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푸른 하늘에, 물은 병 속에 있다 하시네(雲在靑天水在甁)
근현대 중국화가 장대천(張大千)의 <송하문도(松下問道)>(1938년 作).
‘지금 여기의 거사선’
‘복성서(復性書)’로 불교 심성론 알린 이고 거사
당(唐)나라
때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낸 이고(李翱, 772~841) 거사는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의 조카 사위이자 제자로, 처음에는 한유와
함께 유교문화를 변호하고 불교문화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인물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선종의 깊은 영향을 받아서 유불 양교를 회통(會通)하는
사상을 펼쳐 송대 신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문장가이기도 하다.
특히 유학을 속제(俗諦)로, 불교를 성명지도(性命之道)로 인도하는 진제(眞諦)로 보고 ‘정(情)을 버리고 성품을 회복해 성인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요지로 한 『복성서(復性書)』란 저술을 남겨 불교의 심성론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의 자(字)는 습지(習之)이며, 롱서(隴書) 성기(成紀: 지금의 甘肅省 秦安東) 사람이며 시호는 문(文)이다.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校書郞‚ 考工員外郞‚ 檢校戶部尙書‚ 中書舍人‚ 山南東道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면전에서 재상 이봉길(李逢吉)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미움을 사서 여주 자사(廬州刺史)로 강등된 일이 있었을 만큼 조정의 실정에 대해서 과감히 비판하고 당대 실권자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은 강직한 선비였다.
한때, 이고 거사가 낭주(朗州, 지금의 호남(湖南)성 상덕(常德)시) 자사로 있을 때의 선화(禪話)다. 거사는 약산유엄(藥山惟儼, 751~834) 선사의 명성을 듣고 선사를 초청했으나 오지 않았다. 당시만해도 거사는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지 않아서인지, 당돌하게도 선사를 먼저 참례하지 않고 부르는 결례를 범한 것이다. 황제가 법(法)을 청해도 입궐하지 않는 선사들이 목숨이 위태롭다 한들, 지방 관리의 무례한 명을 따를 리 없다. 그래서 이고는 예주(澧州) 약산(藥山)으로 직접 선사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이때, 약산 선사는 자사가 당신을 찾아온 줄 알면서도 노송 아래 앉아 독경을 하면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약산 선사는 좌선과 독경을 좋아하지 않는 다른 선승들과는 달리, 수시로 좌선과 간경(看經)을 하며 깨달음 뒤의 한가한 보임(保任)공부를 즐기곤 했다. 찾아온 고위관리가 불러도 일단 모른 체한 것은 세간법 보다 출세간법인 불법이 더 위대함을 은근히 자임하는 당당한 기세를 보인 것이라 추측된다.
청대(淸代) 화가 정관붕(丁觀鵬)의 <이고문선도(李翶問禪圖)>
“구름은 푸른 하늘에, 물은 병 속에 있다”
“직접 뵙는 것이 명성을 듣느니만 못하네요.”
성정이 급하고 편협했던 이고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선사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어서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소맷자락을 떨치고 돌아가려했다.
그러자 선사가 “이고여!” 하고 부르자,
거사가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하니, 선사가 말했다.
“자사는 어찌하여 자신의 귀만을 믿으면서 눈은 경시하시오?”
겉모습만 보고 선지식을 알아보지 못해 진리에 눈뜰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하는 말이다. 다행히 거사는 쌓은 공덕이 있어서인지, 선사의 잔잔하지만 우레와 같은 꾸짖음에 담긴 뜻을 알아차려 황급히 합장하고 사죄하면서 가르침을 청했다.
“스님, 도(道)란 무엇입니까?”
약산 선사는 손으로 위를 한번 가리켰다가, 다시 아래를 한번 가리키며 물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소이다.”
거사는 마음이 뛸듯이 기쁘고 흡족하여 절을 올리면서 즉석에서 깨침의 게송을 지어바쳤다.
수행하신 풍채는 학과 같으시고(練得身形似鶴形)
천 그루 소나무 아래 경(經)이 두 상자(千株松下兩函經)
도를 물으니 딴말씀 없으시고(我來問道無餘說)
구름은 푸른 하늘에, 물은 병 속에 있다 하시네.(雲在靑天水在甁)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 화두가 나온 배경이다.
구름이 하늘에 있고, 물이 병 속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무엇이 그리 대단한 진리일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늘 우리 눈앞에 있는 도(道)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물 속에 있으면서 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기를 호흡하고 살면서도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도(道)는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인가.
색안경 벗어야 보이는 ‘본래 구족한 그대로의 진실상’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는 화두는 성철 스님을 통해 다시 유명해진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화두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공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으로서 의심의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다. 즉,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柳綠花紅), “눈은 가로로, 코는 세로로 나있다”(眼橫鼻直), “기둥은 종(縱)으로 문지방은 횡(橫)으로” 있어서, 이것은 본래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에 이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달은 청천에 있고 병에 있지 않다” (月在靑天不在甁) 는 선어 역시, 있어야 할 본래 모습을 곡해하지 않아야만 본래 구족한 그대로의 진실상을 ‘여실하게 볼 수 있음’(如實知見)을 나타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숨김없이 분명하게 나타내는 진실한 모습, 이것이 대도(大道)의 드러남이라면, 천지만물은 우리 앞에 늘 진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까닭일까.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고정관념이나 편견, 집착, 분별이란 색안경을 쓰고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어떠한 생각의 틀 없이 무심하게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자연의 풍물은 모두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사물의 진면목으로 보일 것이다.
한 스님이 운문문언 선사께 어쭈었다.
“나무가 시들어 낙엽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운문 선사가 답했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가 시들어 낙엽이 진다’는 것은 번뇌망상을 나뭇잎에 비유해서, 번뇌망상의 진애(塵埃)가 가을 바람에 상쾌하게 없어진 상태를 ‘체로금풍’이라고 한다. ‘체로(體露)’는 전체로현(全體露現)의 약자인데, 진리의 실상이 완전히 그대로 노출되는 것, 다시 말해 불법의 전체가 완전히 드러난 것을 상징한다. 추풍(金風)이 번뇌망상의 나뭇잎을 흩뜨리는 정경이야말로 일체를 내려놓은 청풍거래(淸風去來)의 깨달은 경지를 드러낸 장면이다. 일체의 사념과 번뇌망상을 떨쳐버린 무심의 경지에서만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남송(南宋) 화가 마공현(馬公顯)의 <약산이고문답도(藥山李翶問答圖)>
연기(緣起)하는 ‘현상’ 그대로가 ‘실상’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나타내는 용어로 실상(實相)이란 말을 쓴다.
이것은 모든 존재 자체의 성질이므로 법성(法性)이라고도
하고, 그 자체는 진실하고 상주하므로 진여(眞如)라고도 하며, 그렇게 진실하고 상주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므로 실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실상의 양상은 언어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천태종에서는 본질(理)과 현상(事)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곧 실재(실상)요, 차별이 곧 평등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란 개념은 연기(緣起)하는 것, 즉
공(空)인 만물이 어떠한 순간에도 진실한 것임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세계의 참모습은 무상(無相)ㆍ무아(無我)여서 만물은 항상 변해가지만 이는 단순히 변한다는 객관적 사실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변해가면서도 그것은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는 존귀한 것으로서 항상 진실된 것이라는 도리가 포함된 것이다.
이고
거사의 공로는 『복성서』를 써서 불교 심학을 널리 알린 공덕보다 ‘운재청천수재병(雲在靑天水在甁)’이란 불멸의 공안을 후세에 남긴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화두를 투철하게 참구하여 있는 그대로의 완전한 실상을 깨달아 실상 자체가 된다면, 그 사람은 약산유엄 선사와 이고 거사를 친견한 것이 되고 불조(佛祖)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공안을 이론이 아닌 지혜의 눈으로 투과하기 위해서는 ‘몸과 생각’을 자기로 여기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타파하여 무아ㆍ무심의 상태에서 우주와 하나되는 견성체험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하리라.
푸른바다 김성우(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이 글은 월간 <고경(古鏡)>에 발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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