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노래

국권침탈 100년 우리시대에 던지는 질문 2편 - 문명의 두 얼굴

맑은 샘물 2017. 3. 5. 23:00

국권침탈 100년 우리시대에 던지는 질문 2편 - 문명의 두 얼굴  




최초 공개: 2019. 8. 1.

일본 야마구치현의 한 지하 서고에서 100년 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문서가 발견됐다.
낡고 좀이 슨 궤짝에 씌어진 이름은 미나미 고시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 후비19대대장이었다.
그의 마지막 유품인 이 문서들은 한반도에서 자행된 대학살을 기록하고 있었다.
문서에는 당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간 동학농민전쟁의 위세와 긴박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세도정치와 토호의 횡포를 제거하라는 제폭구민,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보국안민, 약탈적인 서양문명과 일본을 배척하라는 척양척왜를 기치로 모인 동민군 수만 명은 황토현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을 장악했다.
전라도에서 시작한 봉기는 경상도, 충청도, 삼남 전체로 이어졌고, 전국으로 번졌다.
자리보전에 급급한 조선왕조와 엘리트의 묵인하에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군을 진압했다.
한반도의 남단에서 잔인한 학살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은 시신이 산이 되고 피가 바다가 돼 흘렀다고 할 정도로 처참했다. 동학군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작두로 목을 자르고, 살아있는 사람을 화형 시키거나 생매장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전라남도 장흥에서는 열 가구 이상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낸다. 같은 날 목숨을 잃은 동학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동학군이 북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이들을 한반도 서남쪽으로 몰아갔다.
우금티에서의 패전 이후 쫓기던 동학군들은 장흥에 최후의 저항선을 설치했다.
장흥 석대들에서 수천의 동학군이 일본군과 조선 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동학군은 바다 건너 진도까지 쫓겨 갔다.
당시 학살된 농민군은 청일전쟁에서 숨진 중국과 일본군 3만여 명보다 많은 4-5만 명으로 추정된다.


KBS 역사 : 역사 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