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향기

김태완 선생님과의 대화 1

맑은 샘물 2010. 12. 11. 19:43

 

 

<김태완 선생님과의 대화 1>
(2003년 3월 3일. 초발심한 사람과의 대화)

 


 

질문 1.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나,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사람이나 마음가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가짐은 결국 공부에 대해서 얼마나 갈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목이 말라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비유를 들면, 젖먹이 어린애가 엄마한테 젖 달라고 우는 것 같은 그런 심정, 어린애가 생각으로 헤아리고 계산해서 젖 달라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저 배가 고파서 우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이 공부도 내가 머리로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런 의도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배고픈 어린애와 같은 그런 절실함이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 공부가 이렇게 저렇게 좋으니까, 그런 이유가 있고 그래서 그런 이유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계산적인 발심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어린애가 배고프듯이,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공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그런 식으로, 진실로 배가 고프면 멀지 않아서 반드시 응답이,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진실한 자리가, 공부의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거죠. 무슨 이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상식적인 원리죠. 그런 원리지, 무슨 이치가 있어서 그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공부라는 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대단히 중요한 것 정도가 아니라 공부의 전부입니다. 마음가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공부가 아주 짧은 시일에, 어떤 사람은 6일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3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다는 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으면 수십 년을 해도 항상 수박 겉핥기예요. 공부가 안 된다 이겁니다. 늘 그냥 그 상태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뭔가 방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온갖 여러 가지 방법이나 사람을 찾아서,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머리에서 나오는 계산이기 때문에 안 맞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젖먹이 어린애가, 아직까지 머리로 계산할 줄 모르는, 그저 배가 고프니까 젖 달라고 우는 그런 순수함! 계산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그런 배고픔,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공부는 되는 겁니다. 본래면목의 응답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본래면목이란 것은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왜 드러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들의 계산, 의식적인 헤아림 때문에 안 드러나는 것입니다. 첫 질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느냐고 하셨는데 정말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공부의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소용이 없어요. 방법이란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별 상관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좋고, 절을 해도 좋고, 화두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어요. 제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어떤 방법도 취하지 않는 게... 왜냐하면 그런 방법이란 것에 잘못 매여 들어가면 그런 방법이 주는 어떤 일시적이고 조작적인 효과에 매여가지고 그것들이 공부인 양 착각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방법은 없는 게 좋습니다. 다만 진실로 목이 마르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둘러간다거나 어떤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바로 즉각 그 자리에 바로 드러나는 게 이거거든요. 그 어떤 무슨 깨져야 될 껍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려야 할 번뇌나 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의 진실한 존재,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즉각 드러나는 것이지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갈고 닦아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필요한 것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헤아림이 아니라, 진실하고 꾸밈없는 정말 절실해서 피할 수 없는 그런 발심입니다. 그런 목마름, 배고픔, 그것이 이 자리를 문득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죠. 공부를 10년 동안 해온 사람이나 하루를 한 사람이나 이 자리를 모르면 조건은 똑같은 겁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알거나 모르거나 이지, 십년을 해온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십년을 해왔든 하루를 공부했든, 진실한 목마름, 진실한 배고픔, 이것 하나만 갖추어지면 멀지 않아서 그 자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해요. ?나는 정말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을 많이 쳤다. 그래서 나는 발심이 되어 있다. 정말 나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안 되느냐? 내가 뭔가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냐??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그분은 아직 방법을, 요령을 찾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배고픔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 배가 고픈 사람은 요령을 찾을 겨를이 없어요. 정말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지거든요. 쟝발쟝이 눈앞의 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진열장을 깨고 빵을 훔쳐 먹을 만큼 그런 배고픔! 그 상황에서 ?내가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쳐 먹으면 처벌받을 텐데...?라는 그런 계산이 나온다면 아직까지는 배가 덜 고프다는 거죠. 진정 배가 고프다면 요령을 계산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냥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일 뿐이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면서... 헤아리고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배가 덜 고픈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는 ?나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따져 보고 헤아려 보고 있다면 진정 배가 고픈 게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만큼 절실해야 되는 겁니다.

 

 

 

질문 2.

 

제가 항상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는데 젊은 시절을 다 보냈습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교수님을 다행히 만났습니다. 너무 늦다는 생각에 초초하기도 하고, 또 절에 가서 스님들처럼 평생 공부해도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제부터 공부를 하더라도 제가 원하는 만큼 공부의 어떤 성취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가능한 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하려고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면서도 아직 이 자리를 만나지 못해서 초초하다 하시니 이제 상당히 배가 고플 만큼 고픈 겁니다. 아직도 그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고, 목마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시니까 보기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초초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우리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공부가 될까?? 하는 그런 걱정도 이해는 됩니다만, ?내가 원하는 만큼 공부가 될까? 안될까??라는 계산을 하고 계시는 걸 봐서는 한편으로 아직 충분히 배고프지 않다는 그런 느낌도 들거든요. 어쨌든 또 이런 말도 있잖아요? 죽기 직전이라도 이 공부에 눈을 뜨고, 이 맛을 보면, 죽음이 다르다고 하듯이, 나이에 상관없이 이 맛을 보고자 하는 그런 간절함만 있으면 그걸로 맛을 보는 것이고, 그리고 맛을 보고나서 얼마만큼 더 공부에 깊이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그 뒤의 문제죠. 우선 이 공부의 맛을 보는 게 첫째 일이니까, 연세가 그만큼 드셨다니 더 초초하고, 더 절박하고,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말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듯이, 도구가 좋은 게 없더라도 맨손으로라도 진흙물을 파야 될 그런 절박함을 느끼신다면, 이제까지 공부가 하고 싶어서 계속 찾아 다니셨다고 하니까, 간절한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리시면 오래지 않아서 공부의 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공부의 맛을 본 뒤의 공부는 그때 가서 상황에 따라서 하시면 되는 것이고, 우선은 죽기 전에 꼭 이 공부의 맛을 봐야 되겠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다른 계산이나 헤아림 없이 그냥 한결같이 이 공부에 대한 목마름 하나에만 의지를 해서 공부를 하시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질문 3.

 

제가 이런저런 책도 읽고 법문도 듣고 해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걸 생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건 보이지도 않고 그렇기에 제 가슴에 실질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 지, 가장 기초적인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 마음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밥을 먹을 때를 생각해 보시면 돼요. 밥을 먹으면서 순수하게 항상 밥의 맛에만 취해있으면 그 밥맛을 아주 미세한 맛까지 다 느낄 수가 있는데, 밥을 먹으면서 밥 먹는 것이 아닌 다른 곳에 생각이 가 있고 관심이 가 있으면 밥맛을 모르는 겁니다. 밥을 안 먹고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을 내가 맛보고 있지 않는 게 아니고, 맛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맛을 보고 있지 못 하니까 맛을 봐야 된다는 게 아니고, 맛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실제로 자기가 자각을 하는 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마음공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밥을 안 먹고 있으니까 밥을 먹기 위해서 밥을 지어서 입에 넣고 하는 그런 행동이나 해야 될 일이 있는 게 공부는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다른 데 관심이 있고,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그걸 망상이라고 합니다만, 그 망상을 끌어다 지금 눈앞의 밥 먹고 있는 여기에 가져오면 되는 것이에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거기에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는, 관심을 둔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늘 항상 지금 이 순간에 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 그러면서도 그것은 경계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경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왔다 갔다 하며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마음이라고 하는 놈은 무상하게 변하는 경계 그 가운데에서 항상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경계를 맛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경계를 맛보고 있는 걸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경계, 저 경계, 눈앞에 나타나고, 머리 속에 나타나고, 우리 감각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경계들을 항상 순간순간 맛보면서 지나간다고 알고서 계속 그런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밥을 먹고 있으면서 다른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런 경계가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에도 한결같이 변함없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늘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 이게 말하자면 우리가 항상 맛을 보고 있는 마음이거든요. 늘 눈앞에 또렷하고, 생생하고, 부정할 수 없고, 분명한 이것!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 아닌 이것!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는 게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영화 화면이 지금 왔다 갔다 하면서 변하고 있는데, 영화 화면은 오색찬란한 빛으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거기에는 빛이 있거든요. 밝음이 있다 이거예요. 그 밝음이란 게 뭐냐 하면 화면은 다양하게 바뀌고 있지만 이리저리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런 말 가운데 의식적으로 ?그래, 이거야!? 하고 거기에 멈춘다면 아직까지는 그 문 앞까지 와 있는 겁니다. 안으로 쏙 들어온 것은 아니거든요. 그 자리에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모양을 따라가지 않고, 경계를 따라가지 않고, 지금 눈앞에서 화면이 바뀌고 있는 와중에 변함없이 그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 놈이 몰록 탁! 하고 잡히면 거기가 하나의 관문이에요. 탁! 하고 넘어가면 이런 말 저런 말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요.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없어! 없으면서 단지 뚜렷하고 분명하게 밝을 뿐입니다. 변함없는 게 있어요. 그런 경험이 필요한 거죠. 마음을 맛본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항상 마음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 맛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의 맛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맛은 마음으로 인해서, 이 마음을 가지고 다른 허깨비를 쫓아다니며 맛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알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경험해 놓고 보면 자기가 결국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그것이지만 경험하기 이전에는 이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생각으로 ?이런 경험일 것이다.?라는 어떤 상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맛을 보아야 해결되기 때문에 오로지 맛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가짐 하나를 가지고, 지금 항상 눈앞에서 또렷하게 맛보고 있다는데, 영화 화면같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이 가운데에서 자기의 존재, 나라는 존재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것을 한번 잘 살펴보시면 그런 와중에 몰록 계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합되는 것이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확 올 수도 있고, 아주 미미하게,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게 쓱 지나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자기 존재를 확인해내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을 맛본다는 이야기를 붙이는 겁니다. 사실은 마음을 맛보고 나면 그런 이야기 자체가 생각이 안 납니다. 마음을 맛본 사람이 ?내가 마음을 맛보았다.?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밥을 먹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밥을 먹는데 밥맛이 정말 좋을 때는 ?이 밥이 맛이 있구나!? 이런 생각도 안 일어나죠. 허겁지겁 먹기 바쁘죠. 그것과 같은 거죠. 마음을 정말 맛보면 마음의 맛에 푹 빠져 들어가서 이런 저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거지 ?아, 지금 내가 이렇게 마음을 맛보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질문 4.

 

공부를 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혀서 눈물만 날 때도 있는데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어찌 보면 그건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된다.?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분노죠. ?나는 왜 해도 해도 안 되는가??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자기의 힘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 절망스럽기도 하고,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이 공부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래서 아마 눈물이 날 수도 있겠죠. 잘못해서 그런 분노나 억울함에 끄달려 가면 병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공부는 사실 그렇게 힘든 게 아닙니다. 늘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지 너무 부담을 가지고 하면 할 일도 못합니다. 평소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지만, 똑같은 일을 하는데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면 제대로 못해요. 자기 자신이 지쳐버립니다. ?이것은 천 명, 만 명, 백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위대한 일이다.? 하는 부담스런 생각을 가지지 말고, ?이건 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쉬운 일이다.?라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그러나 진실하고 절실하게, 가볍고 부담 없지만 얼마든지 진실하고 절실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자세로, 즐겁게 해야 됩니다. 부담을 가지고 하니까 그렇게 억울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힘이 드는 겁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나온다는 건 힘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힘들게 하시니까 오히려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못해내고 있는 겁니다. 힘들게 하지 마시고 즐겁게 반드시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시는게 좋아요

 

 

 

 

질문 5.

 

교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셨는지 좀 저희들이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저의 그때 상황이 박사과정에서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선(禪)을 주제로 하여 박사논문을 써야 한다는 그런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은 책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스승님을 그 당시에 어떤 계기로 만나서 그 회상에서 공부를 했죠. 아마 제 기억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 분에게 갔었던 것 같아요. 가면 <원오심요>니, <서장>이니, <임제록>이니 <육조단경>이니 하는 그런 어록을 내놓고 설법(說法)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 당시 스승님은 부산대학교 앞에서 하숙집을 하고 계셨어요.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셨는데, 처음에 그 분의 회상에 나가서 그 분을 만나보니까 그냥 할아버지인데도 뭐라 할까, 불신감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그 당시에는 그 분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판단 같은 것을 내릴 입장은 아니었고, 그냥 제가 선에 대하여 목이 마른 상황이었어요. 선에 대해서 저는 아무것도 공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절이나 선방이나 이런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스님들을 만나본 적도 없었고, 아니 솔직히 대학원에서 선을 전공으로 삼기 전까지는 선에 대하여 읽은 책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학의 철학과에서 동서양의 철학을 대강 훑어 보았지만 모두가 잘 짜여진 이론의 체계이고, 현재 내가 목말라 하는 그 무엇에 대한 해답을 주진 않더군요. 그래서 불교가 나의 목마름에 대한 해답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학원에서는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불교의 역사 그리고 초기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의 교리를 공부하며 석사과정을 보내면서, 결국 선이 내 목마름을 실제로 적셔줄 살아 있는 불교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뒤 여러 가지 선에 대한 안내서나 선어록 등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달하거나 해석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선 그 자체를 알고 싶은 의문과 목마름은 더욱 커져 가기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스승님을 만난 것입니다. 학문이 아닌 선을 직접 가르치고 계신 분을 처음 만난 거지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그냥 선에 대해서 목이 말라있는 그런 상황이었지, 이 분이 어떤 사람이고, 그래서 보기에 어떻게 보이니까 공부를 하면 되겠다 안 되겠다, 그런 판단 자체를 아예 안 했어요. 안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 자체가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그냥 설법을 한번 들어보니까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고, 모르니까 졸리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나 전 달리 어디를 가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어쨌든 스승에 대한, 처음엔 스승이란 그런 생각조차도 없이 그저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였는데, 그 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저도 모르게 생겼던 것 같아요. 처음 대하는 순간에 '아, 이 분에게 무언가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을 저도 모르게 받았는지도 몰라요. 하여튼 내가 선을 실제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원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회가 아주 쉽게 학교 바로 앞에서 왔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절에 나가는 것을 좀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스님이라는 존재와 예법 같은 것에 대해서 부담이 있더라고요. 그러나 이 분은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시니까 아무 부담이 없었죠. 그래서 그냥 부담 없이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질문을 해본 적도 없었고, 그 분도 저한테 말을 건네서 이러쿵저러쿵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뒷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아 듣고 있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공부를 해보자는 심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시간이 한 몇 개월 지나니까 참 가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왜냐하면 그 법회라는 분위기가 익숙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리고 법문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영 모르는 이야기였고... 그렇지만 마음속에 어떤 신뢰는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분명히 무언가 있긴 있다. 뭔지 모르지만 여기서 내가 이것을 다 캐내어 보고, 그러면 내 나름대로 판단이 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또 공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여기에서 캐내 볼만큼 캐내 보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스승에 대한 신뢰감이랄까? 어쨌든 그 분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분명히 이 분이 뭔가를 알고 계시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 분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싶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특별히 마땅하게 다른 데 갈 곳도 없고 해서 계속 거기를 다녔죠. 하나 기억나는 것은,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과 가끔씩 공부가 끝난 뒤에 학교 앞의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길,?여기에서 끝을 내어 보아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라고 격려를 하시더군요. 이 격려에도 상당히 힘을 입었던 것 같아요. 일반 사회생활에서 만난 그런 인간관계가 아니라 도반이라고 하는 그런 인간관계는 또 다른 어떤 정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참 편하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공부를 모르니까 공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입을 다물고 항상 듣는 입장이었죠. 그냥 앉아서 무조건 듣기만 했어요. 모르니까 질문도 못 하겠더라고요. 무조건 아무 질문도 없이, 좋다 나쁘다는 그런 판단도 없이, 그냥 듣기만 했어요. 저는 그런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뭐냐 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완전히 내 손아귀에 쥐고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곰처럼 묵묵히 매달리는 그런 특성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자세로 매달렸던 거죠. 그러다 몇달이 지나니까 같이 공부하러 갔던 후배 대학원생이 공부가 좀 됐다고 하면서 스승님하고 대화도 하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상하고,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 후배를 격려도 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라는 오기랄까, 자신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기대도 있었고... 그러면서 또 일년 정도가 흘렀던 것 같아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가면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겁니다. 가끔씩 졸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어떤 변화가 오느냐 하면, 처음 몇 개월 동안에는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어 몸이 뒤틀려서 삼십분도 못 앉아 있고, 밖에 나가고 싶고 그러던 것이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거예요. 말하자면 훈습이 되어서 그 분위기가 익숙해지고 좋아지고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즐겁게 법회에 참석하게 되더라고요. 거기에 앉아 있으면 편하고, 앉아 있을 동안에는 뭔가 조금씩 세속적인 번뇌 망상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간 편안하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법회가 없어도 시간만 나면 스승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심심하면 갔죠. 일주일에 몇 번씩 가서 법회도 듣고 도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서, 회상에서 스승님과 접촉을 자주 가졌죠. 그래도 여전히 공부는 막막하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화두(話頭)드는 것을 한 번 시도해 보았는데, 저는 화두를 정말 하루도 못 들겠더라고요. 하루가 뭐야, 한 시간도 채 못하고 짜증이 났어요. ?이게 무슨 공부가 되겠나?? 하는 의문이 나오고... 지금 이렇게 목이 마른데 애써 화두를 든다는 것이 당장 나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지금의 이 목마름을 가시게 해 줄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행(修行)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그것이 해답을 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몇년간 목마름에 발버둥치며 도달한 결론은,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안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끈질긴 의식이라는 감옥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의식뿐이었거든요. 결국 모든 손을 놓아 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목마름에만 맡겨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은 마른데 손 쓸 방법은 없고, 그러니까 오로지 설법의 회상에 그저 의존한 것입니다. ?하다 보면 어찌 되겠지...? 하는 기대만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는 그것만 믿고서 그냥 그렇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차차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확실하게 잡히지 않으니까 자신감도 없고, 막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잡힐 듯 말 듯 할 때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믿었어요. ?하면 되겠지... 죽기 전에는 되겠지...? 하면서(웃음)... 그러면서 학교공부는 조금 밀쳐 놓고, 책보는 것도 당분간 접어 두고, 책이 보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냥 법회에 참석하고 그 분위기에 젖어서, 오로지 이 공부에만 매달려 있었어요. 그 기간이 몇 개월인가 꽤 된 것 같은데, 그때 제가 더욱 분명히 느낀 게 뭐냐 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공부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구나! 어쨌든 내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은 절대로 안 되는 거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 힘으로 한다는 것은 포기해 버렸고, 그냥 ?되겠지...?라는 희망만 가지고 법회에 열심히 참석을 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벌써 머리라는 놈이 팽 돌아가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싹 가 버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볼까, 저런 식으로 공부를 해볼까?? 하는 식의 공부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어요. 공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 머리라는 놈은 그 순간부터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공부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그냥 법회만 무조건 참석을 한 거예요. 스승님에게만 의존하면서 법회에만 참석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포기를 하고, 그냥 법회에 의지를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쭉 지내고 있었는데, 대개 도반 분들은 각자 녹음기를 가지고 계셨고 저도 처음에는 녹음을 좀 했었죠. 그런데 저는 녹음해서 듣는 것들이 좀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 왜냐하면 눈앞에 스승님이 직접 계시지 않으니까 생동감이랄까? 그런 게 부족한 것 같았어요. 하여튼 그런 걸 보면 저는 참 게으른 편이에요. 공부를 할 만한 그런 자질이 부족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녹음기를 사 놓고 녹음도 몇 번 안 하고 치워버리고는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겁니다. 다른 분들은 매일 녹음을 해서 듣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저는 그런 것도 저런 것도 안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어요. 법회에 참석하는 동안에는 거기에 푹 빠져 있고 집에 돌아와서는 마음속에는 항상 그 갈망이 상처처럼, 하나의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테이프를 듣는 것이 저에게는 머리로 이해하게 되고, 말을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말을 이해하는 건 나에게 공부가 아니었어요. 그냥 그 법회 분위기에 푹 젖어서 그 분위기 속에서 의식이 아닌 그 자리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원했던 거지, 제가 머리로 말을 이해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거든요. 말이라는 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너무도 많이 익혀왔고, 저는 그러한 말의 구속이 싫었고, 공부는 말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법회 자리에서도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의 내용은 항상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몇 번 들으면 똑같은 말이기에 더 들을 것도 사실 없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말을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말 아닌 이것에 빠져 들어가고 거기에 내 가슴이 열리기를 원했던 것이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하게 가슴이 열리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말엔 관심이 없었어요. 사실 저도 지금 여기서 설법(說法)을 하고 있지만, 말하는 내용 자체는 항상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내용인데 이해를 못하니까 계속 가슴만 답답했었죠. 말하자면 같은 송곳으로 계속 가슴을 찌르고 있었지만 가슴에 구멍이 나지 않았던 거예요. 송곳은 동일하니까 ?이런 송곳으로 나를 찌르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가슴이 열리기만을 바라고 앉아 있었는데, 어느 여름 날인가 스승님께서 법문을 시작하신지 몇분 지나지 않아 말씀하시길, ?선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선이다!? 하시며,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톡톡 치시는 거예요. 그 순간 꽉 막혀 있던 게 마치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눈앞에서 싹 스쳐지나 가는 그런 식이었어요. 싹 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어, 그래 이거!? 하고 탁 통하더라고요. ?아, 결국 이 분이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이 전부 이것이구나!? 마치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이 분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 있었지만 그 녹음이 여태까지 한 마디도 풀려서 들리지 않았는데, 그 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니까 그 녹음 되어있던 것들이 싹- 하고 다 풀려서 들리는 식으로 소화가 다 되어서 내려가 버리는 거예요. 마치 엉클어져 있던 녹음테이프가 풀리면서 빠져나가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순간적이니까, 그 당시에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도 안 했습니다. 어쨌든 그 후부터는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은 알아듣겠는데 그래도 여전히 의심 하나 없이 확고부동하고, 가슴이 딱 안정이 되고, 아무 문제가 없이 되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니에요. 여전히 모든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불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러면서도 그 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나니까 점차점차 조금씩 조금씩 자꾸자꾸 시원해지더라고요. 그 후 어느 날인가 혼자 집에서 책을 보다가, 그 구절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온 세계는 전부 신의 은총이다.?라는 구절을 보는데 이번에는 온몸에서 열기 같은 게,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온몸에 전율이 스쳐 지나가는 그런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아! 아! 그래.? 하면서 정말 온 세계가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식의 경험들이 몇 번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가슴 속에서 ?아, 이놈이구나! 내가 그토록 갈구하고 갈망했던 게 바로 이놈이구나!?라고 하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하게 확인되더군요. ?이놈이구나! 이런 게 있구나!? 그런데 그것이 확인될 때의 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밑바닥이 없는 텅 빈 허공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아주 강렬하여 모든 힘을 그 속에 다 가지고 있는 무엇 같기도 하였습니다. 뭔가 뚜렷이 잡히는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다 해체되어서 아무런 갈등이나 분별이 없는 심연(深淵)같았어요. 나중에 제가 원자로(原子爐) 같다는 비유도 들곤 했는데, 좌우간 뭔가가 있어요. 거기에 의지해 있으면 잡생각이 안 일어나고 안심이 되고 안정이 되는 반면, 생각을 따라가면 항상 불안한 거예요. 불안하고, 흔들리고, 떨리고 그렇더라고요. 그러나 불덩이와 같은 거기에만 의존하면 안정이 되고, 안심이 되고, 마치 엄마 품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포근함과 안정감이 있어요. 거기에 의지하고 있으면 여러 욕망이나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하여튼 그런 게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뭔지 뚜렷하지는 않고, 막연하게 그놈이 항상 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확인의 느낌 속에서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나와 확실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죠. 아직까지는 목이 마르고, 그립고, 미흡한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그놈과 하나가 되어 있으려고 하는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 시간이 몇 년이 지난 것 같아요. 그놈에 대한 느낌이 어떨 땐 강하게 왔다가 어떨 땐 희미하게 되었다가, 주기적으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떨 땐 아주 강하게 내가 정말 흔들림 없는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어떨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화두를 모아 놓은 <무문관>을 쭉 봤는데, ?이것뿐!?에서 거의 다 소화가 되더라고요. 다만, ?덕산탁발화(암두밀계)? 하고 ?오매일여?, 이 두 가지 화두는 아직 완전히 소화가 안 되었죠. 그 후 시간이 쭉 지나면서 이런 책도 보고 저런 책도 보고 하였어요. 암두밀계는 소위 말후구(末後句) 화두인데, 말후구란 것은 말이 끝난 뒤에 남아 있는 한 마디 말입니다. 한편 최초구(最初句)란 것은 아직 입을 열기 전에 있는 한 마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문수경>이란 책을 보는데, ?최초구나 말후구나 같은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더군요. 그것을 보는 순간에 말후구가 확 소화가 되더라고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가지고 내가 속았구나!? 그렇게 넘어갔고, 그 다음에 ?오매일여?는 참 못 넘어가고 있었는데, 인도인인 마하라지의 <아이 앰 댓>이란 책을 보다가 ?나의 존재?를 언급하는 어떤 구절에서 소화가 되더군요. 말후구와 오매일여가 소화되는데 한 일 년 걸린 것 같아요. 역시 우리는 화두 전통이기 때문에 화두가 소화되지 않으니까 공부에 자신이 없었는데, ?오매일여?란 화두가 소화되고 나니까 흔들림이 없어졌어요. 더 이상 화두니 소위 지금까지 나온 공부에 관한 책들을 보았을 때 이제 의심이 없는 거예요. 다 소화가 되는 것이죠. 그러자 이제 박사논문의 가닥이 잡히더군요. 그리하여 달마에서 임제까지의 선사상과 공부를 연구하여 <중국 조사선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논문은 뒤에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장경각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또 어떤 점이 남았느냐 하면, 삼매에 빠지는 버릇이 생겨 있더군요. 삼매가 뭐냐 하면 잠시 혼자 있는 시간들, 쉬는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 어떤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게 있어요. 그걸 우리가 공(空)이라고 그러는 거 같은데,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푹 빠져드는 겁니다. 그렇게 깊이를 모를 허공과 같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 아무 생각도 없고 욕망도 없고 한없이 편안한 거예요. 아무리 피곤할 때도 앉아서 십분만 그렇게 빠져들고 나면 마치 오랫동안 수면을 취한 것 같은 상쾌함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재미에 또 꽤 오랫동안 빠져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삼매에 빠진다는 것은, 빠져 들어갈 때가 있고 빠져 나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그것 역시 기복(起伏)이 있는 거죠. 공부에 아직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자기가 비록 맛을 보고 그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말하자면 법의 맛에 취해 있는 것다고나 할까. 그 후에 불교신문에 <서장>과 <임제록>을 강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찾아오시는 분들과 더불어 공부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깨어나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 남과 더불어 공부를 공유한다는 이것이 저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지도를 하다 보니 제 공부의 부족한 점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계속 보완이 되어 나갔지요. 저로 말미암아 새로 깨어나는 경험을 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도리어 배우기도 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는 분들은 하나 둘씩 깨어나는 경험을 하시고, 저와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저는 더욱 그 자리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스승님의 법회(法會)에 참석하여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법회를 들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모든 의식이 천천히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마치 욕조 바닥의 마개를 빼면 물이 물빠지는 구멍으로 모여 들어 쏙 하고 빠져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깨끗해져 버리듯이, 한 점으로 모인 의식이 쏙 사라져 버리고 전체 허공이 한 점 그대로가 되어 버리더군요. 나타나는 모든 것이 다만 이것일 뿐, 다른 것은 그 가능성 조차도 사라져서 없어요.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나 가벼워 졌습니다.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겠어요. 전혀 힘이 들지 않아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평범할 뿐이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되질 않아요. 어긋나고 싶어도 어긋나지지가 않는단 말이예요. 너무 편안했습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럴 뿐입니다. 지금의 제 상황이란 이래요. 예전에 삼매에 빠져들곤 할 때에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고, 어떤 경계가 다가오고 하면 삼매 쪽으로 피했거든요. 여기서 경계란...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대상들은 별 문제가 아니었어요. 어떤 경계가 제일 심한 거냐 하면 감정적인 문제, 사람이죠. 사람이 제일 안 떨어져 나가는 경계더라고요. 사물은 문제가 안 돼요. 사람은 감정적으로 서로 공감을 하고 교류를 하기 때문에, 상대가 공부가 된 사람이면 상관이 없어요. 공부가 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통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는데, 공부가 안 된 사람을 대할 땐 그 사람하고 나하고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으면 괜찮은데,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정이 있고 이렇게 되면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는 잘 안 되더라고요. 그 관계란 부모, 형제, 친구, 제자 그런 인간관계들이죠. 공부가 된 사람들 사이에선 부담이 없는데,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라든지 동료, 제자 등, 정을 주고, 마음을 열어 놓고 교류한 사람들을 대할 때는 평소 고정적인 관념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옛날의 세속적인 정으로 쉽사리 이끌려 가버리는 거예요. 그 경계가 정말 안 떨어져요.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빨리 혼자 있으려고 하고, 혼자 있으면 삼매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것을 극복하곤 했었어요. 계속해서 나는 이 자리에 있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죠. 그 당시에 그런 상황들은 제가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죠.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떠냐 하면, 그러한 삼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언제나 다른 것이 없어요. 공부를 한다는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평소의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것이 없고, 이것뿐이라는 생각 조차도 없어요. 마치 어떤 느낌이냐 하면, 흰 백지 위에 조그마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연필을 쥐고 위에서 그 점 하나를 정확하게 찍으려면 처음에는 그것이 잘 안 되거든요? 수없이 옆으로 빗나가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정확하게 딱 찍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연필을 떼지 않는 거죠. 딱 고정시켜 버리는 거죠. 또는, 전기선을 연결할 때 플러스, 마이너스 연결선이 서로 빗나가기만 하고 잘 안 맞다가 어느 순간 정확하게 딱 맞는 때가 오죠. 그러면 계속 불이 켜지죠. 그런 식으로, 그래서 계합(契合)이라고 하는데, 이 자리는 아주 작은 점 같지만 딱 들어맞으면 흔들림 없이 고정 되어버리는 자리가 있어요. 거기에 딱 들어맞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이제는 감정이라든지 그런 모든 경계가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해요. 피하고, 피하지 않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것들이 다가와도 이제는 주위만 맴돌지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한없이 편한 거죠. 달리 손 쓸 일이 없어요. 그냥 평소대로 생활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거지요. 그것뿐이지 특별하게 법이란 게 없어요. 진리가 없어요, 마음이라는 것도 없고, 본래 자리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생활이에요. 생활! 특별히 공부라고 할 것도 없고, 경계가 다가오니 어디에 의지한다. 이런 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손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생각 가는 대로 그렇게 그저 살고 있을 뿐이죠. 요즈음은 찾아오시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주일에 몇 번씩 어록이나 경전을 읽으며 그곳에 있는 모든 말씀이 전부 지금 눈앞의 이것 하나를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하며 함께 공부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가 나타나지만, 언제나 다만 눈앞의 이것뿐이죠

지금껏 한 말은 다만 이 한 마디일 뿐입니다. 

 

 

 

 

질문 6.

 

그럴 때 교수님께서는 이제 마음의 주인이 되었다는 그런 표현을 쓸 수도 있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는 저 자신이 내 마음의 노예로 이끌려 다닌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한은 마음의 노예라는 그런 생각은 어떠한지요?

 

- 마음의 노예죠. 끌려 다니니까요. 말에 끌려 다니고, 욕망에, 감정에, 관념에, 그렇게 전부 끌려 다니잖아요. 마음이란 것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인데,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이냐 하면 내가 말 꼬랑지를 붙잡고 말 뒤에서 쫓아가고 있는 거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힘들죠. 조절이 안 돼요. 말은 제 마음대로 가버리고...(웃음) 중국의 선사들은 공부를 두고 ?콧구멍을 붙잡는다.? 이렇게 비유하기도 하거든요. 심우도(尋牛圖)에 보면 마음을 소에 비유하죠. 소는 코뚜레를 해서 콧구멍을 붙잡으면 꼼짝을 못하거든요. 아무리 작은 어린애라도 소 콧구멍만 붙잡으면 그 소는 따라와야 해요. 기막힌 비유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소등에 올라타서 코뚜레를 뚫어 고삐를 붙잡고 있는 게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는 이리저리 내가 원하는 대로 가는 거죠. 소와 내가 곧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부담이 없죠. 내가 소의 주인이라고도 이야기하기가 곤란해요. 소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하고 내가 하나가 되니까. 이런 저런 생각이 없죠. 마음이 있다는 생각도 없고, 없다는 생각도 없어요. 그냥 하나가 되어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죠. 

 

 

 

 

질문 7.

 

하나만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보통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방편에 관한 문제인데,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화두를 챙겨야 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이런 식이 있고, 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할까 하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마음공부에 있어서 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화두를 든다거나, 염불을 하는 것 하고, 그런 것 저런 것 안 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하고, 마음 제 멋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이런 게 전부 똑같은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공부를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하는 공부의 방법에 대한 의도적인 헤아림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건 공부가 아니에요. 제가 제 공부 한 것을 말씀드렸지만 지금 공부가 안된 사람 입장에서는 공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공부이고 저렇게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그쪽으로 노력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첫 질문에서도 나왔었지만, 그냥 공부에 대해서 배가 고파라 이겁니다! 배고픔, 목마름, 그 사실만 확실하면 배고프면 자기도 모르게 빵을 훔쳐 먹든, 밥을 해먹든, 언젠가는 저절로 그렇게 배고픔을 만족시키게 되는 것이고,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든, 강물을 퍼먹든 목마름을 식히게 되는 겁니다. 충분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게 되면 그게 공부를 성취시켜 주는 것이지, 평소에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하는 것은 의식의 장난에, 의식적 놀음에 의지를 하고선 그것을 공부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건 공부가 아니에요. 의식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서 공부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삼십 년 사십 년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공부에는 방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왕도가 없어요. 정해진 방식이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안심이 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속으로는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흉내를 내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경우와 똑같아요. 예를 들어 염불을 하지 않으면, 화두를 들지 않으면 불안하다면 그건 거기에 의존하고 있을 뿐, 실제 스스로는 공부를 안 하고 있는 거죠. 자기를 솔직하고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되돌아보고서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에 배가 고픈가, 진정으로 자신이 이 공부에 목이 얼마나 마른가? 그렇게 되돌아보시면 돼요. 실제로는 세간적인 욕망에, 돈, 인정, 명예 이런 것에 배가 고프면서 겉으로만 ?공부, 공부!?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속고 있을 수도 있어요. 자신이 진정으로 얼마나 이 공부에 배가 고파있는 것인가? 솔직하고 냉정하게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배고픔이 있으면 공부는 거기에 의존해야 되는 겁니다. 배고픔만큼, 그 배고픔이 심해지면 공부는 앞으로 나아가 진전이 있는 것이고, 배고픔이 희미해지면 공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지금 식사시간이 되어서 배가 고픈데, 그냥 밥을 먹으면 그것으로 만족이 되는데, 밥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실제로 밥을 먹는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뭘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죠. 이것은 이렇게 먹어야 하고, 저것은 저렇게... 또는 요리책을 갖다놓고 요리책만 보고 있을 수도 있죠. 그러면서 식사시간을 놓쳐버리고, 배고픔을 잊어버리고, 자꾸 요리책만 보고... 우리가 공부를 한답시고 자꾸 어떤 방식에 의존한다는 건 바로 그런 겁니다. 실제 배고픔 그 자체에 아무런 가식 없고 격식 없이 그냥 맡겨놓아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그냥 부엌에 가서 밥을 찾아먹어요. 식은 밥이라도 혹시 없는가.... 무의식적이죠. 그렇게 되어야 공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실제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고, 불러지는 것이죠. 의식이란 놈은 장난을 잘 치거든요. 온갖 요리책을 보면서, 말하자면 망상 속에서 만족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배는 여전히 고픈데도 자신은 안 고프다고 착각할 수도 있어요. 어떤 생각도 개입시키지 말고, 공부에 대한 어떤 계산도 하지 말고, 하여튼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의식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손을 쓰는 것은 아니다! 손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그야말로 자신의 가슴, 자신의 내면의 배고픔이 요구하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내 의식으로써 이렇게 저렇게 공부에 대해서 헤아려보고, 생각해보고, 이만큼 공부가 되는구나, 또는 안 되는구나, 학교 공부하듯이 그렇게 해 가지고는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해도 배고픔은 여전한 겁니다.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잊어버린다 해서 배고픔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맨 처음 질문하셨던 "마음가짐",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진정자신이 어디에 목이 마르고 어떻게 배가 고픈가, 그것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머리를 써서 하는 게 아니니까 별 어려운 것이 없어요. 맡겨두면 되는 거예요. ?언젠가는 될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부담 없이, 너무 부담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 의식이 개입이 되는 수가 있어요. 부담 없이 가볍게 공부를 해 나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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