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 四聖諦 2
***고해를 건너가는 네 가지 진리[四聖諦] 2 ***
흔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물론이고 불자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깨달음과 불교의 교리, 그리고 불자들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법(緣起法),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라는 매개고리를 통해서 중생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언어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사유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희유(稀有)하며 얻을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중생들이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연기법이라는 사상체계로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연기법 역시 존재의 실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설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범부중생에게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의 진리를 모든 중생들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교설을 다시 체계화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서 설법하신 사성제입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을 통해 중생의 삶은 무명에 쌓여있는 고(苦)임을 깨닫게 되고 열반의 세계를 지향해야 함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사성제로 체계화된 부처님의 가르침은 최종적으로 팔정도라는 여덟 가지 실천론으로 구체화됩니다.
따라서 연기, 사성제, 팔정도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중생의 삶으로 연결시켜주는 종교적 연결고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사성제를 이해하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입니다.
2. 의사가 병을 치료하듯
중생들이 살아가는 사바세계를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중생들은 탐진치(貪瞋癡)라는 세 가지 독[三毒]에 오염되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그 고통의 바다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을 치유하는 의사에 비유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을 '위대한 의사'라는 의미에서 '대의왕(大醫王)'으로 표현합니다.
부처님을 의사에 비유하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과정이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있을 때 훌륭한 의사라면 먼저 환자의 상태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병이 왜 생겼는지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할 것이며,
셋째는 병을 잘 치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병을 치유하는 올바른 과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첫 단계는 바로 환자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자의 상태에 따라 병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에 따라 어떤 약을 처방할 것인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이 부처님도 중생의 병에 따라서 약을 처방하신다고 해서 부처님의 교화활동을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의사가 환자를 다루듯이,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이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교설입니다.
{잡아함경} 권15에는 "네 가지 성제(聖諦)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괴로움의 집(集)·괴로움의 멸(滅)·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道)라는 네 가지 성제(聖諦)가 곧 그것이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사성제란 고(苦)·집(集)·멸(滅)·도(道)라는 네 가지 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苦)란 바로 중생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환자에게 비유한다면 병으로 신음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중생의 병은 다름 아닌 집착(集)으로부터 생겼습니다.
환자에 비유하자면 중생은 집착[集]이라는 병원균에 의해 병에 걸린 것입니다.
고와 집이 중생의 절망적 현실이라면 그것을 극복한 참다운 평안의 세계는 멸(滅)과 도(道)입니다.
멸이란 말 그대로 고통이 사라져버린 상태입니다. 환자에 비유하자면 병이 완치된 건강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열반의 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실천을 행해야 하는데, 환자에 비유하자면 치료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의사가 병을 치유하는 과정과 궤적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3. 불교를 배우려면 사성제를 배워야 한다
사성제에 대해 설한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신의 교설에 대해 '성제(聖諦)'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성제에서 '성(聖)'이란 '성스러운'이라는 형용사로 이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또 '제(諦)'는 '사실', '진실', '진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 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성(聖)'은 '엄숙한 단어'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엄숙하게 설하신 네 가지 단언적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중아함경}에 나타난 '상적유(象跡喩)'라는 비유를 보면 불교에서 사성제가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땅위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큰 발자국 안으로 들어가듯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도 바로 사성제에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성제는 불교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니원경}에는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습니다.
즉, "옛날의 모든 부처님들은 모두 사성제를 깨쳤고, 사성제를 가르치셨다.
후세의 부처님들도 역시 모두 사성제를 깨치고, 사성제를 가르치실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사성제를 깨닫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깨달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성제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바로 알고 실천하는 것은 연기를 아는 것이며, 연기를 아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니원경}에서는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마땅히 사성제를 배워야 한다고 설합니다. "제자들이여, 불법을 배우려하는 자는 반드시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랜 번뇌 속에서 끝없이 헤매게 되는 것이다. ... 이 괴로움을 알고 그 집착을 끊은 자는 바로 마음의 눈을 얻은 자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사성제를 배워야 하며, 그것을 배우지 못하면 번뇌 속에서 끝없이 헤매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자의 종교적 실천은 곧 사성제에 입각한 실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부처님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들을 만나건 항상 사성제의 교설을 통해 그들에게 맞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서재영(동국대 강사) 자료출처/http://www.buruna.org
'한줄기의 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성제 : 四聖諦 4 (0) | 2010.12.25 |
---|---|
사성제 : 四聖諦 3 (0) | 2010.12.25 |
사성제 : 사성제(四聖諦) 1 (0) | 2010.12.25 |
사성제(四聖諦)를 생각하며 (0) | 2010.12.25 |
사성제 수행의 길 - 맹구우목(盲龜遇木) (0) | 2010.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