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21. 안심론(安心論)
"그러나 욕장경(浴場經)에는 '승려들을 목욕시키는 공덕은 무한한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외부적인 덕행이 깨닫는 데 보탬이 된다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승려들의 목욕이란 말은 육체를 씻는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가 욕장경을 설법할 때 그는 제자들이 다르마를 갈고 닦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진리의 참뜻을 찾는 행위를 목욕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욕장이란 육체를 말한다. 그대는 지혜의 불을 때고 올바른 견해의 물을 데워서 그대 속에 있는 참된 불성을 깨끗이 닦아라. 그리고 일곱 가지 수행들을 잘 지킴으로 해서 그대는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승려들은 밝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들의 덕을 완성했으며 불성의 열매를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경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의 참된 불성은 모양이 없다. 그리고 집착의 때에도 모양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은 평범한 물로 보이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언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오물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버릴 때까지 계속 생겨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 몸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도 안 된다. 그러니 그대는 욕장경에서 부처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것을 닦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경전에는 사람이 전심으로 부처를 부르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부처는 깨어 있음을 말했다. 몸과 마음이 깨어 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악도 일어날 수가 없다. 부처를 부르는 것이란 그대의 마음을 부르며, 그 마음으로 하여금 수행의 법칙을 따르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대는 다르마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아집과 삼독심으로 고통을 받는 한 그대의 더럽혀진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부처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 의미를 찾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현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수행을 했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또한 이 마음은 모든 힘의 으뜸이다.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에 어떻게 이를까를 걱정하지 않는다. 여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건너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양을 갖춘 것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탕진하며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복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헛된 수행을 하고 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 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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