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젖통을 희롱한, 만공(滿空) - 김정휴
조선총독부의 압정이 날로 심화되어 우리나라의 지성인들이 거의 숨을 죽이고 지내던 1937년, 미나미 지로 총독은 총독부 회의실에 각도 지사와 31본산(本山) 주지를 모아놓고 합동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이 날 회의의 주제는 조선 불교 진흥책이었으나, 총독부의 숨은 뜻은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설득 작전이었다. 만공은 이 날 마곡사 주지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미나미 총독은 전임 데라우찌 마사다께 총독이 조선 불교에 끼친 업적을 칭찬하고는, 침체에 빠진 조선 불교를 증흥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불교에 합병하는 길이 첩경이라는 뜻을 비쳤다.
장내는 다소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였으나, 누구 한 사람 미나미의 말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만공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밝고 밝은 빈자리에 어떻게 산하대지가 생겨났는 줄 아느냐?”
찬물을 끼얹은 것같이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장내는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만공은 할(喝, 잘못된 의견이나 망상을 꾸짖어 반성하게 하는 소리)을 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만공의 얼굴을 향해 집중되었다.
“전 총독 데라우찌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쳐 놓은 사람이오. 우리 특유의 불교 전통을 지닌 승려들로 하여금 일본 불교를 볻받게 하여 대저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부처님의 계율을 파하게 한, 불교에 죄악을 끼친 사람이오. 그는 마땅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오. 우리 조선 불교는 1,500년 역사를 지니고 수행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如法)한데, 일본 불교와 합하여 잘 될 리가 없으니 총독부는 불교에 간섭하지 마시오. 불교 진흥책은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오. 만일 총독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문이 있다면 네놈들도 곧 망할 것이다.”
만공은 할말을 다 한 다음 총독부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만공을 따라 움직였다.
모든 우국지사들이 칩거하고 있었고, 입이 있으되 말을 삼가던 1931년에서 1941년 사이의 그 살얼음 같던 총독부 학정 아래서 누가 조선 총독의 면전에서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었을까.
미나미 총독은 만공의 그런 배짱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며, 속으로는 정말 조선의 괴짜라고 경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식민지화하기가 어렵다고 느꼈을 것이다.
부처님 젖통이 저렇게 크니.....
민공은 ‘배가 크고 허리가 두터운’ 우리 불교 여명기의 드높은 성좌였다.
그 날 밤 만공이 묵고 있는 선학원으로 한용운(韓龍雲)이 찾아와 말했다.
“참 잘했네. 한번 할(喝)을 하니 그놈들 간담이 서늘했을 걸세. 할도 좋지만 통쾌한 방망이로 때려 주고 나올 것이지..... . ”
만공은 한용운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이 좁스런 사람아, 차나 한잔 드세.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머리가 명석한 사자는 할(喝)을 쓰느니..... .”
천하의 한용운도 만공의 얽매임 없는 법력(法力)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유수 같은 달변에는 말이 막혔다.
오랜 수도 끝에 단련된 그의 정신력은 봄눈을 녹이는 화로처럼 삽시간에 모든 것을 녹여 버렸다.
만공은 35세까지는 몸살을 앓듯 자기 자신을 앓으며 산수(山水)와 지남(指南)이 될 스승을 찾아 늙은 쥐가 소뿔 속을 헤집고 들듯 간절한 마음을 들고 헤매어 다녔지만, 참 나를 발견한 이후 40년간은 덕숭산(德崇山)을 떠나지 않고 거상(巨象)처럼 산정을 지키며 보임을 했다.
덕숭산에 있을 때다. 색입색출(色入色出)의 만공 가풍을 돋보이게 하는 일화가 오늘에도 그 빛을 연연히 던지고 있다.
만공은 한 날 법당에 앉은 채 망연자실하여 불상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일엽(一葉)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허, 부처님 젖통이 저렇게 크니 스님들 양식 걱정은 없겠구나.”
일엽은 고승(高僧) 만공의 입에서 젖통이란 단어가 거침없이 튀어나오자 얼굴이 빨갛게 붉어졌다.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일엽도 한마디 띄웠다.
“허허, 저년이 부처님만 건드려 놓고 젖은 얻어먹지 못하는군.”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부처님의 젖과 같은 존재의 궁극적 근원을 알아내야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부처님의 법만 좋다고 입놀림만을 해서는 안 된다는 무서운 경책(警責)이었다.
지금도 쌀짐이 무겁느냐?
선가(禪家)의 언어는 이처럼 선(禪)적인 체험을 근간으로 하여 토로된다.
만공 자신도 그의 스승 경허(鏡虛)로부터 이와 비슷한 선적 체험을 쌓았었다.
서산의 천장사에 있을 때였다. 경허는 어느 날 갑자기 만공을 이끌고 탁발(托鉢)을 나섰다. 쌀을 받아 배낭에 짊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만공은 어깨가 아파 속으로 끙끙거렸다.
경허는 만공을 앞서서 걸으면서도 만공의 그런 형편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어느 마을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을길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인 여인을 만나자, 경허는 불문곡직 여인의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사색이 되어 달아난 여인은 자초지종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잠시 후 마을 안이 발칵 뒤집혔다.
“저기 가는 저 중놈 잡아라!”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뒤쫓았다.
경허는 뒤도 보지 않고 앞서서 들고 뛰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만공이었지만 혼찌검이 나게 되었으니, 그도 또한 죽을힘을 다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죽지 않으려고 뛰니 만공의 속도도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랐다.
산구(山口)에 이르자 경허가 그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경허가 물었다.
“얘야, 지금도 등에 진 쌀짐이 무겁느냐?”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무겁다는 느낌이 없어져 버리던걸요.”
“네 말이 옳다 무겁다는 생각이 없으니 무엇이 또 있어서 너를 무겁게 했겠느냐.”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을 백 번 들은들, 만공처럼 한 번 체험하는 것이 지혜(知慧)로 육화하는 데는 제일이 아닐까.
이와 같은 선적 체험은 선가(禪家)의 선사(禪師)들 사이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오고 간다.
한 선승이 이가 아파서 발버둥쳤다. 그 친구가 이를 뽑으라고 했다. 이를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친구는 이의 주인에게 ‘아픔의 뿌리’를 찾아보라고 하면서 뽑은 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렸다. 아픔의 뿌리는 없었다. 잇몸에 붙어 있지 않았고 뽑힌 이에 붙어 있지도 않았다. 아픔의 뿌리는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을까?
만공 역시 선가의 독특한 체험을 통해 경허로부터 선(禪)을 체득했다.
1871년 3월 7일,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송신통(宋神通)을 아버지로, 김씨(金氏)를 어머니로 하여 이 세상에 온 한 생명 만공은, 선의 체득을 통해서 비로소 철통같은 무명(無明)과 업(業)으로 꽁꽁 묶인 지혜를 신선하게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만공은 31세에 견성(見性)을 하고 나서 참나를 찾는 보임(補任)에 들어가, 보았던 것을 더욱 견고히 다져나갔다.
‘존재의 궁극적 근원은 무언가(萬法歸一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들고 탐구하는 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했다.
만공은 오직 ‘나’를 찾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아무 곳에도 걸리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의 ‘나’를 찾기까지 만공은 모든 것을 유보시켰다.
그는 대기(大器)였으며 진짜 한국의 괴짜였다.
열반의 모습에도 괴짜 인생이
열네 살의 소년이 집을 나서 오직 따뜻함을 줄 수 있는 그 누구를 찾아 거친 세상을 돌다가 진암노사를 만났고, 다시 진암의 소개로 당대의 고승 경허를 만남으로써 새 생명으로 탄생하게 된 만공의 생애, 여기서 우리는 저 [사회계약론]의 위대한 저자 루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년은 경허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참다운 생명으로 이어진 빛나는 삶을 연다
‘도울 수 있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로 역사는 흐른다’는 말이 경허와 만공에게서 비롯된 말만 같다. 실로 20여 년에 걸친 절망적인 체험과 선적 체험이 만공을 에워싸 인간이 궁극을 꿰뚫어보는 활안(活眼)을 개안시켜 한국 불교의 거목이 되게 했으니, 만공의 철저한 구도(求道)와 보임(補任)과 보설(普說)이 함께 담긴 기행(奇行)의 절정을 우리는 그의 열반(涅槃) 모습을 통해서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는 참으로 기인 기행의 별이었다.
그 날의 모습을 그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한 띠집을 지어 전월사라 이름하고 홀로 달을
굴리시다가 어느 날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그려”
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하니 때는 병술년(1946) 10월 20일이었다.
한 얼굴, 한 인간의 형상 속에서 빛과 그림자, 유심과 유물, 가아(假我)와 진아(眞我)의 이중창을 목격하고, 이제 오온(五蘊)과 사대(四大)가 흩어져 흙은 흙으로, 물은 물로, 바람은 다시 바람으로, 불은 또 다시 불로 각각 환귀본처(還歸本處)해 가는 그 찰나에 서서 끝내 천연히 모든 것을 수용하는 만공의 괴짜 인생이 거기 있었음을 그의 열반상이 증명해 주었던 것이다.
김정휴(金正休)
1944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1960년에 밀양 표충사에서 출가했다.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부산 범어사, 김천 직지사, 경주 불국사, 보은 법주사 등의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구미 금오산 해운사 주지, 동국학원 감사, 능인학원 이사,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법보신문 편집고문이다.
지은 책으로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선재의 천수천안>, <초인경허>, <열반제>, <낮은 사람 자유>, <고승평전>, <종정법어집>, <무상속에 영원을 산 사람들>, <걸레 중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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