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부르면 “예!”하고 즉시 대답할 줄 아는 바로 이것이다

맑은 샘물 2012. 5. 26. 16:30


부르면 “예!”하고 즉시 대답할 줄 아는 바로 이것이다










한 눈에 깨우치는 밝고 밝은 법문

 

 

중생계는 청정한 불보살의 세계와는 달리 밝음과 어둠이 함께 공존한다.

복이 얇은 세계인지라 생존을 위해 어디를 막론하고 지혜와 술수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심지가 맑지 못한 권모술수 같은 교활한 이중성은 윤회를 거듭하며 빛과 소리에 물이든 표면의식에서 주로 조성되는 사념들이다.

 

이런 것은 빛처럼 밝은 나의 본래의식을 어둡게 가리는 흑막과도 같다.

외물에 너무 취하여 본성의 밝음이 사라지면 이런 흑막 같은 기운이 내 의식의 주인으로 자리잡아 부단히 집착과 미혹의 업을 만들어간다.

 

허나 진정한 참나는 붓다의 거룩한 의식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본질은 무한한 광명을 지녔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 녹아있는 어둠의 그림자 즉 수시로 달라지는 감정과 기분, 가풍, 내력, 습성, 지식, 재능, 과거의 상처나 추억 같은 온갖 기억들은 하나같이 내 본래의 맑은 성품과는 크게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래 성품은 언제나 감정 없는 빈 거울처럼 또릿또릿한 감각 그 자체인데 이것은 선과 악을 생각하거나 구분하기 이전이다.

비유하면 한 올의 감정 없이 사물을 무심히 비추는 태양의 빛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윤회로 받는 몸의 생멸도 관계없이 영원한 하나의 생명력으로 이어져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고 솜털만한 증감(增減)도 없이 무량겁을 지속한다고 경전은 말해주고 있다.

 

연기는 사라져도 연기를 피워대는 굴뚝은 그대로 남아있듯이 우리 내면의 생각은 생멸에 바탕을 두고 수시로 무상하게 바람처럼 들락거리지만 생각을 창조하고 지우는 이 마음의 본틀은 영겁의 생명을 지닌 채로 자리를 바꾸지 않고 우주가 사라져도 그 에너지는 변동이 없다고 붓다의 경전은 심도 있게 가르치고 있다.

 

살아서도 꿈을 꾸지만 육신이 없는 혼령도 생전에 지은 업과 자신의 습성을 통해 사념놀이를 계속하며 생생히 꿈을 꾼다고 경전은 또 다른 깊음을 말해준다.

 

영원토록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이 본래의 의식을 참다운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자성(自性), 주인공, 속사람, 관찰자, 원신(元神), 불성(佛性), 성품, 참마음, 맨 의식, 천연의식, 영대(靈臺), 법성(法性), 바탕마음, 본체(本體), 자유의지, 본래면목, 마음의 근본자리 등으로 이름 지어 부른다.

 

우리의 본래 의식은 신통하기 짝이 없는 영겁불변의 천연감각으로 모든 생명체가 나눠질 수 없는 하나의 큰 틀, 큰 바닥으로 같이 연결되어 있다. 법성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법성게의 짧은 구절도 바로 이를 설명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우리의 근본마음은 옷 입고 밥 먹을 줄 아는 살아있는 의식 이 자체다. 말은 의식 하나로 단순히 표현되지만 그 작용과 변화는 실로 무궁하여 그 깊이는 누구도 가볍게 측량할 수 없다.

 

밝게 쓸 때는 태양과 같고 어둡게 쓸 때는 칠흑과도 같다.

작게 쓸 때는 먼지나 좁쌀과 같고 클게 쓸 때는 바다나 허공과도 같다.

 

비었다고 생각하면 형체가 없는 진공이지만 차있다고 생각하면 세상과 우주를 다 품어도 여전히 비어있을 만큼 광활하다.

내 안의 모든 사념을 만들고 부수는 그 당체이다.

의식의 본바탕은 원래 남녀도 없고 노소도 없으며 형질이 텅 비었음으로 모양도 색깔도 없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그런 형체가 아니기에 대소장단처럼 정해진 규모도 있을 턱이 없다.

본성의 자유성은 시대나 지역도 상관이 없으며 무수히 흘러간 과거도 순식간에 비춰내고 아무리 먼 곳도 찰나에 오고 간다.

누구라도 이 안에서는 고금을 하나로 관통하고 거리도 전혀 상관없는 놀라운 대 신통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본래의식은 이처럼 자재성이 넘쳐나 그 동태는 홀연히 오고 가는 바람같기도 하며 몸 안에 작용하여 사지 동작을 취할 때는 일종의 혈류나 기류와도 같고 사념을 퍼내 쓸 때는 고정된 틀이 없음으로 사방으로 확 터진 통로와도 같다.

흔히 정신자체로 인정하는 이런 사념의 틀을 마음의 본체라고도 하는데 이는 거룩한 부처라고해서 그 틀이 더 밝거나 크지도 않고,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해서 그 틀이 더 어둡거나 작지도 않다.

형질에 구애를 받지 않아 몸이 태어난다고 해서 새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육신이 무너질 때조차도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온종일 사대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 당체로써 또렷한 지각작용을 보면 짐짓 영혼이라고 잘못 착각할 수도 있다.

허나 본질은 가을하늘처럼 더없이 청정한지라 업력과 습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중음신이나 영혼과는 그 개념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또 의식의 본질은 경전에 말한 대로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어디에 묶이듯 부분으로 존재함도 아니기에 안도 밖도 없고 따라서 중간도 없다. 인생과 우주의 전체를 한 보자기로 능히 포용하고도 남아 존재계 전체가 알고 보면 바로 내 의식의 몸통이요 내 의식이 토한 하나의 화폭에 다름 아니다.

 

사실 비치고 보이는 그 무엇도 내 의식의 반영물이 아닌 게 없다.

의식의 바탕 본질이 이와 같음으로 변두리에 머물 듯 어디로 가고 오거나 머무는 그런 왜소한 대상이 아니다.

 

생각을 만들어내는 근본 틀,


이 법성의 정체를 더욱 쉽게 말하면 일생토록 한 순간의 감각도 놓치거나 버리지 않는 내 안의 실제적인 참 주인이다.

 

이것이 바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생명의 본질로써 평소에 보고 듣고 말하고 수작하는 에너지가 모두 여기에서 우러나온다.

더 쉽게 말하면 부르면 “예!”하고 즉시 대답할 줄 아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사념이전의 순수 청정한 내 본래의 감각체로서 모든 생명체가 함께 지닌 의식의 기본 틀이며 시작과 종점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바탕의식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이를 허령(虛靈)이라고도 하고 영대(靈臺)라고도 하며 선종에서는 이를 참마음, 맨 의식, 심왕(心王), 참 성품, 불성(佛性), 관찰자(觀察者), 무위진인(無爲眞人), 명상좌(明上座) 등으로도 불러왔다.

 

붓다의 경전에서는 법성(法性), 진성(眞性),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원신(元神), 천군(天君)이라고도 불렀다. 기독교에서는 속사람, 영성(靈性), 신성(神性), 더러는 신앙적인 관념으로 존엄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혼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옛 사람도 말했다. “고요할 때는 성품이고 움직일 때는 마음이다”라고.

잠잠할 때는 성품 그대로의 모습이라 적연(寂然)한 침묵 그 자체지만 일단 에너지를 일으켜 사념이 작용할 때는 크고 작은 모든 지혜와 지식과 감정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양태(樣態)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작용으로 만사만물을 간섭하고 주무른다.

이 자리는 사실 거룩한 자리라고 할 것도 없다. 왜 빈 거울처럼 대상이 없듯 너무 허허롭기 때문이다.(廓然無性)

 

바로 인생과 만유가 여기서 출현 시작됨으로 격을 부여하면 최상의 존재로 인식되는 조물주 또는 유일신과도 같은 하나님 또는 진리의 본질인 붓다의 법신 등으로 존귀한 관념을 만들어 생각할 수도 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우리의 법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없는 신령함 그 자체인데 육체를 아무리 천 갈래 만 갈래로 정교하게 해부해도 그 원핵(元核), 참나로 불리는 이 성품의 정체는 결코 보이지도 않거니와 찾아낼 수도 없다. 이것이 의학이나 과학이 엿볼 수 없는 한계요 그 신령한 비밀이다.

 

우리들 의식의 이 만능적인 감각성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이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누구도 시작을 알 수 없는 옛적으로부터(無始以來) 천연스럽게 구비되어 있어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귀를 막아도 들을 수 있으니 사념의 소리 없는 작용은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한 그 무엇이다.

 

휴정스님의 선가귀감에도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이를 전하겠는가?”라는 서두의 표현도 의식의 신비성을 가리키는 그 말에 다름 아니다.

 

원효스님도 강조한 바가 있다. 지각의 자유성으로 말하면 여기에 뭘 더 보태거나 여기에 무엇을 더 뺄 수 없는 그야말로 전능한 감각 그 자체라고 말이다. 다라니를 통해서 깊은 삼매에 들거나 선정을 잘 닦아서 성품이 크게 맑아지면 여래의 특별한 능력처럼 신변자재(神變自在)한 기적의 육통(六通)도 저절로 발현된다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범부가 평소 제 마음이라고 고집하는 그 일상의 생각이나 마음들은 알고 보면 거울에 때가 낄 대로 낀 이른 바 광겁(曠劫)을 통해 오염된 미혹과 망상의 집합체에 다름 아니다.

위에 이미 밝힌 대로 우리의 본성은 영겁이 하나로 통해있고 육통(六通)을 두루 갖춘 온전함 그 자체라지만 무량겁의 윤회를 통하여 다져진 업의 때는 성품의 자재 성을 완전히 등진 타락한 마음이 굳게 조성되어 시시각각 흔들리는 감정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그 어둠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불완전함 그 자체이다.

 

그래서 붓다와 달리 성품의 밝음이 사라진 이유는 물들대로 물든 탐욕과 감정 위주의 성냄과 배움에 인색한 어리석음의 망습(妄習, 망년된 습성)을 제 살림, 제 마음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해탈을 위해서는 반드시 닦음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런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가볍게 흔들림으로 중요한 약속에는 계약서와 도장이 필요할 만큼 촌각도 그 혼란한 사념을 서로 간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본래 범부들의 생각이란 부허한 생멸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시간만 지나면 이 사념 덩어리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다.

반야심경의 한 토막 설명에도 생명체의 모든 사념작용 또한 허망하기 짝이 없다는 말도 바로 이 뜻이다.(受想行識 亦復如是)

통상 수행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숨이 한번 나갔다가 들어올 그 찰나사이에도 벌써 내면의식은 편히 쉬지 못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색다른 자리를 향해 두리번거린다.

마음속의 변덕성이 이처럼 요통을 치니 눈을 감으나 뜨나 온갖 뜨거운 번뇌가 머리 안을 제멋대로 휘젖는 것은 아주 필연적이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쉴 새 없이 헐떡거리는 떠돌이 의식을 만년부동의 의식처럼 고요하고 안정되게, 매우 평화롭고 또 힘차게 만드는 특별한 훈련방법이 바로 경전에서 말해지는 사마타의 큰 수행법이다.

 

허나 제 아무리 도를 깊이 통하고 최상의 집중과 적멸을 온전히 이뤘다 할 지라도 의식의 본질만큼은 다함없는 활동성 그 자체라서 생각은 여전히 고정되지 않고 부단히 전 방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금 움직이는 사념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깊은 수행 즉 사념의 관조와 같은 마음챙김이라는 위빠사나 수행을 이어서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타와 위빠시나 즉 집중과 관찰이라는 이 양대 수행으로 마음을 닦는 자세가 원만해지면 기본바탕이 호수처럼 맑아져 매우 지혜롭고, 매우 자비롭고, 의식을 허공처럼 비우는 막강한 힘도 생겨서 삶이 보다 안온하고 어떤 내면의 감정도 능히 다스리는 초인적인 능력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거나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가 선인선과(善人善果)요, 악인악과(惡人惡果)라는 경전의 가르침은 바꿀 수 없는 진리 그 자체라서 내생은 차치하고 죽음이 닥치기도 전에 벌써 천상계나 지옥계의 고통스런 조짐은 마음의 복판에서 정확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세속적인 위상이 아무리 크고 높아도 안의 성품이 병들면 한낱 유명한 바보로서 겉만 요란한 졸렬한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경전에서는 생사를 반복하는 상태 즉 윤회를 정리하지 못하는 고통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긴다. 붓다의 모든 수행법은 바로 윤회고의 빠른 청산에 그 중심적인 비중을 맞추고 있다.

 

경전에도 밝고 임종 시에 당당하게 왕생극락의 기적을 보여준 중국의 큰 선지식 철오선사의 말씀에 의하면 “마음을 잘못 써서 한 번 악도에 빠지면 그 고통이 오천겁을 지속한다”고 하였다.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거의 무량겁에 가깝도록 내 혼을 참혹하게 짓이기는 이런 윤전고(輪轉苦, 윤회하며 받는 고통)를 깔끔히 종료하는 붓다의 큰 수행법을 놔두고 또 무슨 수행을 찾아 넋이 빠진 듯 이리저리 헤맨단 말인가?

 

- 담허대사의 <삼계를 벗어나는 최상의 해탈법>(여시아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