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해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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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꽃
황룡사에서 어른 걸음으로 시오리를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무문관이 나옵니다. 이 곳은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마지막 정진을 하는 곳입니다.
*무문관이란 들어가는 문도 나오는 문도 없다는 뜻이지만 오래전부터 무문관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스님들의 발길이 끊어져 무문관은 가시덤불 속에서 잊혀져 갔던 것입니다.
왜 스님들은 무문관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무문관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무는 신기하게도 무문관 안에 들어간 스님이 *해탈을 하면 축하라도 하듯 꽃송이를 피워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거짓 깨우침 " 으로 남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황룡사 스님들은 이 나무를 해탈나무라고 이름짓고 여기서 피는 꽃을 해탈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해탈나무에 해탈꽃이 핀 것을 본 사람은 지금 여든이 넘으신 황룡사의 *조실 스님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실 스님의
뒤를 이을 스님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 아 큰일이다. 속세가 혼탁해지니 도를 구하려고 하는 자도 줄고 중생을
이끌어갈 큰 스님은 더 더욱 찾기 힘들구나. "
조실 스님의 하루 일과는 매일 아침마다 무문관 앞에 나가 시들어빠진 해탈나무를 시름없이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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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황룡사 주변에 큰 비가 내렸습니다. 갑작스런 홍수가 나자 절 가까운 곳에 살던 짐승들은 춥고 먹을 것이 떨어져 황룡사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징그럽고 무서운 뱀이나 개구리, 두꺼비도 있었습니다.
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산짐승들이 무서워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한 스님이 나타나 갈 곳 없는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말했습니다.
" 부처님은 짐승들도 모두 깨우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비록 너희들이 홍수를 피해 절을 찾아 왔다고는 하나 이를 인연으로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성불하도록 해라. "
" 저 스님은 도대체 누구일까 ? "
아무도 그 스님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 제가 알아요. "
부엌에서 일하는 행자가 말했습니다.
" 그 스님은 한 일년 전쯤에 우리 절에 오셔서 부엌 옆의 골방에서 혼자 지내시는 분이예요. 무문관에 들어 가시려고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서 당분간 쉬고 계시는 거래요. "
그러고 보니 스님은 행색도 초라했지만 앙상하게 보일정도로 말라 있었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자연도 푸르름을 되찾자 짐승들은 뿔뿔이 제 집을 찾아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두꺼비 한 마리가 혼자 남아 스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두꺼비는 스님과 함께 명상도 하고 심지어 법당까지 쫓아와 예불도 드리곤
했습니다. 스님도 두꺼비가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꺼비
스님이라고 놀려 대도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수행을 할 만큼 몸도 회복이 되어 무문관에 들어가야 되는데 두꺼비가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 입니다. 그 동안 정도 들었지만 스님은
두꺼비와 헤어질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아무도 몰래 행랑을 꾸려 무문관을 향해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두꺼비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 ,
새벽녘 무문관 앞에 당도한 스님은 이제 이곳을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이 기거하던 황룡사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당연히 황룡사에 있어야 할 두꺼비가 발 밑에서 스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꺼비는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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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 이 곳은 죽음을 무릎쓰고 이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통과 싸우는 곳이란다.
내가 이 곳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그러자 두꺼비가 대답했습니다.
" 부처님은 모든 미물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가. 그런데
스님은 혼자만 도를 얻으려고 하십니다. 저에게도 득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
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두꺼비가 말을 하다니. 게다가 두꺼비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때 부터 스님과 두꺼비는 함께 무문관에 들어가 오로지 부처님이 경험하셨던 고행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싸우는 *용맹정진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 .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스님의 몸은 야위어 갔습니다. 그럴수록 스님의 마음은 초조해졌습니다.
"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렸다. 먹고 싶은 것, 자고 싶은 것 그리고
즐기고 싶은 것을 모두 버렸다.
이젠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버릴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반딧불만한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니. "
스님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스님은 두꺼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제는 더 이상 몸이 지탱해 줄 것 같지가 않구나. 나의 수행은 이것으로
끝장인 것 같다. "
" 스님, 용기를 내세요. 이제 한 발짝만 더 가면 스님은 해탈할 수 있어요. "
두꺼비가 안타깝게 말했습니다.
" 아, 나는 지쳤다. 나에게는 한 발짝도 날아갈 힘이 없다. "
" 스님 그러시다면 저를 먹어 버리세요. "
" 너를 ? "
" 왜 징그러우세요. "
" 아니다, 너는 나의 진실한 벗이기 때문이다. "
" 벗을 먹어 버리세요. 진실도 먹어 버리세요. 해탈을 원하시면 해탈도 먹어
버리셔야 합니다. "
" 해탈을 먹는다 ? "
스님은 이 한마디에 불현 듯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손으로 두꺼비를 잡고는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두꺼비의 얼굴이 무서운 마귀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두꺼비를 놓치지 않으려고 두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이번에 두꺼비는 아름다운 여자로 바뀌었습니다. 스님은 두 눈을 꼭 감고
입을 더욱 크게 벌렸습니다. 그러자 두꺼비는 다시 부처님의 모습으로 변신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마음은 이미 금강석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 그렇다. 부처를 원하면 부처를 먹어야 한다. "
스님은 한껏 입을 벌려 부처님으로 변한 두꺼비의 머리를 꽉 깨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두꺼비는 *감로수 병으로 변해 스님의 목에 감미로운 감로수를 콸콸 쏟아
부었습니다. 감로수를 마시자 스님의 몸은 마치 동해 바다에 햇님이 불쑥
솟아오르는 듯한 힘이 넘쳤으며, 햇빛이 세상을 골고루 비추어주듯 지혜가
가득해졌습니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해탈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그날 밤 황룡사의 조실 스님은 천둥 번개에 잠이 깨었습니다.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이 들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은 수십 년 전 피어났던 해탈꽃의 꽃내음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었습니다. *
□ 찾아보기 □
* 구 도 : 께닫고자 노력하는 것.
* 감로수 : 부처님이 계신 곳에 있는 맑고 깨끗한 물.
* 무문관 : 들어 가는 문도 나오는 문도 없다는 뜻.
스님들이 마지막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곳.
무문관(無門關)-해설 참조
* 번 뇌 : (번뇌:煩惱)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움, 고뇌(苦惱):괴로워하고 번뇌함.
욕망(탐貪), 노여움(진嗔), 어리석음(치癡)으로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모든 망념을 이르는 말.
* 용맹정진 :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르고 훌륭하다는 것을 믿고 힘써 노력하는 것.
* 조실스님 : 선(禪)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진 스님.
원래는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의미.
* 해 탈 : 여러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 해 설 □
* 무문관(無門關) : 무문관에서 깨달음을 얻고 벽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곧 자신의 거짓된 껍질을
완전히 부수어 내외가 명철해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을 단순화하여 오롯이 일념으로 화두의심만 챙기는 것이니 최소한의 생활로
선정삼매를 추구하게 됩니다.
사방이 막힌 무명 속에서 생사일여의 활로를 찾는 과정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중생들이 살아가는 시방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무문관입니다.
* 무문관수행(면벽수행:面壁修行)
겨우 한 사람이 기거할 만한 공간,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몇 년이고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다.
독방은 가로 한칸, 세로 두칸 크기의 좁은 공간이다. 수세식 좌변기와 간이 샤워기가 설치돼 있고
상하기 쉬운 음식물을 넣어둘 수 있는 작은 냉장고도 한 대 있다. 매일 오전 11시 방마다 유일하게
외부와 통하는 작은 공양구(供養口)가 열리고 시봉을 맡은 스님이 음식을 넣어준다.
이처럼 4면이 벽인 방안에서 문을 자물쇠로 걸고 최소 3개월부터 3년 동안 벽을 보고 정좌한 다음
참선하는 면벽참선하는 것을 무문관(無門關) 수행이라 한다.
(사람은 오감중 시각에 가장 크게 의존을 하는데, 면벽수행을 하면 시야가 모두 벽이기 때문에
가장 비중이 큰 시각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집중에 방해가 덜 된다고 한다.)
* 무문관 명칭
송나라 무문혜개 선사가 지은 책 이름을 딴 것이다.
무문관은 조사들의 선문답 중에서 공안 48칙(則)을 뽑아 수록한 선어록, 조주 스님에게 한 학인이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 " 하고 묻자, " 없다 (無) " 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무자 공안에서
책의 제목이 유래했다. 오로지 알 수 없는 "무(無)" 를 참구한다는 점에서 무문관 수행은
간화선 수행의 꽃이라 할 만하다.
* 무문관 수행의 유래
문을 닫아 걸고 정진하는 " 폐문 정진(閉門精進) " 법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달마 대사의 면벽 9년이 시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규봉종밀 선사는 "도서(都序)" 에서 달마선법인
"벽관(檗觀)" 을 " 밖으로 모든 인연을 멈추고 안으로 마음이 조급하지 않아서 마음이 장벽과
같으면 도에 들 수 있다. " 설명하고 있다.
"면벽하여 마음을 본다" 는 의미에서 "면벽관심(面壁觀心)" 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 달마 대사의
"면벽선"은 마음을 장벽과 같이 요지부동한 상태에서 도와 하나되는 선 수행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훗날 조주, 고봉 스님 등이 죽기를 각오하고 정진했다는 "사관(死關)" 도 무문관 수행의 일종이
었다.
한말 경허 스님이 동학사에서 폐문 수행하고, 일제시대 효봉 스님이 금강산 신계사 선방에서 3년간
두문불출하며 정진한 것도 무문관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문관"이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64년 도봉산 천축사에서 주지 정영 스님
(현재 대자암 조실 스님)이 "무문관" 이라는 참선수행도량을 세우면서 부터다.
- 출처 : buddhapi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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