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 사성제(四聖諦) 1
***사성제(四聖諦)***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실 적에
이 사성제를 다섯 수행자
(아약교진여, 아습비, 마하마다담, 바뎨,
바부)에게 설하셨다.
붓다가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벌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쉬나가라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사제법(四諦法)
이라고도 한다.
중생들이 고통과 번뇌 망상에서 헤매는 것을 구해주기 위해 설한
고(苦)성제, 집(集)성제, 멸(滅)성제, 도(道)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고집멸도라고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것이다.
제(諦, satya))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 진리등을 가리키는데
쓰이며, 동시에 엄숙 한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데에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이다.
붓다는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고라는 말인 duhkha를 일반적으로 괴로움, 고통, 슬픔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보다 휠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곳은 고(苦)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人生八苦)을
들고 있다.
어떤것이 고성제인가?
생(生苦))하고, 늙고(老苦), 병들어(病苦), 죽고(死苦), 미운것과
만나고(怨憎會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苦),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苦)은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 나라고 取着취착된 몸과 마음:五陰盛苦)은
괴로움이다.
1) 생고(生苦) : 중생이 태어나는 것이 고이다.
2) 노고(老苦) : 중생이 늙는 것이 고이다.
3) 병고(病苦) : 중생의 아픔이 고이다.
4) 사고(死苦) : 중생이 죽는 것이 고이다.
5) 애별리고(愛別離苦) :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 고이다.
6) 원증회고(怨憎會苦) : 원망과 미워함에서 못 떠나는 것이 고이다.
7) 구부득고(求不得苦) :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지는 것이 고이다.
8) 오음성고(五陰盛苦) : 오온이 서로 맞지 않거나 생각의 발로가 맞지
않는 것이 고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등 3종으로
나누기도한다.
고고(苦苦)란 주로 육체적인 고통을 말한다. 보통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괴고(壞苦)란 파괴나 멸망 등에서 느끼는 정신적 고뇌를 말한다.
행고(行苦)란 현상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는
고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의 괴로움의 뿌리인 것이다.
또한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일뿐만 아니라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욕애(欲愛: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有愛: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無有愛: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욕애란 오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무존재(無存在)로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 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
멸성제의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또'괴로움은 해결될 수 있다.'라는 이상을 제시하여 확신을 심어주는
가르침이다.
괴로움의 멸(滅)이란 열반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은 소멸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苦)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이다.
열반은 현재의 생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有餘依) 열반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 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4) 도성제 (道聖諦)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가지 바른 길로서,
여기에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정견은 바른 견해로서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정사는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즉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정어는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說],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정업은 바른 행위이다.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정정은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이를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가지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 집제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
도제는 깨달음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 집은 세간의 인과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 도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서재영(동국대 강사) 자료출처/http://www.burun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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