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의 향

사성제 : 四聖諦 5

맑은 샘물 2010. 12. 25. 15:21

사성제 : 四聖諦 5




***쇠사슬보다 강한 집착의 속박-사성제 5***

1. 고통의 씨앗을 키우는 집착

우리에게 고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처럼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통은 나와 아무 상관없이 밖에서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바로 나로 인해 있고 고통의 씨앗은 내 속에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반니원경]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은 번뇌의 망집(妄執)” 이라며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잘못된 집착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의 두 번째 명제인 집(集)입니다. ‘집(集)’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모으다’라는 뜻을 나타내지만 사성제에서 집(集)은 ‘결합하여 발생한다’라는 ‘집기(集起)’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집(集)을 나타내는 범어는 ‘sam-udaya'인데 이는 ’결합하다(sam-)'와 ‘상승하다(udaya)'라는 의미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집이란 “무명(無明)으로 연(緣)하여 생사가 있다”라는 연기설과 같이 인간의 고통은 잘못된 집착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고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불청객 같은 존재가 아니라 내 자신이 발아시킨 씨앗에 의해 초래된 것입니다. [숫타니파타]는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을 살피어 그 씨를 헤아려 알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기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생(生)을 멸해 구경(究竟)을 본 성인이다.”라고 설합니다.
이처럼 집(集)은 연기와 서로 상통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두 번 째 성제(聖諦)는 괴로움도 연기(緣起) 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괴로움은 집착으로 인해 있으며, 그 집착을 내려놓을 때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연기적 관계성을 설하고 있습니다.


2. 집착이 있는 곳에 악마가 있다

[전법륜경]에 따르면 사람이 집착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과정에 대해
 “무엇을 괴로움의 집(集)이라 하느냐. 말하자면 애욕을 쫓기 때문에 거기에서 즐기는 성품이 생겨 모든 곳에 탐심을 여의지 못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욕심에의 집착, 물질에의 집착, 물질 아닌 것에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이 쌓여 괴로움이 되는 것이니라.”라고 설합니다.
 애욕이라는 고통의 씨앗에 집착하면 그것을 즐기는 성품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다른 모든 대상에 대해서도 탐심을 내게 되고, 이 같은 탐심들이 쌓여서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숫타니파타]는 “세상에 있는 어느 것에라도 집착하면, 그것 때문에 악마가 따라 다니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수행자는 바르게 알고 명심해서, 세상에 있는 어느 것에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대상을 향한 마음이 집착의 정도로 발전하면 그것은 고통이 되기 때문에 집착이 있는 곳에 악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집착을 악마에 비유한 이유는 집착은 인간을 고통으로 얽어매는 속박의 사슬이기 때문입니다.
[법구경]은 “현명한 이는 쇠붙이나 나무나 섬유로 만든 사슬(속박)이 강하다고 하지 않는다. 보석으로 만든 귀고리, 사랑하는 아들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다고 한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쇠사슬 보다 더 질기고 강하게 인간을 속박하는 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집착, 애정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집착할 때 그곳에 악마가 있고 고통의 속박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착은 고통의 원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집착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수행본기경] <출가품>에는 “나는 세간의 탐냄과 애욕에 집착한 나머지 나고 죽는 고통에 떨어지면서 본래가 열두 가지 인연[十二因緣] 으로부터 일어난 것인 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었구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세간에 대한 탐욕과 애욕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고 죽는 윤회에 빠져서 연기법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법(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집착을 먼저 버려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상응부 경전에 따르면 “나와 나의 것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 다고 보아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생한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집착을 버리고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할 때 지혜가 생기고 참다운 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내가 소유한 것[我所]에 대한 집착

집착의 대상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내가 가진 물질적 소유에서 비롯되는 집착입니다.
물질적 소유가 집착을 유발한다는 점 때문에 초기 경전에는 “자녀가 있는 자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근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즉 [숫타니파타]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참으로 사람이 집착하는 근본은 근심이니라. 집착이 없는 이는 근심할 것도 없느니라.”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자동차, 귀금속, 아파트,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근심하고 있고, 갖지 못한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이미 고찰해 보았듯이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인연 따라 흘러가는 물질적 대상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데서 고통이 생기고 속박이 초래됩니다.
[숫타니파타]는 “사람들은 내 것이라고 집착한 물건 때문에 근심한다. 자기가 소유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것은 모두 변하고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집에 머물러 있지 말아라.”라고 설합니다.
근심과 걱정을 없애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물질적 소유와 그것에 대한 집착은 고통의 사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마선사는 ‘구함이 없는 실천’이라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을 가르치고, 혜능선사는 ‘욕심을 줄이고 만족을 알라’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을 가르칩니다.
작게 갖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은 바로 집착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길임을 선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4. 오온(五蘊)과 견해에 대한 집착

집착은 내가 가진 물질적 대상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집착에 대해 좀더 탐구해 가면 그곳에는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이 존재합니다.
즉 집착은 ‘나[我]’와 ‘나의 것[我所]'에 대한 집착으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은 내가 소유한 물질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 이미 고찰한 바입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집착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집착할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따라서 물질적 무소유만 실천하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영원한 해탈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아무것도 갖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육신에 대한 집착, 자기 자신의 인식에 대한 집착이 존재한다면 여전히 집착의 불길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잡아함경 7권에는 “비구들이여, 색(色)이 있기에, 색에 집착함으로써, 색을 탐냄으로써 아견(我見)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수(受)가 있기에, 상(想)이 있기에, 행(行)이 있기에, 식(識)이 있기에, 이들에 집착하고 이들을 탐함으로써 아견은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바로 색수상행식이라는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인 육신의 집착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나라는 생각’ 즉 아견(我見)을 유발하고 자아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낳습니다.
여기서 주의주장과 이데올로기, 대의 명분과 종교적 진리와 같은 정신적 집착의 대상이 성립됩니다.
[금강경]은 이 같은 아상(我相)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는 가르침입니다.
반니원경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허망하게 집착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도를 지니기 위해서 망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너희들은 바르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승가를 생각하고 계를 생각하고 길이 근심과 번뇌를 여의는 게 좋다.”라고 설합니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삼보(三寶)를 생각하고 계(戒)를 지킴으로써 집착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착을 버리는 것이란 삼보를 올바로 받들고 계율을 통해 행동을 절제하는 것임을 설하고 있습니다.


-서재영(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 www.burun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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