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의 향

사성제 : 四聖諦 4

맑은 샘물 2010. 12. 25. 15:21

 사성제 : 四聖諦 4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미운 이와 만나는 고통-사성제4***




증일아함경 권17 사제품에 따르면 "세상에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 것(死)은 괴로움이다.
미운 이와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의 양태를 여덟 가지로 나누고 있는 내용입니다.
생노병사와 같은 네 가지 고통은 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육신을 가진 존재가 겪는 보편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느끼는 고통에 속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의 개체가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므로 부처님은 '오취온(五取蘊)은 그 자체로 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이 생노병사에 네 가지 고통을 더한 것을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1.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법구경}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만남', '미움과 이별'이 짝을 이룬다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이 배열이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밉고 보기 싫어도 만나야 하고, 귀찮고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역설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애별리고는 사랑을 인연(因緣)으로 생긴 아픔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이 슬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별의 씨앗은 사랑이 심은 것이며 사랑과 이별은 둘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별이 아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별리고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물리적인 이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버리면 그것은 이별이고 아픔입니다.
따라서 애별리고는 사랑하는 대상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의 소멸일 때가 더 많습니다.
몸도 무상하고 마음도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이란 없습니다.
그것을 바로 깨닫는 것이 애별리고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별리고를 안다면 헤어져도 원수가 되거나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사랑할지라도 헤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도리를 깨닫는다면 떠나간 것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애별리고가 비극적인 사랑의 이별만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발상을 전환한다면 애별리고에 대한 자각은 현재의 사랑을 소중히 가꾸는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만남은 헤어지게 되어 있는 것[會者定離]이라면 사랑하고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충실할 줄 알아야 하며,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그 자체를 향유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미운 사람과는 또 만나야 하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따라서 미운 사람을 보더라도 '왜 내게 이런 불행이!'라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게 사람 사는 이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해의 바다에 넘실대는 고통들 속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미운 사람도 본래 미운 사람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 속에서 미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할 만큼 넘쳐나는 것이 이별인데 미운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은 그 만남이 나의 필요에 의한 것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는 원증회고를 안다면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원증회고는 분노하고 미워하고 원수진 마음으로 인해 생긴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마음 속에 미움이 없다면, 내게 원수진 사람이 없다면 어떤 만남도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원증회고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원수와 만나야 하는 현실의 고통을 말하는 그 이면에는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으로 헤어지면 끝이라는 식으로 이별을 만들지 말라는 역설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만약 내 마음에 증오와 미움,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를 가든 나는 미운 사람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미운 사람과 헤어져도 내 마음은 또 다른 미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 미움을 표현할 대상을 찾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 속에 미움과 증오 자체를 버리는 것이 바로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을 치유하는 길입니다.
원수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분노와 미움을 다스리는 것이 원증회고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마음에 분노와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미운 사람과 만나지 않아도 나는 늘 원수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마음으로 느끼는 세 번째 고통은 바로 얻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자본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이 바로 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사회적 관계와 담론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나의 물질의 빈곤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이 같은 가치인식과 사회적 담론은 내게 끝없이 소유하고 소비할 것을 교육합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담론은 끝없이 나의 물질적 빈곤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나는 소비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물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늘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런 점에서 구부득고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화되고 부각된 고통입니다.
구부득고는 얻지 못하는 고통이 가득하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얻지 못해서 느끼는 고통은 바로 얻고자 하는 욕망을 인연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욕망이 있기 때문에 구부득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게 욕망이 없다면 구부득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부득고를 가난과 기아와 같은 현실적이고 실체적인 빈곤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부득고는 상품이 넘쳐나고 물질적 풍요가 넘실거리는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더 강하게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부득고는 실체적인 고의 측면보다 내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갖고자 하는 욕망이 빚어낸 고통입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얻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 괴로움이고 얻고자 하는 것이 없으면 그대로 즐거움이다
(有求皆苦 無求乃樂)."
라고 했습니다.
얻지 못해서 느끼는 고통은 얻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의 실천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4. 치성한 오음의 활동은 그대로가 괴로움이다(五陰盛苦)


여덟 가지 고통 가운데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생노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와 같은 모든 고통을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육신을 가진 존재가 겪는 보편적인 고통인 생노병사와 내면적 분노나 욕망에 따라 생기는 세 가지 고통을 통틀어서 한마디로 오음성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육신을 지탱해 가는 이 오음(五陰)의 왕성한 활동 자체가 그대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음성고는 어떤 특정한 고통이 아니라 인간고의 총체적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음(五陰)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하나의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 다섯 가지 요소들이 왕성하게 활동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일곱 가지 고통의 유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삶은 결국 오음의 개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오음성고라고 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상(無常)한 육신을 지탱해야 하는 것이며, 인연(因緣)으로 모인 사대(四大)가 흩어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은 끝없이 힘들고 괴로운 과정의 연속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음성고란 "먹고살기 힘들다!"와 같은 개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음성고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음성고는 정신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오음성고는 우리의 육신을 영원한 것, 늘 아름다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만약 무아를 깨닫는다면 이런 고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 보살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모든 고통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났다(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라고 설합니다. 오온이 공한 줄 안다면 오온의 늙음에 대해, 오온의 빛깔과 생김새에 대해 절망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절대적 현실처럼 느껴지는 육신과 삶의 고통은 가벼워집니다.
오음이 활동하고, 쇠퇴하고, 사라져 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인데도 인간만이 이를 고통이라고 절규하기 때문입니다.


서재영(동국대 강사)  자료출처/www.buruna.org

'한줄기의 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성제 : 四聖諦 6   (0) 2010.12.25
사성제 : 四聖諦 5  (0) 2010.12.25
사성제 : 四聖諦 3  (0) 2010.12.25
사성제 : 四聖諦 2   (0) 2010.12.25
사성제 : 사성제(四聖諦) 1   (0) 201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