다니는가?”
산적 같은 중은 두 눈을 굴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소승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은고사의 중입니다. 법당의 단청(丹靑)을 다시 하기 위하여 그 기금을 모으는 중입니다.”
이 중이 내민 권선문(勸善文)을 본 양반들은 혀를 내두렀다. 마구잡이로 갈겨 쓴 글씨지만 거기 등천하는 용의 기상과 비수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한나절이 되자 엽전 주머니에 돈이 두둑히 차게 되었다.
“만공(滿空), 이만하면 노자는 충분하겠지.”
이 중은 자기 뒤를 따라오고 있는 상좌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은고사 법당 단청 불사(佛事) 기금은 사흘도 못 가서 또 바닥이 나고 말았다. 모조리 술값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중이 바로 한국 선종의 증흥조 경허(鏡虛, 1849-1912) 선사다.
참으로 멋진 단청 불사
경허와 그의 제자 만공은 그때 해인사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경허는 주막만 있다 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막걸리 한 사발쯤은 들이켜고 주모와 걸쭉한 상말들을 주거니 받거니 해야만 속이 풀렸다. 이런 식이니 금강산의 반도 못 가서 노자가 바닥날 수밖에..... . 막걸리는 경허가 마시고 술값은 상좌인 만공이 냈다. 만공은 그만 울상이 되었다.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울상을 하고 있는 만공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미친 중은 고함을 벽력같이 질러댔다.
“어서 붓하고 종일 가져오너라.”
경허는 먹물을 찍어 닥치는 대로 휘갈겨 내려갔다. 은고사 법당 단청 불사 권선문이었다. 이렇게 급조한 권선문 덕분에 다시 엽전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경허는 시주금으로 또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돈마저 며칠 못 가서 바닥이 나고 만 것이다.
경허와 만공이 멀리 산이 보이는 들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어허 취하는군, 만공, 여기서 좀 쉬었다 가세그려.”
휘청거리던 경허는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먼 산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만공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은고사 법당 단청 불사기금으로 모은 돈을 다 털어 술을 마시다니, 중이 벌건 대낮부터 술에 곤드레가 되어 휘청거리고 있다니, 만공은 애초에 경허를 스승으로 모신 것을 후회했다.
참다못한 만공은 말했다.
“스님,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법당 단청 불사 시주금으로 술을 사 먹었으니 우리는 지금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처님이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저는 죄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경허의 두 눈에서 번개가 쳤다.
“야, 이사람아, 내가 이 이상 더 어떻게 단청 불사를 잘하란 말인가?‘
얼이 빠져 버린 만공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경허의 얼굴을 보았다. 경허의 얼굴은 술기운에 불그레했고, 초겨울 추위가 거기 겹쳐 푸릇푸릇했다. 간간이 날리는 눈발로 희끗희끗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만공은 두 무릎을 쳤다. 그렇다! 이 이상 멋진 단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마음이 부처일진대 이 몸은 분명히 부처가 사는 법당일 것이다. 경허는 죽은 법당이 아니라 살아 있는 법당에 멋진 단청 불사를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것은 경허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려고 꾸민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경허는 형식적으로 살지 않고 혼 전체로 살다 간 사람이다. 선(禪)에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라 한다. 그래서 떠돌이 중 단하천연은 목불(木佛)을 쪼개서 불을 때지 않았던가. 경허는 저 영원의 세계를 이론이 아니라 뼈저린 수행을 통해 체험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어 있는 언어가 아니라 생생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극단론에 떨어지기 쉽다. 육체밖에 모르는 쾌락주의가 아니면 육체를 혹사시키는 고행주의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나 육체는 저 영원한 것의 가시적(可視的)인 현상이요 마음은 또 저 영원한 것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쾌락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 가는 로켓으로서 사용되어져야 한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그 육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씨가 싹트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쾌락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육체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획일화, 경직화, 비인간화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물질 현상으로 나타난 영혼의 신비 구조인 육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해 가는 우리 자신을 본래 인간의 위치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경허의 이 기행은 바로 이 점을 이론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인 것이다. 모든 행위는 일회적(一回的)일 때, 그리고 작위적(作爲的)이 아닐 때만 의미를 갖는다. 뒷 사람들이 자신의 탈선에 대한 변명으로써 경허의 이런 기행을 방파제로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경허의 이런 행위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확일화에 대한 하나의 경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피고름덩이를 껴안은 경허
그렇다면 경허는 왜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까. 더구나 당시 최고 고승의 위치에 있던 그가 왜 술주정뱅이 떠돌이 중이 되었는가. 왜 파계승이 되어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만 했는가. 여기에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있다.
경허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충남 서산 천장암에 있을 때였다. 추운 겨울날, 어둠이 깔릴 무렵 한 미친 여자가 천장암을 찾아왔다. 이 여자의 온몸은 피고름으로 범벅이 되어서 피고름 썩는 냄새 때문에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미친 여자는 히쭉히쭉 웃으며 부엌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밥을 주거나 추위를 막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고름 냄새 때문에 중들은 코를 막으며 그녀를 절 밖으로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사코 부엌문을 잡고 나가려하지 않았다. 밥 짓는 냄새와 불 기운만이 그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미친것이 어디 감히 신성한 부처님 도장(道場)에 와서 이러는 거야. 신장(神將)님이 노하신다. 어서 나가라니깐. 청정한 도량을 더럽히지 말고 어서 썩 나가지 못할까.”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어라고 부엌문을 잡고 있었다. 그 때 밖의 이 소란스러움이 경허의 명상을 깨웠다. 경허가 깊은 선정(禪定)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왔을 때 이 광경을 보았다.
경허는 아무 말 없이 그 미친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만난 연인처럼..... . 다른 중들은 어처구니없어서 닭 쫓던 개처럼 멍청하니 이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날부터 경허가 피고름덩이 미친 여자와 한 방 한 이불에서 먹고 자기 열흘째, 주지는 경허에게 미친 여자를 제발 돌려보내라고 사정했다. 절의 체면이 말이 아니고 또 신도들이 이를 알면 큰일이 난다는 것이었다. 경허는 미친 여자에게 얼마간의 노자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했다. 미친 여자는 경허와의 열흘간의 사랑 끝에 미친 증세가 완전히 나아 버렸다. 조건 없는 인간의 사랑이, 아니 슬프다 못해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이 미친 중의 사랑이 그녀의 미친 증세를 녹여 버렸던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라도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경허에게 이 말을 남기고 천장암을 내려갔다.
그 날 이후로 경허에게는 극심한 피부병이 찾아왔다. 그녀가 주고 간 가장 인간적인 선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피부병은 아무리 약을 써도 도무지 낮지 않았다. 경허의 피부는 전신이 피고름으로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 민간 비방(秘方)에 능통하다는 어떤 의원을 만났다.
“이 피부병은 아주 특이한 것이라서 웬만한 약으로는 듣지 않습니다. 닭똥으로 소주를 달여서 개고기와 함께 하루에 서너 번씩 먹어 보십시오. 혹시 차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원의 이 말을 듣고 그 날부터 경허는 그 독한 닭똥 소주에 개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피부병의 약으로.
이렇게 하여 경허의 술 마시는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피고름덩이 미친 여자를, 그 슬픔의 덩어리를 자기 것으로 안아 버린 경허.
“에라, 이 미친놈의 세상, 마음껏 술이나 퍼마시다 가자.”
경허는 필시 이런 심정에서 고승의 위치마저 차 버리고 술과 방랑을 시작했을 것이다. 신성한 도량이라는 핑계로 정말 도움이 필요한 한 영혼을 거절하는 종교적 현실이, 이 허위와 겉치레가 눈뜬 경허로 하여금 미쳐 울부짖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을 것이다.
동욱, 계허대사가 머리를 깎아 주다
경허는 한국 불교계에 나타난 찬란한 별이었다. 꺼져 가던 선풍(禪風)이 그로 말미암아 다시 불붙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근세의 고승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만 해도 만공을 비롯해서 혜울, 방한암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이는 원효와 경허가 없는 한국 불교는 불 꺼진 하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허 같은 사람이 한국에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를 싸고도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만도 한두 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일생을 엿보는 데 있어서 단 한 가지 참고 자료가 있다면 그것은 [경허집(鏡虛集)] 안에 한용운이 찬(撰)에 놓은 [경허당약보(鏡虛堂略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모태(母胎)를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로 이런 것이 전해진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사흘 동안을 움직이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아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은 줄만 알았던 핏덩어리가 사흘이 지나자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그 조그만 입에서 우레 같은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동네 사람들이 언제나 기이한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는 1849년 송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을 동욱이라 했다. 그이ㅡ 나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동욱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길에 올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동욱은 도중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청계사에서 계허대사의 손에 머리를 깎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일찍이 불문에 들게 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로부터 나이 어린 동욱은 뼈를 깎는 고행의 길에 올랐다. 그는 남달리 힘이 센 장사였으므로 물 긷고 밥 짓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으며 한 4, 5년 동안은 미처 불경을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나이 열네 살 나던 해 여름, 마침 불경에 능통한 어느 스님이 그가 있는 청계사를 찾아와 함께 그 해 여름을 나게 되었다. 그는 그 스님에게서 불경을 공부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공부가 날로 새로워 질 무렵, 그의 스승 계허대사가 속가(俗家)로 나가게 되었다. 계허대사는 동욱의 불경 공부를 중단시키기가 아까워 평소에 친분이 있던 계룡사 동학사의 만화 스님에게 그를 보냈다.
그는 만화 스님 밑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 팔만대장경을 다르게 부르는 칭호)를 다 끝낸 것은 물론, 사서삼경을 비롯한 세속의 모든 경서까지 모조리 읽어 버렸다. 벌써부터 동욱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동욱의 나이 스물세 살 되던 해, 그는 만화 스님의 뒤를 이어 동학사의 강사(講師, 불법을 강설하는 스승)가 되었다. 그의 밑에는 사방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되던 해 여름, 동욱은 홀연히 속세로 나간 옛 스승 계허가 생각 났다. 동욱과 계허는 사제 관계를 넘어서 남달리 서로를 아끼는 정이 두터웠다.
날이 새자 동욱은 계허를 찾아 길을 떠났다. 도중에서 갑작스러운 비를 만나 급히 가까운 인가로 비를 피해 갔다. 마을은 집집마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고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동욱의 부르는 소리에 산발을 한 노파 하나가 겨우 오막살이의 문을 밀치고 나왔다. 동욱은 마을에 사람의 자취가 끊긴 이유를 물었다. 사연인즉 지금 이 마을에는 염병이 퍼져서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병을 앓고 누워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동욱은 눈이 번쩍 떴다. 지금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의 까마득한 절벽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우선 급한 것은 바로 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삶과 죽음’, 이것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면 그 밖의 일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기자, 다시 돌아가자. 가서 내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자.“
그 길로 동욱은 발길을 돌려 동학사로 되돌아 왔다.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는 불경 강의를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제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학사를 떠나갔다. 작별 인사를 받는 그의 가슴은 아팠다. 제자들이 떠나간 다음 마른 나뭇잎 소리만이 빈 절을 채우고 있었다. 동욱은 평소 그렇게 아끼던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아무리 문자를 뒤지고 따져 봐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고리를 안으로 굳게 걸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갔다. 오직 ‘삶과 죽음’의 문제만이 시퍼런 칼끝이 되어 그이 뼛속을 찔렀다.
“그렇다. 결국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목숨이 다하는 날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찌 되는가. 왜 태어난 자는 죽어야만 하는가. 꼭 죽어야만 한다면 죽음 뒤의 세상은 또 무엇인가. 이 육체가 한낱 시체가 되어 싸늘해질 때 의지처를 잃어버린 이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왜 태어나 왜 죽는가?”
‘왜?’ 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더 이상 나갈 곳 없는 마음이
어떤 중이 선사(禪師) 조주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음, 뜰 앞의 잣나무로다.”
당시 조주의 방 앞에는 큰 잣나무가 있었다. 마침 그 때 조주는 아무 생각 없이 잣나무를 보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중은 조주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사람을 놀리지 마십시오.”
조주의 대답이 울렸다.
“그대를 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중은 다시 옷깃을 가다듬고 물었다.
“부처는 어떤 분입니까?”
조주의 대답이 낭랑히 울렸다.
“뜰 앞의 잣나무로다.”
찰나, 그 중의 내면에는 번개 같은 섬광이 스쳤다. 그 중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를 공안(公案)이라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문 없는 문이라는 말이다.
동욱이 잡은 공안은 ‘나귀의 일이 가기도 전에 말의 일이 온다’ 였다. 내면으로 내면으로 파고들던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백 척이 넘는 장대 위에 서 있거나, 사방이 쇠로 된 벽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한 중이 그의 방 앞을 지나가며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
“소는 소로되 콧구멍 없는 무쇠 소로다.”
이 때 그의 마음에서 무시무시한 우레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소리없는 벼락이었다. 그러나 그 벼락은 너무나도 커서 우주를 갈갈이 찢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레 소리와 함께 그렇게도 견고하던 아집의 벽은 산산히 부서졌다. 차별이 있던 이 현상계는 온통 진리의 바다로 들어가 하나가 되고, 세계와 내가 동시에 태초(太初)의 무(無) 이전이 상태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나’와 ‘남’ 즉, ‘세계’를 구분하는 일이 부질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로 동욱은 문득 ‘경허’로 탈바꿈한다. 경허는 ‘거울이 비었다’는 뜻이다. 저 망망한 우주에서 오직 ‘빈 거울’과 같은 상태만이 가득차 있을뿐이었다.
경허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우습고 우습도다
소를 타고 가면서 소를 찾는 짓이여.
그늘 없는 나무 베어다가
저 바다의 거품을 태워 다하라.
빈 거울, 경허의 마음에는 의심이 사라지고 웃음이 굽이쳐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비로소 가장 밝음에서부터 가장 어두움에까지 갈 수 있는 해탈을 체험한 것이었다. 아니, 그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본래의 능력으로서의 깨달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버렸다. 삶과 죽음이 해결된 자리에서 볼 때 세상 만사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 일상 생활 그대로가 말할 수 없이 아기자기한 소꿉놀이였다.
경허는 조용히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1880년 11월, 그의 나이 31살 되던 해 그믐이었다.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에
이 우주가 도무지 나라는 것을 알았네
오뉴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한가한 길손이 태평가를 부르네
예전 같으면 아무리 책을 뒤지고 머리를 짜내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의문들이 이로부터 얼음 녹듯 풀리기 시작했다. 경허는 이제 장부의 일대사(一大事)를 끝마쳐 버린 것이었다. 하찮은 예의범절이나 승방의 계율로부터 ‘큰 자유’를 얻은 자신을 가두어 놓기에는 그의 날아오를 수 있는 힘이 너무나 강렬하게 용솟음쳤다. 이제 그 어떤 규범도 그를 가둘 수는 없었다. 배고프면 정신없이 밥 먹고, 피곤하면 푹 자는 그대로가 모두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길이었음을 안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그야말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마음껏 허공을 나는 새의 자태, 바로 그런 자유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큰 자유의 생활은 그로 하여금 물의 본서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물은 일정한 빛깔이 없다. 물에게는 어떤 일정한 형태도 없다. 물은 그렇기 때문에 형태 없음의 무(無)를 통하여 어떤 형태로도 즉시 변형될 수 있는 유(有)를 실현한다.
물의 무색(無色)은 모든 색의 총집합체로서의 무색이다. 물에 붉은 물감을 풀면 물은 붉은 피가 된다. 검은 물감을 넣으면 물은 어둠이 된다. 따라서 물은 어떤 빛깔의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다. 물의 궁극의 목적이란 ‘흐르고 있다’는 현재 진형행뿐이다. 이 현재 진행은 어떤 목적을 향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물은 현재의 상태 그대로가 최상의 목표라는 순간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물에는 불변성과 가변성의 두 가지 성질이 있다. 앞의 것은 물의 내면으로서 물의 온도의 차이에 따라 얼음이나 눈, 혹은 안개, 구름, 수증기 등 천차만별로 변화되어도 물이 가진 특성은 변치 않는다는 물의 불변성을 말한다. 뒤의 것은 수증기, 얼음, 눈, 안개, 구름 등으로 변화하는 물의 가변성과 적응력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은 물이다. 물은 부드럽고 애처롭고 수동적이다. 물은 그저 말없이 흐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 역시 물이다. 폭풍우가 되어 울부짓는 물, 해일로 변하여 허연 배때기를 세우고 달려와 대지를 삼켜버리는 물, 선이 에너지의 승화라면 악은 에너지의 강렬한 파동을 뜻한다. 물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순의 극치다.
따라서 우리가 물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물은 그저 물인 것이다.
경허가 깨달음을 통하여 얻은 삶이란 바로 이러한 물의 철저한 육화(肉化)였다. 물은 저항한다. 인습의 무기력을 싫어한다. 물은 경허를 통하여 ‘사고(思考)’의 극치로서 행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경허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대로가 그의 행동의 근원인 직관으로부터 나타나는 내면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경허’라는 이름마저 버리고 경허는 말년에 승복을 벗어 던졌다. 우글거리는 상투잡이들 속에서 그 인습에 반기를 들어 서리가 내린 머리카락을 자른 경허는 이번에는, 그 즈음 일본인들이 이 나라 방방곡곡에 내린 단발령에 반항하여 장발을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냄새나는 승복마저 벗어 버린 것이다.
경허의 반항 정신은 타는 불길이었다. 그 무엇이라도 태워 버리는 불길이었다. 결국 열반의 세계인 승가도 생사의 세계인 속가도 경허를 잡아 두기에는 너무나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경허가 서로 대립되는 이 두 세계를 박차고 나선 것은 그의 나이가 이미 오십 고개를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경허는 ‘경허’라는 이름도 버리고 난주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고승에서 일개 무명의 속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난주는 그 후 두메산골로 이름난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한글방의 훈장이 되었다. 난주의 남은 생애가 결정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난주는 글방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나 내일 가네.”
“가시다니 어디로 가십니까?”
“그저 바람 따라 갈 뿐이네.”
제자들은 평소에 난주를 몹시 존경하고 있던 터였다. 그들에게는 난주 선생이 떠난다는 말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튿날 아침, 제자들은 그들이 아끼던 물건을 가지고 난주를 찾아갔다. 이별의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글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난주는 정좌를 한 채 영원히 가버린 것이었다. 난주의 얼굴에는 한 줄기 슬픔과도 같은 가녀린 빛이 비치고 있었다. 결코 자신 때문이 아닌 남의 슬픔, 아니 그것보다도 나라 없는 이 민족의 슬픔이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아주 가셨군요. 저희들은 어찌하란 말입니까.”
제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창밖에는 떡갈나무 마른 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난주의 시신은 양지 바른 곳에 묻혀졌다. 제자들은 후손이 없는 난주를 위해 그들 서로가 후손이 되어 제사를 지내드렸다.
3년 후 송낙을 쓴 중 일행이 이 마을을 찾아와 난주의 행방을 물었다. 제자 만공의 일행이었다. 만공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싸움이 벌어졌다. ‘묘를 파 가겠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된다’는 어긋난 의견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급기야 관에까지 파급되고 관은 만공에게 우선권을 줬다. 만공은 스승의 묘를 찾아갔다. 묘 앞에는 초라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난주 선생의 묘(蘭州先生之墓)’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을 보는 만공의 가슴은 아팠다. 지난날 경허와 함께 멋진 ‘단청 불사’를 하며 방랑하던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매게 하는 것이었다. 묘를 파고 관을 뜯었다. 장발에 도포를 입은 경허의 모습이 마치 생시와도 같았다. 만공은 다비불을 부치며 한 수의 시를 지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경허를 잘 표현한 글이었다.
시비에 물들지 않는 바람 같은 손이 있어
난득산 기슭에서 세월 밖의 노래를 그쳤네
갈 길도 다하고 이 저문 날에
먹지도 못하는 저 두견이 솥 적다 솥 적다 울고 있네
석지현(釋智賢)
1946년 태어나 동국대학교 불교과를 졸업하였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점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인도의 불교 성지와 예루살렘의 성지들을 순례하였다. 지은 책으로 <선(禪)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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