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의 향

사성제 : 四聖諦 3

맑은 샘물 2010. 12. 25. 15:21

 사성제 : 四聖諦 3



***고(苦)의 유형과 네 가지 고[四苦]-사성제3***



  고(苦)에 대한 설명은 접근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 삼법인과 사성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법인에서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존재의 실상이 고라는 것입니다.
반면 사성제에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범주를 통해 고를 설명합니다.
사성제에서 설명하는 고는 인간이 느끼는 현실적이고 정신적인 고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법인의 고는 무상이라는 존재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사성제의 고는 집착이라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인간의 현실적인 고를 논하기 때문에 고가 왜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고(苦)의 세 가지 유형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했을 때 그것은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경전은 고에 대해서 세 가지 유형으로 세분해서 설명합니다.

사리풋타가 한 외도의 질문을 받고
'고고성(苦苦性)', '행고성(行苦性)', '괴고성(壞苦性)'이라는 유형을 통해 설명한 것이 그것입니다.
 
첫째, 고고성(苦苦性)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고(苦苦)'라는 뜻 인데 이는 인간이 육체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질병이나 베고픔 또는 전쟁과 폭력 등에 의해 받는 육체적인 고통이 고고입니다.
그런데 육체적 괴로움이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고성은 일정한 고연(苦緣), 즉 외부로부터 비롯되는 '괴로움의 조건'으로 인해 생기는 괴로움입니다.

둘째, 행고성(行苦性)이란 무상(無常)으로 인해 느끼는 괴로움의 성질을 말합니다.
 삼법인에서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고 했을 때 그 괴로움은 행고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행(行)'은 '천류(遷流)'로 표현됩니다.
변화하고 흘러가는 만물의 속성을 '움직인다'라는 의미를 지닌 '행(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변화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행고(行苦)'란
무상한 개체를 지속하고자 하는데서 초래되는 존재의 필연적인 괴로움입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육신을 이루고 있는 무상한 색온(色蘊)을 지속적으로 지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과정은 그대로 고라는 것이 행고성입니다.
 흔히 말하는 "살기 어렵다!"는 것은 경제가 어려워서, 또는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존재는 경제적 유무를 떠나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고라는 것이 행고성입니다.

 
셋째, 괴고성(壞苦性)이란 개체 존재가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데서 생기는 괴로움입니다. 언제나 젊을 것 같지만 날마다 늙어가고, 영원할 것 같던 존재가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괴고성은
'즐거움이 무너지는 괴로움'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과 젊음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태어난 모든 존재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괴고성은
무상한 존재에 대해 집착하는 갈애(渴愛)로 인해 비롯되는 고입니다.
한 개체가 무너지고 순환하는 것은 우주적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를 거부하고 영원을 고집하는데서 비롯되는 고통이 바로 괴고성입니다.
 따라서 괴고성을 치유하는 것은 제행무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적 고통으로만 알고 있던 고에 대해 불교에서는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 존재의 네 가지 고통(四苦)


고고, 행고, 괴고라는 설명이 고에 대한 유형적 설명이라면 존재가 가진
구체적인 고통은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 것[死]'입니다.
이를 네 가지 고통이라는 뜻에서 '사고(四苦)'라고 합니다.

사고(四苦)는 육체를 가진 존재라면 겪게되는 존재의 보편적 고통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생만을 희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이 고통이라는 사실에 쉽게 동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생은 모든 고의 출발입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따르면 "태어남[生]이 있음으로 늙고 죽음[老死]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개체에게 가장 극심한 고(苦)의 절정은 죽음인데 그 죽음은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뿌리는 다름 아닌 생이기 때문에 생은 고의 시작이며 그래서 네 가지 존재의 고통 가운데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적 관점에서 모든 중생의 고통은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한 개체로 태어난다는 것은 육도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다시 윤회의 굴레 속으로 되돌아 옮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육도에서 생은 고통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늙어감의 고[老苦]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색신(色身)은 무상한 색온(色蘊)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몸은 점차 쇠멸해 갑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자신이 누리던 것들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어 감을 의미합니다.
늙음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소외되고, 열정과 활동성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괴고성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병으로 아픈 고통(病苦)입니다.
육도집경에 보면 "중병을 앓아 사대가 흩어지려 하면 마디마디가 다 아프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통은 질병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병고는 고고성에 속하는 것이자 동시에 괴고성이기도 합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은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므로 병고(病苦)는

네 번째의 고, 즉 죽음의 고통(死苦)으로 이어집니다.

무상한 색신(色身)이 붕괴되고 흩어지는 것인 만큼 가장 커다란 고통이 바로 죽음의 고통입니다.
 병고(病苦)가 육체적 고통이라면 죽음의 고통은 사랑하고 아끼고 꿈꾸던 모든 것들로부터 영원한 작별을 고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 삶을 전제로 이룩한 것들에 대한 미련,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애절함 등 정신적 특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적 가르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죽음이란 영원한 단절이나 암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윤회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업(業)에 따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거나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더 근본적으로 육신의 죽음은 육도 윤회라는 중생계로부터 해탈하는 과정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큰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열반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불교적 가치관에 대해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라면 모든 존재는 개체적 자아가 없기 때문에 한 개체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이치를 관조할 것입니다.
나는 본래 나라는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였음을 깨닫게 되면 죽음이란 존재의 절멸이 아니라 존재 방식을 달리 할 뿐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새 인연을 만나는 생명의 전이일 뿐입니다. 죽음의 고통은 개체에 대한 실체론적 관념을 해체함으로써 나는 죽지도 나지도 않는 우주적 존재라는 자각을 통해 극복됩니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땅[地]과 물[水]과 불[火]과 바람[風]이라는 것이 불교적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서재영(동국대 강사)  자료출처/www.burun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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