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향기

하늘꽃 떨어지고 돌사람이 끄덕여도 마른지혜로는 생사고 못면하니

맑은 샘물 2012. 5. 26. 16:31

하늘꽃 떨어지고 돌사람이 끄덕여도 마른지혜로는 생사고 못면하니












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花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思量也是虛浮浮

(浮雪居士 四浮詩)


입으로 설법하기를 구름 덮듯 비 내리듯

하늘꽃 떨어지고 돌사람이 끄덕여도

마른 지혜로는 생사고를 못 면하니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할사 뜬 일일세.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粥粥飯飯生此竹 是是非非看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浮雪居士 八竹詩)


이런대로 저런대로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생긴대로

옳고 그름은 보여주는대로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의 팔고 사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 같지 않는대로

그렇고 그렇게 세상 가는대로.



悟從平等行無等 覺契無緣度有緣

圓珠握掌丹靑別 明珠當坮胡漢懸

(浮雪居士 逍遙詩)


깨친 이는 평등에서 차별을 쓰고

인연을 떠나 인연을 따른다네,

둥근 구슬이 온갖 빛을 가려내듯

밝은 거울엔 오는 것마다 다 비치네.



處世任眞心廣矣 在家成道體伴然

認得成色無罣碍 不須山谷坐長連

(浮雪居士 自受用偈)


세상에 처해도 진심으로 산다면

집에선들 어찌 공부 못하랴?

보고 듣는 온갖 것이 둘이 아닌 줄 알면

구태여 산에서만 애쓸 것 없네.



共把空寂雙去法 同棲雲鶴一間庵

已知不二歸無二 誰問前三與後三

閑看靜中花艶艶 任聆窓外鳥喃喃

能今直入如來地 何用區區久歷叅

(浮雪居士 悟道頌)


공적의 오묘한 법 함께 잡고서

구름과 학 벗삼아 한 칸 암자에 사노라

둘 아닌 것 알아 둘 없음에 들었는데

전삼과 후삼을 누가 내게 묻는가?

고요한 가운데 고운 꽃 보고

마음 내키면 창밖의 새소리 듣고

능히 지금 바로 여래지에 들 수 있는데

구차하게 오래 닦아 무엇 하겠는가?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分別是非都放下 但看心佛自歸依

(浮雪居士 涅槃頌)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나누고 쪼개는 것 없고

귀로 듣는 소리 없으니 옳고 그름이 끊겼구나,

나누고 쪼개는 것 모두 내려놓으니

마음부처 보며 스스로 귀의하도다.



覺破三生夢 身遊九品蓮

風潛淸智慧 月上冷秋天

輦路盈仙藥 瑤池駕法船

般若三昧熟 極樂去怡然

(登雲 涅槃頌)


삼생의 꿈에서 깨어나고 보니

몸은 구품연화대에 노니네,

바람 잔 지혜의 바다 맑고 맑은데

밝은 달 찬 가을 밤하늘에 두둥실 떴네,

영접하는 길 신선음악 가득하고

옥 연못에 법선을 타고서

반야 삼매가 익을 대로 익으니

극락 가기가 편하고 즐겁네.



 해설

이 게송들은 모두다 부설거사 게송들입니다.

앞에 네 게송은 世上事 人生事가 虛妄함을 노래한 겁니다.

팔죽시는 세상만사를 無爲法으로 사는 달관의 노래입니다.

뒤의 두 게송은 居士의 日常事를 엿볼 수 있는 무위자적한 참 좋은 게송들입니다.

게송에서 보듯이 모양은 비록 居士지만 그 마음은 修行者의 면모 아닙니까?

부설거사는 철저한 수행자였다고 합니다. 처소나 모양이 문제가 아니고 그 마음은 수행의 끈을 놓지 않고 自責精進을 했다는 겁니다. 還俗後 家事는 妙花菩薩에게 맡기고 헛소문을 내었다는 겁니다.

中風으로 四肢가 痲痹되어 꼼짝도 못하는 산송장이 되었다고 하고, 일체 杜門不出 勇猛精進을 하여 蓄妻成佛이라는 古事를 남겼습니다.

이렇게 정진하여 깨친다면 무슨 僧俗이 있겠습니까?

浮雪居士 집이 無門關 아닙니까?

그래서 나온 게송들이 앞에 소개한 게송들입니다.

거사의 게송이라고 우습게보지 마시오.

뼈를 깎는 自內證의 소리입니다. 옛말에 同道方知라 했습니다. 道의 境地가 같아야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梁武帝가 그랬지 않습니까?

達磨大師를 보고도 보지 못했잖습니까? 부처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 겁니다.

나중에 후회를 했지만 흘러간 물이 된 겁니다.

修行의 尺度는 이렇게 偈頌 속에서도 찾아야 합니다. 그게 眼目입니다. 徹底한 自內證의 眼目입니다.

지금도 부설거사의 體臭를 느껴보실려면 이 게송을 深度있게 진지한 마음으로 通察해 보십시오.

千年의 세월이 只今입니다.

부설거사 숨소리가 들립니다.

살아 있는 부설거사 숨소리가 말입니다.


원래 부설거사는 스님이었습니다. 도반 靈照 스님과 靈熙 스님과 함께 具氏 無寃居士 댁을 찾아가게 됩니다.

무원 거사님은 딸이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습니다. 그런데 부설 스님을 보자마자 입이 열려 말을 하게된 겁니다.

말 못하는 딸 묘화가 말을 하게 되니 경사가 났지만 무원 거사는 고민이 생긴 겁니다. 묘화가 부설 스님과 결혼을 하겠다는 겁니다. 만약 결혼이 성사 안되면 차라리 죽겠다는 겁니다.

20년 말 못하던 묘화가 스님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부설 스님에게 사정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설스님은 두 도반스님들에게 환속할 뜻을 밝히고 還俗偈를 줍니다.


道不在緇素 道不在華野

諸佛方便 志在利生이라.

도는 먹물에도 흰 옷에도 있지 않고

도는 화려한데도 조잡한데도 있지 않네

모든 부처님의 방편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있다.


부설 스님의 환속은 한 생명을 살려보겠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그래서 환속 후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登雲이고, 딸은 月明입니다.

부설 거사 오도송과 열반송 다음이 등운의 열반송입니다.

부설 거사 食率을 四佛이라고 합니다. 네 사람이 모두 도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전라도 부안군 중계리에 가면 月明庵이 있습니다. 월명암은 부설 거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新羅 神文王 14년에 창건했으니 千三百年된 古刹입니다.

등운과 월명 남매의 수행과정도 또한 만만치를 않습니다.

부설 거사 내외가 열반에 든 후 남매와 부목 노총각 세 명만 남습니다. 그런데 그 땔나무하는 노총각 부목이 월명이한테 반한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애원을 합니다. 하룻밤만 같이 자자고 졸라댑니다.

그래서 등운 오빠한테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자 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룻밤 동침하게되었습니다.

아침에 등운 오빠가 월명에게 묻습니다.

“어제 밤 기분이 어떠하더냐?”

월명이 말하기를, “허공에 장대 휘젓는 격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부목이 또 자자는 겁니다.

오빠 등운에게 물었더니, 또 “자 주어라”는 겁니다.

또 동침했습니다. 아침에 또 묻습니다.

“어제 밤은 어떠하더냐?”

“어제 밤은 진흙탕 물에 장대 휘젓는 격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목 노총각이 또 졸라댑니다. 하룻밤만 더 자자고.

그래서 등운 오빠에게 물어보니, 원대로 또 “자 줘”라고 합니다.

월명이 또 하룻밤 같이 동침합니다.

등운이 아침에 또 묻습니다.

“어제 밤은 어떠하더냐?”

“어제 밤은 진흙에 장대를 휘젓는 것 같았습니다.”

色慾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허공에 장대가 휘젓는 것 같다 했습니다. 그 다음이 진흙탕물, 세 번째가 진흙입니다. 색욕이 점점 짙어진 겁니다. 그래서 등운이 월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나는 修行精進하는 사람입니다. 修行의 魔가 왔다. 魔는 수행에 도움이 안되고 방해만 된다.”

그러니 그 魔를 除去하기로 男妹는 決心을 합니다. 부목이 월명의 수행에 魔가 된 겁니다. 그래서 등운은 부목에게 “화로 불을 담아달라”고 하고, 아궁이에 쳐넣어 죽게 합니다.

殺生을 하면 無間地獄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간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道를 깨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늘부터 죽을 각오로 공부를 하여 成佛하자 하고 두 남매는 등을 맞대고 수행 정진을 합니다.

부목은 명부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부설거사 딸 월명과 세 번 잔 죄밖에 없습니다.”

염라대왕이 사자에게 명하여 등운과 월명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승사자가 삼천대천세계를 다 찾아보아도 등운과 월명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승사자도 못 잡아갔다는 겁니다.

왜 못 잡아갔을까요?

禪定三昧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三昧에 들어가면 鬼神도 못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운과 월명은 7일만에 成佛을 합니다.

出家成佛은 말했어도 在家成佛은 좀 그렇죠?

그런데 천삼백년 전에 在家成佛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저력입니다. 大乘佛敎의 싹이 보입니다.

身在塵勞 心懸物外입니다.

몸은 세속 진로에 있으나 마음은 物外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居塵不染 在慾行禪 處染常淨한 겁니다.

티끌 세상 속에 있으나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 그것이 법화경의 處染常淨 아닙니까?

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항상 물들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수행방법이 대승불교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을 부설거사 일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 불교의 자산입니다.

부설거사 환속으로 四佛이 나왔으니 남는 장사 아닙니까?

이렇게 佛佛이 나와야 佛敎가 삽니다.


화옹 이계묵 거사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