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월면(滿空月面)
空山理氣古今外 (공산이기고금외)
白雲淸風自去來 (백운청풍자거래)
何事達摩越西天 (하사달마월서천)
鷄鳴丑時寅日出 (계명축시인일출)
선시 : 만공 ' 鷄鳴丑時寅日出 (오도송) '
위에 소개한 선시는 만공월면(滿空 月面 :1871~1946)스님이
그의 세속나이 스물 다섯 해(법랍 12세) 되던 을미년 1895년에
충남 아산시 송곡면 유곡리 소재 봉곡사에서 읊은 선시입니다.
봉곡사에서 어느 여름날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狀)이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공부를 흐트리지않고 하룻밤을 꼬박 지내다가
새벽 축시(丑時)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응관법계성 일채유심조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법계성(法界性)을 깨달은 다음 지은 일종의 오도송입니다.
사진은 봉곡사 전경입니다.
왼쪽에 있는 것이 자그마한 대웅전이고 바로 바라보이는 곳은
스님들이 정진하는 요사체입니다.
봉곡사 좌편 아래에는 만공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 世界一花 (만공탑 꼭대기 일원상에 새겨진 무궁화 한 송이로 쓴 만공의 친필)
“너와 내가 둘이 아니오,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오,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인 것(세계일화ㆍ世界一花)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나니.
지구라는 한 모태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로다.”
“남편과 아내가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은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 한 가지를 바르게
지니면 세상은 편할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니라.”
세계일화 ( 世界一花 )
만공스님의 독창적인 선어(禪語) 한 자락입니다.
일본의 항복소식을 하루 지나 들은 만공은 전월사에서 수덕사로
내려가다 산길에서 활짝 핀 무궁화와 마주칩니다.
그 앞에서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수덕사에 들어서자 마자
만공은 지필묵을 준비시켰습니다. 만공은 붓대신 무궁화 한 송이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하에 세계일화를 써내려 갔습니다.
광복의 기쁨과 의미를 '세계일화' 이 네 글자에 담아낸 것이지요.
- 충남 서산 연암산 천장암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은 스승 경허(鏡虛)가 다시 살려낸
선(禪)의 나무에 활짝 꽃을 피운 덕숭산문의 개조입니다
만공이 주석하던 예산 수덕사가 덕숭산에 있어 그 문하를 덕숭산문
또는 덕숭문중이라고 부릅니다.
경허와의 법연(法緣)은 만공의 야반도주에서 비롯됩니다.
만공은 그냥 중이 되고 싶어 열세살 , 어린나이에 홀로 된 모친 몰래
집을 나섰습니다. 이 절 저 절을 떠돌다가 동학사 진암(眞岩) 밑에서
중물을 익혀갔습니다. 만공의 근기(根機)를 꿰뚫어본 진암은 경허에게
제자로 삼으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만공은 천장암으로 보내집니다.
당시 천장암에는 30세의 수월, 23세의 혜월이 수행에 한창이었습니다.
만공도 함께 마음밭 갈기에 나섭니다. 어머니 김씨는 30년 뒤에야
아들과 천장암에서 해후하게 됩니다. 한숨과 눈물로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에 의해 원만(圓滿)이라는 비구니로 다시 태어납니다.
만공이 천장사에서 공양주를 할 때 일화 한 토막입니다.
어느날 어린 만공은 스승 경허를 따라 탁발을 나갔습니다. 그날 따라
동냥성적이 좋아서 쌀자루에 쌀이 가득하여 무겁기까지 했습니다.
천장사로 되돌아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만공은
쌀의 무게를 점점 느끼고 걸음이 더디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눈치챈 경허가 꾀를 내어 길가던 20세 가량의 아릿다운 여인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와락 껴안고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 동네 청년들과 마을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나와
"저 중놈! 요망한 놈들을 잡아라"
하면서 만공과 경허를 잡으려고 뒤쫓아 왔고 그들은 혼신을 다해
도망질을 쳤습니다. 한참 후에야 그 사람들을 따돌리고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자 둘은 안도의 한숨을 가삐 몰아 쉽니다.
어느정도 안정릉 취한 뒤 만공이 말하길,
" 아이고! 스님 우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마트면 곤욕을 치를 뻔
하지 않았습니까? "
" 너 아직도 등에 진 그 쌀이 무거우냐? "
"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무거운 줄을 몰랐습니다"
" 그렇느니라. 무겁다는 생각이 없으면 무겁지가 않는 것이니라. "
만공은 최초로 스승 경허로부터 귀중한 선적 체험을 얻을 수 있었고
그 후 어느날 그의 가슴에 그동안 꽉 차있던 일체의 의단을 무너뜨리고
존재의 근원, 법칙의 변화, 그 모두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습니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
만일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모든 법칙이 마음이 만든 것을 알아야 하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온양의 봉곡사에서 한 소식을 얻은 만공은 경허의 지시로 다시
무(無)자 화두를 들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아다가 마침내 통도사
백운암에서 두 번째 깨달음을 이룹니다. 지혜의 눈을 밝힌 만공은
스승을 찾아 천장암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어 사제간의 법거량이 이어집니다.
“생과 사는 어떠하던고.”
“도를 깨달으면 살고 죽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제가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혹은 살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고 그러하옵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고.”
“얻은 것도 없거니와 잃은 것도 없사옵니다.”
스승 경허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얼굴에서 부처의 모습을 본 것이지요.
스승은 전법게와 더불어 법호(만공)를 내렸습니다.
1904년 음력 칠월 보름 밤이었고,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경허는 이튿날 먼 길을 떠났고 불귀의 객이 되어
삼수갑산에서 만공을 기다리게 됩니다.
- 만공선사 (滿空禪師) (1871∼1946)
● 만공연보
▲1871.3.7 전북 태인출생, 속성은 송(宋)씨, 만공은 법호, 월면은 법명
▲1884 공주 동학사 진암 문하에서 수행시작,
12월8일 서산 천장암에서 태허를 은사, 경허를 계사로 득도(得度ㆍ정식출가)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 전라북도 정읍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그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스승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대(金仙臺)을 짓고, 보임(保任)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
(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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