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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선생님과의 대화 2>
(2003년 4월 8일. 문학 창작을 통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던 사람과의 인터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일 뿐이에요. 이름일 뿐이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자기가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길밖엔 없습니다. 설명을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첫째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오직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이미 경전이나 스님들의 어록들이 모두 마음에 관한 설명들이지만 다들 다르고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맞는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 따라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 필요한 약으로 쓴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마음이란 것은 말로써 설명해서 개념적으로 잡아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잡아내려면 그 마음을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소위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그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겁니다. 처음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지식으로 관념적으로 알려고 하죠. 그런데 여기서 마음공부란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런 자세를 가지고서는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태도를 바로 잡아 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알고 싶은 욕망,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서 밤잠을 못 자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있을 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게 마음이거든요. 그런 거지, 마음은 이런 거다 저런 거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책을 많이 읽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요, 자기 자신의 자세에 달려 있는 겁니다.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그런 마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요?
- 그렇죠. 그것밖에는 요구되는 게 없습니다. 외면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서 돈, 가족, 명예와 같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살아도, 그런 것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랄까, 내 삶의 가치는 이런 데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내 스스로의 내면에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욕망 같은 것. 그래서 삶에 있어서 돈을 버는 것이라든지, 명예나 가정사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라는 게 별로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고, 뭔가 내면적인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평소에 가진 사람이 이것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지식에 그치고 말지요.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밖에 못하는 거죠.
- 우리의 세속사란 것이 이렇죠. 이번 일만 끝나면 그래도 내가 행복해지고 만족스럽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일에 뛰어들어서 온 정력을 다 바치는데 그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 순간에는 끝낸 기쁨이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냥 그대로예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 말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구나 이러다 보면 금방 말씀하신 대로 ?무엇을 해도 그냥 마찬가지네, 인생 살아가는데 뭐 특별한 게 없구나.? 하면서 그렇게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 포기하지만 불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이에요. 만족스러워서 자기가 그만 둔 것은 아니니까... 불만족스럽지만 어떻게 그것을 만족스럽게 못하니까 포기하는 것이죠. 그런 인생사 모든 문제들의 궁극적 해결이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아무리 명예를 높이 추구해서 정상에 올라가도 거기서 전부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거기서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이 만족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구나.’ 이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 내면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보통 예술, 철학, 문학 이런 쪽으로 대체적으로 관심을 가지거든요. 그것이 내면인 양 착각을 한다구요. 무슨 철학적인 탐구를 해서 대단한 이론을 습득한다든지, 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 심리나 인간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들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인생을 전부 이해한 듯이 착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글을) 쓰고 나면 그것을 안 본단 말이에요. 보기가 싫거든요.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아니지, 할 때는 탐구욕에 빠져서 하지만, 하고 나면 허전하죠. 왜냐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안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서 그만큼 채워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실력이 없어서...
- 예술이나 철학은 그 작품성이나 이론성에 있어서 완결이란 건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는 완결을 기대하지요.
- 뭔가 완성이 있는데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완성에 못 다다른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늘 노력하는 그런 식이죠.
- 그렇죠. ?언젠가는 되겠지...? 하면서... 그런데 왜 그것은 완결이 있을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이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이죠.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아무리 높이 쌓아도 100층을 쌓으면 101층이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식으로 끝이 없어요.
- 만들어 내는 것은 그렇죠. 생각해 보세요. 이치는 간단한 거예요. 인간이 예컨대 뭔가를 30년 간 만들어 왔다면 31년을 만든 사람은 30년 만든 사람보다는 더 많이 만들어 낸다구요. 만약에 인간이 80년, 100년, 200년 산다면 그 만들어 내는 양이나 깊이는 당연히 다르겠죠. 결국은 목숨이 다해서 끝나는 거지 그것을 다 못 만들어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거기엔 완성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천년을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끝이 없는 거죠. 자기 스스로는 나름대로 완결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후에 뒤돌아보면 완결이란 게 있을 수 없죠.
- 그렇게 끊임없이 추구를 할 수밖에 없는 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런 거예요.
- 대부분이 아니고 100% 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저주받은 겁니다. 선악과를 먹은 그때부터 시작됐거든요.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중생의 출발점이죠.
- 그렇죠.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특징이죠.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밖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보지 못해요. 바깥을 본다구요. 모든 육체적 기관이 다 바깥을 보게 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따라서 의식도 항상 바깥을 보게 되어 있어요. 감각을 통해서 습득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꾸 뭔가를 그려낸단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의식의 기본적인 메카니즘이죠.
- 그렇죠. 끝없이... 의식의 메카니즘이 그렇잖아요. 인간이라는 어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우선 육체적인 감각에 바탕해서 생명을 유지해 가고 살아가면서 의식 자체가 그런 쪽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가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하고 하면서 그걸 바탕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하면서 살아가니까, 전부 이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그런 차별되는 대상들을 조합하고 짜 맞춰서 그림을 만들어 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위 세계관이라는 게 전부 그런 거잖아요. 그 속에서 뭔가 좀더 조화롭고, 좀더 바람직하고, 좀더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내는 게 소위 말하는 철학이고, 예술과 같은 인간의 문화적인 활동이거든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인간 사회를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배운 바의 가치관에 따라서 보면 부조리하지요? 그런 부조리한 사실이 뭔지 모르지만 불만족스럽단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만족스런 상태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만족스런 상태로 만들 것이냐? 예컨대 지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듯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불만족스런 대상을 계속해서 내가 조절하고, 통제하고, 변화시킴으로 해서 그것을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냐 이겁니다. 내 방 하나 정도는 아마 내 마음대로 꾸미고 바꾸는 것이 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가족만 해도 그게 안 됩니다. 일단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세계를 바꾸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바깥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내 생각을 바꿔야 될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합니다. 외부적인 어떤 대상들을 내가 조절해서 만족스럽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에 내는 마지막 답이 뭐냐 하면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말하자면 외부적인 환경이 바뀌지 않으니까 내가 그 환경에 적응을 하는 거죠. 그러나 적응을 하려고 하면 나를 포기해야 하고 거기엔 여러 가지 고통이 따라요. 여전히 불만족스러움은 남아 있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도 해결책은 아니에요. 우리 인생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종교에서 내놓고 있는 해결책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외면적으로든 내면적으로든 해결하고자 하는 그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버려야 돼요. 그렇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적응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버리되 뭔가 탈출구가 있을 거라는 그 간절한 희망만은 버리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지만 나는 이것을 해결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가슴앓이를 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 부닥쳐서 그 상황이 어느 정도까지 무르익어 가면 거기서 저절로 해결책이 나와요. 그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간절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해결책은 내 의식 위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예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책은 나와요. 갑자기 나를 짓누르고 있고 내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식으로 한꺼번에 해결되는 겁니다.
그런 해결책을 바라는 간절함 하나만으로 가능한 겁니까?
- 그것밖에 없어요. 방법은.
그럼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그 해결책이 뭔가??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 간절함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여러 모로 찾아다니게 되죠. 간절함은 있지만 가만히 있으면 답답하니까... 이런 선원에도 오게 되고, 책도 보게 되고, 어디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 묻기도 하고...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지는 않잖아요?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 사실은 줄 수가 없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거거든요. 남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 존재에 대한 경험인데, 자기 존재를 자기가 가지고 있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결국 외부적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를 몰라서 그런 거예요.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누가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확인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거죠. 이제까지는 밖으로만 쫓아다녔으니까 이제는 내면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유도해 줄 수 있는 것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역할이죠.
불경 말고도 예컨대 성경 같은 경우에도, 모든 경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 네, 똑같죠. 금방 말씀드린 이런 내용이에요. 결론적으로 전부 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쓰여 있는 말만 본다면, 불교에서 흔히 부처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달은 못 보고 손가락만 본다고 말하듯이, 대체로 거기 쓰여 있는 말만 보고, 손가락만 보고는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책만 보고 기독교가 이런 거구나, 이슬람이 이런 거구나 하면 전부 손가락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달을 보고 싶으시면,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에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자기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오랜 세월, 내 인생을 투자한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조급하게 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면서도 간절함을 가지고 하시되, 믿음을 가져야 돼요.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라고 안 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런 믿음.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 자세로 앞만 보고 한 발 한 발 올라가야 되는 겁니다. 옆에 누가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힘이 빠져 버려요. 앞만 보고 계속 가다보면 길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앞이 확 트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 순간이 와요. 그때까지는 그렇게 가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남이 읽는 글 한 줄만 듣고도 깨쳤다던데요...
- 그 사람은 이미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을 온 겁니다.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기본 자세를 갖춘, 말하자면 준비된 사람은 한번만 찔러줘도 돼죠. 줄탁동시(?琢同時)란 말도 있잖아요? 달걀이란 게 갑자기 부화하지 않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적당한 조건이 되어야 부화하는 거지...
저는 처음에 좀 오해를 한 거예요. 되는 사람은 금방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아닌가...
- (웃음)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예컨대 달걀을 냉장고에 두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부화가 되지 않잖아요? 안 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책이나 뭐 그런 자극을 받을 만한 것을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 볼만한 책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무 책이나 보면 안 됩니다. 좋은 책은 사실 몇 권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보통 책이란 것은 사람의 사념에서 나오잖아요. 사유에 의해서... 그것은 결국 사유로 이끌어 준다고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책 쓴 사람에게 익숙해지거든요? 사념으로 쓴 책은 사념만 연습시켜 주는 거니까 결국 이 자리에 오지 못하고 계속 엉뚱한 길만 가는 겁니다. 사념에서 쓴 책 말고 이 자리에서 쓴 책을 봐야 하는데, 이 자리를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를 경험한 사람이 사념을 끼워 넣지 않고 제대로 이야기한 게 많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은 이 책, 저 책 많이 보지만 그것은 다 사념 연습만 할 뿐이지 실재 자리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럼 평소에 여기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것이 이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 책을 읽고서 지식으로 이해한 것이 (공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 상관이 없어요. 그러면 책을 읽되 지식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뭔가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으면 도움이 되죠.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는 그것이 도움이 되고 지식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제일 적절한 예는 꿈 깨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돼요.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어서 그만 깨고 싶다. 세상 살아가는 게 지금 악몽이다. 불만족스런 꿈이니까 깨고 싶다. 그래서 꿈속에서 꿈을 깨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여 다리를 꼬집기도 하고, 고함을 질러 보기도 하면 꿈에서 깨느냐? 못 깨죠. 그것 자체가 꿈이거든요. 어떤 방법을 써도 깨어나지 않는데, 그 악몽 속에서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된다구요. 눈이 탁 떠지는 거죠.
- (웃음) 100% 확실한 믿음은 오직 스스로 확인해봐야 생기는 겁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여러 경전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람, 어떤 경전도 나를 100% 믿게는 못 하더라, 나는 100% 믿어야 이 공부를 하겠다, 누가 진짜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줘야 나는 공부하겠다... 이렇게 한다면 가능성은 없는 거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 맞아요. 스스로가 마음이 동해서...
모든 만물에 마음이니, 불성이니, 신이니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동물에게도 있다고 그러고... 모든 만물에 그것이 스며있는 건가요?
- 스며있는데, 그게 개개의 사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인해 놓고 보면 그것 아닌 게 없는데 확인하기 전에는 과학적인 탐구처럼 관찰, 실험 이런 식으로 궁구하고 궁리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밖을 봐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나를, 내 안을 봐서...
- 내 안을 본다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게 맞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본다는 것도 벌써 나를 대상화시켜 버렸거든요. 대상을 봐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요컨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앞의 찻잔을 들어 보이며) ?이 컵의 본성이 뭘까? 여기에 도가 있다고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탐구를 하는데, 이 컵의 본성이 뭘까? 여기에 도가 있다고 그러는데...? 하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일,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이 일이 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냥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나고 이 일이 뭔가를 알면 그것으로 되는 거예요. 그거거든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은 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이란 것은 스스로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서 자기의 존재가 확인될 뿐이죠. 따지고 보면 내가 존재하니까 이 컵도 있는 거거든요.
- ?그래 살아있다는 이것만 안 변하고 다른 것은 다 변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있음?이 진짜로 뭐냐?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 살아있다는 게 도대체 뭐냐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을 해봐야죠.
- 그렇죠. 일거에 해결이 되죠. 문제 자체가 본래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보통 지금 내가 살면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어떤데 거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알려 달라 이런 이야기를 해봐도 소용이 없겠네요?
- 그것은 전부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지,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뭔가 계속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면서 상대방에게 이 물결을 좀 잠재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바깥에서 불어오는 외부적인 바람이야 차단해 줄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일으키는 물결은 스스로가... 그런데 스스로가 잠재워야 한다고 하는 것을 잘못하면 그야말로 좌선처럼 고요하게 가만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는데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의식이란 놈은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의식은 물과 같거든요. 물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반드시 거기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유동성이 물의 본성이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외부의 자극 없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흘러가는 물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면서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반드시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고요히 앉아서 마음이 잠잠하게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은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에요. 마치 물을 그릇 안에 담아서 뚜껑을 닫아 놓은 것과 같아요. 물이란 것은 본래 흐르는 게 본성인데...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방안에 처박아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라면 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는 없거든요. 물하고는 달리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망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는 그 자체가 본성이니까 일어나는 것을 붙잡아서 못 일어나게 하겠다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체험하신 분들도 (망상이) 일어나긴 일어날 거 아니에요.
- 다 일어나죠. 사람인데...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특히나 즐거움보다 고통이나 난처한 상황이나 이럴 때...
- 그런데 그 차이는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체험한 사람이나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나 다) 같이 (망상이) 일어나지만 안 일어난 것과 똑같아요. 일어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과 똑같다구요.
괴롭지 않다는 그런 말인가요? 그런 것을 못 느낀다는 말인가요?
- 일어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별로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죠. 물이 마구 흔들리지만 그것이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단 말이죠.
- 그렇죠. 항상...
- 항상 안정이 되어 있고 고요하죠. 마구 말을 하고 있어도 항상 고요하죠.
죽음도 그럴까요? 죽음 앞에서도? 아니면 타인의 죽음이나...
- 그렇죠. 늘 담담하죠. 그 효과는 말로써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죠. 그것은 맛보기 전에는 맛본 이후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맛을 보면 좋으니까 파고들려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좋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셔야지... (웃음)... 지금이 힘드니까...
- 이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던 그런 힘듦은 가벼워지죠. 그런 모든 힘듦이 가벼워져요.
다른 것보다도 사람 앞에서 제일 약해지는 것 같아요. 타인을 항상 의식하면서 타인 중심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 맞아요. 사물보다도 늘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하죠. 사람에게 우리가 많이 흔들리죠. 사람으로 인한 흔들림이란 것은 워낙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금방 그렇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서서히 없어지지만 어쨌든 그것도 가벼워집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훨씬 자유롭게 됩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돼요.
- 자유의 진정한 맛을 모르니까 우리는 좀더 멋지게 매달리려고 하지... (웃음)
맞아요. 그것(창작)도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편이 되겠다 싶어서 했는데, 하는 동안은 잊어버릴 수가 있는데 끝내고 나오면 똑같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 고민이 있으면 일에 몰두하라고 하잖아요. 일에 몰두할 동안에는 잊어버리니까... 그런 것은 잊어버리는 거지 해결된 것은 아니에요. 그게 바로 대증요법이거든요. 어린아이들 주사 맞을 때 주사가 아프니까 엉덩이를 때리잖아요? 다른 데 신경을 쓰게 하면 주사의 아픔을 모르니까... 대개가 다 그런 식이라구요. 그런 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죠.
(한숨을 쉬며) 그러면 하나밖에 없네요. 답답한 마음...
- 그래서 자기 스스로가 그 갑갑한 마음, 간절한 마음을 안고 설법도 듣고, 평소에도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지나다 보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변해갑니다. 마치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서서히 변해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탁 하고... 병아리가 되는 것은 일순간인데 그전에 오랫동안 서서히 변해 온 겁니다.
- 하여튼 공부란 것은 밖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도 자기는 항상 그게 고민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생활 원만하게 하면서, 겉으로는 별로 안 드러내면서 자기는 이것이 고민거리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안 그러면 공부한다는 핑계로 사회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신경을 써야 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까 잊어버려요. 그런 의문을 좀 잡고 있으려고 해도 순식간에 휩쓸려서 잊어버리게 돼요.
- 잡고 있다기보다도 스스로 고민이 되면 잊혀지지가 않죠.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해요. 의식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은 공부라고 하기엔...
선생님께서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 한 가지만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그런 것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나 보죠?
- 그렇죠. 이야기를 들어서 말귀를 알아듣는 게 아니죠. 일종의 눈치를 주는 거죠. 그러면 자기 스스로가 조금씩 변화가 되는 거죠. 말귀를 알아듣는 거야 몇 번 들으면 알 수 있죠. 사람이 변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잘 안 변해요. 말은 금방 이해하는데 그 사람 자신은 말 따라 그렇게 변하지 않거든요.
- 그렇게 해서 편해지는 그것 자체가 사실은 의식의 장난인데...
그렇죠. 그것도 의식으로 의식을 제압하는 건데... 그래도 편해지더라구요.
- 그렇죠. 그렇게만 하더라도 조금은 편해지죠. 하지만 그것 같고는 안 되는 거죠. 대개 마음공부라고 하면 그 정도 수준에서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고 말거든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뭔가 좋은 점이 있을 거라고 바라서 이 공부를 해도 안 되겠군요?
- 뭘 기대를 해서도 안 되고, 자기가 그냥 여기에 아무 조건 없이 목말라 해야 되는 겁니다.
처음엔 내가 나를 괴롭히고, 사람 만나면 힘들고, 이런 것을 좀 해소하는 방법이 뭔가를 묻고 싶었는데 부끄러워서 못 물어 보겠네요. 그게 아닐 거라는 것도 알았는데...
- 대증요법은 아닙니다. 그런 대증요법이야 일반적인 상담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대답해 주는 거죠.
-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목말라 해야되지 어떤 조건을 달고 하면 반드시 그쪽으로, 잘못된 방향 쪽으로 가게 됩니다.
진리가 뭔가 이것 하나... 진짜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까?
- (웃음) 이것 하나만 알면 다 해결됩니다. 내 존재는 단일한 것이지 복합적인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복잡한 것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단순한 것은 의심스럽거든요?
- (웃음) 그게 우리의 병이죠. 도덕경에도 보면 공부는 손지우손(損之又損), 자꾸자꾸 덜어내서 텅 비워버리는 거다, 아무것도 없는 거다, 가장 단순하게 되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본래 단순한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는 관심을 가지고 자꾸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깊이 빠져 들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고, 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게 되면 결국엔 그 의도 쪽으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는 공부는 안 되는 거고,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이것이 내 인생의 숙제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밖에는 달리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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