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나는 왜 괴로운가?...... ‘나는’ 하는 생각 때문이니...

맑은 샘물 2011. 12. 10. 23:11
나는 왜 괴로운가?...... ‘나는’ 하는 생각 때문이니...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보살이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과거 인행(因行) 시의 다른 이름이니,

일체 세간 중생의 음성을 관하고 그들이 처한 고난에서 건져내어 편안하게 해주시는 자비의 보살이다. 42수 관세음보살로도 화현하고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로도 나타나시어 신통이 자재하므로,

시방국토에 그 몸을 나타내지 않는 곳이 없는 보살이며,

나의 주인공(有와 無를 초월한 佛性, 本來心)이기도 하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다는 위에서 강의하였거니와, 깊이 행한다는 것은 깊이 공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깊이’라는 것과 ‘행한다’의 뜻이 중요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깊이 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행하는 것인가를 말하기로 한다.

 

깊이 한다는 것은 거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하는 것이요, 엷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숙이 하는 것이요, 거짓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다이 하는 것이요,

헛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실다이 하는 것이요, 흐린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칼날 같은 정신으로 하는 것이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하는 것이요,


하다가 쉬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하는 사람처럼 불을 얻을 때까지 쉬지 않고 비비는 것이요, 고양이가 쥐구멍을 노리듯이 내가 몸소 고양이가 되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요, 일천 길 되는 우물에 빠진 사람이 되어서 나올 생각 외에는 아무 다른 생각이 없이 하는 것이요,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칼을 품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꾀나 눈치나 사량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깊이 밑바닥을 볼 때까지 고요하고 세밀히 하는 것이 공부를 깊이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공부를 하지 아니하므로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십 년, 이십 년 내지 일생을 공부하였다면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오늘 입학한 사람이나 조금도 다를 것 없는 것을 간혹 보게 되나니 이 무슨 까닭인가. 공부를 깊이 하지 않은 소이이다.

 

어찌 개탄할 바가 아니리오.

고인이 말하기를 상사(上士)는 말없이 알고, 중사(中士)는 말을 기다려서 알고, 가장 둔하고 멍청한 하사(下士)는 칠일(七日)이면 안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거짓말이리오.

내 아무리 어리석기로서 하사의 한 사람 중에야 속할 것이어늘 이도 못함은 어찌 불쌍한 사람이 아니리오.

 

행(行)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몸소 실행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 공부는 말로나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요, 사량이나 분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고 나가는 것이요, 입으로 삼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삼매에 드는 것이요, 객관적 외면사물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내적 자기 면목을 직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한다고 한 것이니 관자재보살이 이와 같이 피안에 도달하는 공부를 깊이 행할 때에 라는 뜻이 된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온이 다 공인 것을 비춰 보아

 

오온(五蘊)은 색(色)과 받는 것[受]과 생각하는 것[想]과 행하는 것[行]과 알음알이[識]를 칭함이니 우리의 사대색신이 색·수·상·행·식 오온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색(色)은 몸이요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은 마음이니 곧 유형의 몸과 무형의 마음으로써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다 공(空)인 것을 비춰본다 하였으니,

 비춰본다는 것은 지혜의 눈으로 조견(照見)한다는 것이 되려니와, 어찌하여 오온이 공(空)인가 이것이 알고 싶은 핵심인 것이다.

 

우선 가까운 예로 우리의 일상생활과 공(空)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람은 입고 먹고 주하는 세 가지로써 생활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입고 먹고 하는 의식이나 살고 있는 주택이 모두 공으로 되어 있다.

방이 공하였기에 우리가 공에서 앉고 눕고 먹고 자고 글 읽고 바느질하고 하는 것이요, 곳간[庫間]이 공하게 되었기에 물건을 저장하는 것이요,

 부엌이 공하였기에 불을 때게 된 것이며, 식생활에 유용되는 도구로 볼지라도 솥이 비었기에 밥을 짓는 것이요, 항아리가 비었기에 장을 담그는 것이요,

 밥그릇이 공이고 대접이 공이기에 밥과 국을 담는 것이요,

옹박이 투가리 병 차관이 모두 공인 것이며, 입는 의류(衣類)를 볼지라도 저고리가 비어 있어야 팔이 들어가고 바지가 비어 있어야 다리가 들어가니, 코트 장갑 양말 등 모두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이것뿐이리오.

우리 인체의 구성을 볼지라도 눈이 비었고, 코가 비었고, 귀가 비었고, 입이 비었고, 뱃속이 비었고, 창자가 비었고, 대소변 구멍이 모두가 공이어서 공으로 구성된 몸이라 일시라도 공이 아니면 호흡을 못하여 생명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空)과 생활과의 관계는 공이 곧 생활이요, 생활이 곧 공이어서 일체인 것이며 이와 같은 공은 공부가 점점 깊어가면 무아(無我)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니 색·수·상·행·식 오온이 다 공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의 강의에서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리 생활과 공과의 관계만을 말하여 둔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일체 고액을 멸도하였느니라

 

어떠한 괴로움이거나 어떠한 액이라도 다 건져서 제도 되었다는 뜻이다.

 오온이 다 공인지라 내 몸과 마음이 없거니 무슨 고액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있다 할지라도 고액(苦厄)이 실다운 자체가 없는지라 실상이 아니면 모든 것이 다 허환(虛幻)한 것이니 환은 참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고액이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괴로운가 하고 묻는 이가 있다면 이것은 ‘나는’ 하는 생각 때문이니 원래 내가 없는 것을 내가 있는 것으로 망각(妄覺)함으로 인하여 고와 낙이 없는 것을 고와 낙이 있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리라.

 

예를 들면 원효(元曉)가 당나라에 유학을 가던 중 해가 저물어 들에서 노숙(露宿)을 하다가 갈증이 나서 자다 깨어 물을 찾던 중 마침 달빛이 비치는 어느 그릇에 고인 물을 발견하여 무심코 그 물을 다 마시고 상쾌한 기분으로 편안히 밤을 지냈는데 이튿날 어젯밤에 마셨던 그 물그릇이 사람의 두개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새삼스레 더러운 생각에 구역질이 나서 구토를 하다가 문득 한 생각 차이로 지나온 날들의 긴 꿈을 깨쳤으니


마음이 나면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 법이 없어지나니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알음알이[識]라


크게 외쳤다 한다.

 



ㅡ 해안선사의 <7일 안에 깨쳐라> ‘반야심경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