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향기

신심명 법문 3

맑은 샘물 2010. 11. 22. 00:33

신심명 법문 3

 

 

 

신심명 법문 3

 

김태완

 

 

13.


一種不通(일종불통) 한결같음에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양처실공) 양쪽에서 모두 공덕을 잃으리라.

 

“한결같음”이란 “둘 없는 하나” “차별 없는” “분별 없는” 정도의 뜻입니다만, 물론 이런 개념들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개념으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둘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이쪽”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벌써 “이쪽 아닌 쪽”이라는 개념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죠. 즉 개념적인 이해는 언제나 분별이고, 분별은 언제나 둘로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 없는 하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죠. 다시 말하여, 개념으로 이해한다고 여기지만 “둘 없는 하나”를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 없는 하나”라는 말은 곧 무엇이라고 지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고, 정해진 곳에 머물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붙잡거나 어디에 머물러서 “이것이 둘 없는 하나이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둘 없는 하나”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둘 없는 하나”는 다만 곧장 지적할 수 있을 뿐이죠. 곧장 이렇게(손가락을 세우며) 가리킬 수 있을 뿐입니다. 분별하여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다만 이렇게(손가락을 세우며) 가릴 킬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손가락을 세우며)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물론 “바로 이것이 둘 없는 하나로구나.” 하고 알아차리거나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곧장 이렇게(손가락을 세우며) 가리키는 것이니, 곧장 이렇게(손가락을 세우며) 가리킬 때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사람과 동일한 입장에 서서 동일하게 보고․듣고․가리키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일러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합니다. 이 공부는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이심전심으로 성취됩니다.

저는 언제나 “이것입니다.”(손가락을 세우며) 하고 가리킵니다. 이렇게 할 때에는 곧장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을 드러내는 것이지, 분별할 수 있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은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분별하도록 가리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로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을 확인하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다면, 언젠가는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을 확인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것입니다.”(손가락을 세우며) 하고 말할 때에는 온 우주에 있는 먼지 한 톨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겁니다. “이것입니다”(손가락을 세우며) 하고 말할 때에는 이 손이나, 표정이나,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에 있는 먼지 한 톨도 빼놓지 않고 우주 전체를 몽땅 가리키는 것입니다.

먼지 한 톨 한 톨을 가리키더라도 역시 우주 전체를 몽땅 가리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쪽 저쪽이 없는 전체입니다. 바로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이 확인되면, 지금까지 이쪽과 저쪽을 나누어 이해하던 그런 모든 분별이 한 순간 싹 사라지면서 부분 없는 하나가 됩니다. 부분 없는 하나가 되니 마음이 따로 없고 세계가 따로 없고, 이쪽이 따로 없고 저쪽이 따로 없습니다. 이것을 일러 “일종(一種)” 즉 “한결같은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꽃 한 송이가 우주 전체요, 나뭇잎 한 개가 우주 전체요, 매미 울음소리가 우주 전체요, 푸른 하늘이 우주 전체요, 손가락 한 번 퉁기는 것이 우주 전체입니다.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은 다만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일 뿐입니다. 보이는 것이 곧 이것이고, 들리는 것이 곧 이것이고, 느끼는 것이 곧 이것이고, 생각하는 것이 곧 이것이고, 행동하는 것이 곧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손가락을 퉁기며)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바로 이것(손가락을 퉁기며)입니다. 저 푸르른 녹음, 물소리, 귀뚜라미 소리, 새소리, 푸른 하늘, 흔들리는 나뭇잎, 이 모든 것이 전부 하나입니다.

비유하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아요. 모든 그림은 영화 화면 위에 나타나는데, 그 그림만 보면 모든 그림이 하나하나 별개로 달리 있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화면이 있을 뿐이죠. 다른 비유를 들면, 마치 햇빛과 같아요. 해가 떠서 햇빛이 쏟아지면 천지는 수없이 많은 색깔과 모양으로 드러나지만,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한결같이 햇빛일 뿐이죠. 이처럼 온갖 종류로 차별되게 나타나는 것들이 실제로는 한결같이 하나입니다. 이것(손가락을 퉁기며) 하나란 말입니다. 온갖 차별 그대로가 아무 차별이 없는 거예요.

(맴맴 하고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저기 매미 소리가 들리잖아요? “저 소리가 매미에게서 나오는 겁니까, 자기에게서 나오는 겁니까?” 하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매미에게서 나온다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다 할 것이지만, 사실은 매미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매미가 따로 없고 자기가 따로 없고, 매미가 곧 자기요 자기고 곧 매미입니다. 매미 소리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매미 소리입니다. 또 무엇을 보고 있으면, “저 색이 저쪽에 있느냐, 나에게 있느냐?” 어떤 사람은 저쪽에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있다 하면서 헤아리겠지만,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쪽도 이것이요 나도 이것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자리가 없어서,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온 천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모두가 이것 아님이 없어요. 그러므로 생각으로는 절대로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한 번 스스로에게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든 이쪽과 저쪽, 안이냐 밖이냐, 나와 남, 이런 식으로 차별을 하면 전혀 이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차별이 소멸된 곳이 “여기”(손가락을 퉁기며)입니다. 모든 차별이 소멸되면 다만 이것뿐인 거예요. 모든 차별이 소멸된 뒤에는 이쪽과 저쪽을 지적하고, 안과 밖을 나누고, 나와 남을 말하더라도, 한결같이 이것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우주라는 한 폭의 그림이 “여기”에 몽땅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주는 분리할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에요. 이 한 폭의 그림이 바로 ““일종(一種)”이요 “한결같음”입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음”에 통하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머물거나 구속되지 않습니다. “한결같음”에 통하지 못하면, 이쪽으로 오면 이쪽에 머물러 구속되고, 저쪽으로 가면 저쪽에 머물러 구속됩니다.

이처럼 “일종(一種)” 이 “하나”에 통하지 않으면 분별하는 하나하나에 모조리 막히고 구속되어 버립니다. 이 하나에 통하면 분별하는 하나하나가 곧 전체이니, 머물 곳이 따로 없고 구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가 분명하면, 말을 해도 말하지 않는 것이고, 생각을 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행동하여도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말이 없고 생각을 해도 생각이 없고 행동을 해도 행동이 없으니까 지을 업(業)이 없어요. 불교에서 깨달으면 업에서 해탈한다고 하잖아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아닙니까? 생각으로 짓는 업, 말로써 짓는 업, 행동으로 짓는 업이지요. 이 하나에 통하면,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행동을 해도 생각이 없고 말이 없고 행동이 없어요. 그러니 업이 없지요. 그러나 이 하나에 통하지 못하면, 생각하면 생각에 구속되고, 말하면 말에 구속되고, 행동하면 행동에 구속됩니다.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 구속되어 그 영향을 받는 것을 업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가 분명하면, 업이라든지 죄라든지, 옳다 그르다, 나쁘다 선하다 하는 모든 분별들이 한결같이 이것(책상을 두드리며)입니다. 만법이 하나로 귀결된다고 말하쟎아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만법이 모두 다만 이것입니다.

“하나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에서 공덕을 잃는다.”는 것은, 이 “하나”(책상을 두드리며)에 통하지 못하면 하나하나의 만법이 제각각 따로 있게 되고, 그 제각각 따로 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갈피를 못잡고 헤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에 통한다”는 것을 또 심리적인 측면에서 말해 본다면, 어떤 인연에 마주치고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마음에 분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분열감, 분열이라는 건 불안하다는 겁니다. 그런 불안이 없어요. 흔들림 없이 안정되지요. 『육조단경』에서는 선(禪)을 말하기를, “안으로 혼란스러움이 없고, 바깥으로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라고 하였지요. 언제나 이것(책상을 두드리며)이니 어떤 경우에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언제나 저절로 한결같으니, 아무런 흔들림과 분열이 없어요. 이것을 두고 다이아몬드 즉, 금강석같이 단단하다고도 합니다. 끄달리는 정이 사라지고 단단하게 안정되는 거지요.

 

 

 

 

지금까지 공개되었던 총 26장의 <신심명 법문>이  이번 5월 6일에  도서출판 "침묵의 향기"에서  <바로 이것!>-선으로 읽는 신심명-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수십장의 예술 사진도 삽입되어 아름다운 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신심명 법문은 책으로 만나 보시기 바라면서, 출판사의 요청으로 무심선원 홈페이지의 신심명 법문은 총 26장 가운데 일부인 1-5장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무심선원 http://www.mindfree.net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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