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 四聖諦 6
***집착과 괴로움의 소멸[滅]-사성제6***
1. 삶의 전환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고통은 집착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설명한 사성제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설사 이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만을 부각한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고와 집착을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삶을 올바로 관조함으로써 고통의 현실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중생들의 삶이란 고와 집착이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 악순환의
과정입니다.
부처님은 이 같은 중생의 세계를 올바로 통찰하시고 고(苦)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성제의 세 번째 명제인 ‘멸(滅;nirodha)’입니다.
따라서 멸이란 고와 집착이 반복되는 중생의 삶에서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향하는 삶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성제는 고통과 집착이 소멸되고 열반으로 갈 수
있는 올바른 실천이라는 선순환의 삶으로 중생들을 인도합니다.
괴로움과 그 괴로움을 유발한 것이 집착 때문이라는 내용만 보면
불교는 염세적 종교 같고 중생들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멸성제와 도성제라는 진리에 이르면 불교는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여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갈애를 없애는 것이 멸(滅)
잡아함 『전법륜경』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고통이 모두
사라진다는 성스러운 진리는 이와 같다.
갈애(渴愛)를 남김없이 떨쳐 없애고, 버리고, 뿌리치고, 해탈해서
집착 없음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멸이란 욕망의 대상을 향한 인간의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진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그러한 경지야말로 이상적인
열반(涅槃)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욕망에 물든 마음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들의 마음은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애가 사라진 경지를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결국 갈애에 물들지 않는 가볍고 자유로운 마음이 바로
멸(滅)이자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제거하려면 먼저 고통을 유발한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고통이란 바로 갈애(渴愛)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갈애를 모두 사라지게 할 때 고(苦)도 사라진다는 것이 사성제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사성제가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한 교설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즉 고통과 해탈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원인에 따라 나타난
결과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반면에 집착으로부터의
해탈은 참다운 종교적 실천을 통해 가능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의 교설은 사성제를 통해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가를 설하고 있습니다.
3. 멸(滅)은 삼독의 번뇌를 제거하는 실천
『전법륜경』에 따르면 “무엇을 괴로움의 없어짐[滅]이라 하느냐. 집착으로부터 탐욕과 음욕이 일어나는 것이니, 집착을 남김없이 버려 탐욕과 음욕을 모두 여의면 다시 고요함조차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쌓임의 없어짐이라
하느니라.”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집착으로 인해 탐욕과 음욕의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탐욕과 음욕의 불길은 집착이라는 연기적 관계성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탐욕과 음욕의 불길을 일으킨 집착을 없앤다면 자연히
탐욕과 음욕도 사라지고, 그것으로 발생한 고통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함경에 따르면 갈애의 소멸에 대해 ‘탐내고[貪]’,
‘분노하고[瞋]’, ‘어리석음[癡]’이라는 삼독심(三毒心)의
소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잡아함』 卷18에 따르면 “열반이란 탐욕(貪慾)이
영원히 사라지고(永盡), 분노(瞋?)가 영원히 사라지고,
어리석음이(痴暗)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니, 일체의 번뇌가 영원히
사라진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성제 가운데 멸성제(滅聖諦)가 제시됨으로써
불교는 고통의 소멸과 그 소멸로 인도하는 방법을 설하는 종교가
됩니다.
4. 고의 소멸로 가는 실천[道]
잡아함 『신서림경(申恕林經)』에 따르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
코삼비의 신서파 숲에서 나뭇잎을 한 움큼 따 손에 들고 비구들에게
손에 있는 나뭇잎과 숲에 있는 나뭇잎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은지
물으셨습니다.
물론 비구들은 숲 속에 있는 나무에 달린 잎들이 더 많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자신이 설한 교법보다 설하지 않은 교법이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즉,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깨달아 알고[證智] 있으나
너희들에게 설법하지 않은 것이 많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말하지 않고
있겠는가.
그것은 너희들에게 소용이 없고 범행(梵行)에 크게
도움이 안 될뿐더러 염리(厭離), 이탐(離貪), 멸진(滅盡),
적정(寂靜), 증지(證智), 등각(等覺), 열반(涅槃)에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불교란 단지 진리를 설하는데 초점이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교법보다 더 많은 교법이 있다는 것은 부처님은
모든 교법을 일일이 다 설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 교학적으로 설명하는 교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이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만을 얻기 위해 몰두하는 것은 열반과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서나뭇잎의 비유를 통해 부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은
결국 아는 것에 머물지 말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유발한 것이 집착이었다면 해탈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바로 올바른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체적 실천의 방향을 지시하는 도성제(道聖諦)가 성립됩니다.
서재영(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 www.buruna.org)
'한줄기의 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님 팔상성도2 : 비람강생상 (0) | 2010.12.25 |
---|---|
부처님 팔상성도1 : 도솔래의상 (0) | 2010.12.25 |
사성제 : 四聖諦 5 (0) | 2010.12.25 |
사성제 : 四聖諦 4 (0) | 2010.12.25 |
사성제 : 四聖諦 3 (0) | 2010.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