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향기

육조단경8. 無念 - 생각이 없음

맑은 샘물 2010. 9. 9. 01:38

육조단경8. 無念 - 생각이 없음 





8. 無念 - 생각이 없음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귄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르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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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1.
선불교에서 논의되어 온 깨달음(梧)과 수행(修)의 관계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깨달음의 전에 수행이 필수적인가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깨달음의 후에 수행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전자는 보통 돈오와 점수(내지 점오)의 문제로, 후자는 돈오돈
수와 돈오점수의 문제로서 논의 된다.

2.
먼저 일반적으로 돈오라 함은 수행의 방편이나 단계와 관계없이 한순간 근원적인 본성과 일념상응함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단번에 들어서는 것을 말하고, 점수나 점오는 처음부터 방편을 빌려서 점차적 단계적으로 수행을 쌓아 최종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고 설
명된다.

그런데 돈오라 해도 반드시 그 전 단계에 수행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 점수도 깨달음이란 반드시 단계를 거쳐 점차로 오는 것이지, 순간적으로 또는 단박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단박에 오는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우선 양자의 차이는 깨달음에 점진적인 수행(점수)이 필수적으로 선행 되어야 하는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이 점에 대하여 이치만으로 접근하면 점수론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있다. 예컨대 달마조사는 [이입사행론]에서, "도를 닦고도를 얻는 데 느림과 빠름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백천만겁의 차이가있다. 즉심(卽心)으로 깨닫는 사람은 빠르고, 발심과 수행을 거듭하는 사람은 느리다.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마음이 바로 도라고 알지만, 근기가 둔한 사람은 곳곳에서 도를 구하면서도 도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18단)라고 하였고, 또 "어떤 것이 근기가 날카롭고 둔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스승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 현상에서 법을 보는 사람을 근기가 날카롭다고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이해하는 사람은 근기가 둔하다고 한다"(24단)라고 하였다. 이는 근기의 이둔에 따라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점수없이도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기의 예리함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것은 과거생에서의 수행의 깊이가 이번 생에 근기의 예리함으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돈오를 강조하는 혜능도본 [단경]에서 수행을 거듭 권하고 있는 것.

이렇게 보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돈오와 점수는 현생에서의 수행의 현재성(顯在性) 때문에 차이가 있어 보일 뿐, 깨달음에 수행이 필수적이라는 점은 양론의 차이라고 볼 수 없는것이 아닌가 한다.

오히려 양론의 현실적인 구분은 위와 같은 의미보다는, 깨달음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태도에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돈오는 수행의 길고 짧음, 방편 절차, 단계와 지위를 떠나 한 생각의 전환에 의하여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중생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한 태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돈오는 수행의 길고 짧음, 방편과 절차, 깨달음의 단계와 지위를 떠나 한 생각의 전환에 의하여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중생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한 태도에 따라 현생에서의 깨달음에 빠르고 느림이 있게 된다는 점에 근본적인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달마가 말하는 "즉심으로 깨닫는"다든지"현상에서 보는"것의 의미나, 본 [단경]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돈오의 의미도 이와 같은 취지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3.
다음 깨달은 뒤에 수행이 필요하가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 문제로 논의되어 왔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으므로 깨달음 후에 수행은 필요치않다는 것이고, 돈오점수는 깨달음 뒤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양자가 주장하는 돈오의 오(悟)가 어떤 깨달음인가가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으므로 수행이 필요치않다는 것이고, 여기서의 깨달음은 궁극적인 깨달음(구경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우는 세존께서 [수능엄경]권 제4에서, "부루나여, 시방의 여래도 그러하다. 이 미혹은 근본이 없어 성품이 필경 빈 것이니, 옛날에는 본래 미혹이 없었으되 마치 미혹과 깨달음이 따로 있는 듯하였지만 깨달음에는 다시 미혹이 생기지 않는다. 또 눈병에 걸린 사람이 공중에 헛 꽃을 보다가 눈병이 없어지면 꽃도 공중에서 사라지고 공중에 다시 생기지 않는 것과 같고, 또 광석에 순금이 섞여 있다가 그 금이 한 번 순금이 되면 다시 광석이 되지 않음과 같으며, 불탄 나무는 다시 나무가 되지 않음과 같이, 모든 부처님 여래의 보리열반도 그와 같다(諸佛如來 菩提涅槃 赤復如是)고 말씀하신 것처럼, 또 [대승기신론]에서 "여래장은 끝이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이 얻은 열반도 그와 상응하여 끝이 없다고 한 것 처럼 끝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므로 돈오시에 단박에 닦아 오수일시(悟修一時)로서 닦는다는 표현마저 군더더기일것이다. 더 이상 수행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돈오돈수는 경전상의 가르침에도 부합하는 주장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돈오점수론의 경우 그 깨달음이 과연 위와 같은 의미의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보조국사 지눌은 그의 [법집별행록절요]에서, "돈오점수라 하면 해오(解悟)에근거한 것으로, 심성을 확실히 안 다음 점차 수행하고 배워 그에 계합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만약 돈오점수론에서의 깨달음이 이러한 의미의 깨달음이라면 그 깨달음후에 수행이 필수적이어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깨달음의 경계는 사량분별이나 사유로써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하는것이므로, 위와 같은 "해오"가 근원적인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근원적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는 해오를 깨달음이라고 보고 있는 데에 돈오점수론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방편: 방(方)은 방법, 편(便)은 편의라는 뜻, 불교에서는 중생을 이끄는 좋은 방법이라는 의미로서, 선교(善巧)방편이라고도 한다.

*이번 생에~ 발현: 혜능도 그가 구결한 금강경해의 서문에서 "전생에 씨앗을 심은 상근기인은 한번 듣고 곧 깨닫지만, 만약 전생에 익힌 지혜가 없으면 비록 독송을 많이 해도 부처님
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다.

* 이러한 의미의 깨달음이라면: 달리 보는 돈오점수론 예컨대 [수능엄경]권 제10의 "이(理)는 돈오하는 것이기에 깨달으면 모두 소멸하겠지만, 사(事)는 단박에 제거되지 않고 차례로다하는 것이다 라는 경문이나, [화엄경]의 "초발심시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는 표현을 근거로 드는 경우로, 이 경우의 오(悟)와 정각은 해오로 볼 것은 아니다라는 것도 있으며 이에까지 나아가 논의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