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한이 된 불목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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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한이 된 불목하니
지금은 사라진 어느 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절의 이름은 청룡사라고 했습니다. 이 절에는 불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알려진 나한상이 있었습니다.
나한상은 볼품없이 못생기고 초라했습니다.
정말 누가 조각을 해 놓았는지 얼굴은 일그러졌으며 등은 구부정한 데다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 흉측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건 이 나한상은 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그러진 표정 뒤에는 수줍음, 겸손함, 바보스러울 정도의 천진난만함까지도 숨어 있었습니다.
" 도대체 이 조각품은 누가 만들었을까 ? "
모두 궁금하기만 할 뿐 선뜻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룡사가 창건되었을 때 함께 제작되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청룡사가 한 번 불에 탄 뒤 중건되었을 때 만들어졌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청룡사에서 나한상의 유래를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분은 스님들의 요사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별채에 혼자 기거하시는
노스님이었습니다.
용봉스님, 한 때는 *득도했다고 수행자들에게 추앙을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청룡사로 구름같이 몰려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 안에서조차 스님의 법명은 커녕 살아 계신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스님은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의 법랍(출가 이후의 나이)이 이미 백 세를 넘기셨으니까요.
그런 스님이었지만 시중을 드는 *시봉 스님의 말에 따르면 일 년에 몇
차례는 나들이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나들이라고 해야 법당에 나타나시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상한 것은 꼭 나한상을 향해 꼿꼿이 몇 시간 앉았다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시봉 스님은 이 때 노스님의 얼굴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야릇한
표정이 되며, 마치 *나한과 대화라도 하는 듯 중얼거리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나한상은 이 절의 명물이었습니다.
신도들 역시 나한상 앞에 와서 복을 빌고 기원을 했습니다. 나한상은 신통력이 있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풀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용봉 스님은 더 이상 기력이 없어 법당에까지 나갈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시봉을 불러 그가 하는 말을 받아적게 했습니다.
죽음을 예견한 노스님의 일종의 유언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스님의 유언은 며칠씩 계속되는 이야기 형식이었습니다. 넔두리인
것도 같았지만 이야기는 너무나 진지했고 또 재미있기도 해서 시봉 스님은
지루한지도 모르고 며칠을 노스님과 같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시봉 스님은 곧 대중에 돌아와서 많은 스님들을 모아놓고 노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사진입력15-1
용봉스님이 불교에 입문하기 위해 출가한 것은 혈기왕성한 스므 살 때였더
랍니다. 그는 세속에서도 야심 많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출가를
해서도 밤을 낮을 삼아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용맹정진을 따르지 못하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의 학문의 깊이와 법력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들 그를 존경하고 얼마가지 않아 그가 해탈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온 나라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선지식을 배우기 위해 *학승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청룡사는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연일 붐볐습니다.
그러나 그런 용봉스님에게도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같은 절에서 일하는 불목하니였습니다. 불목하니란 절에서 땔나무
나 해 오고 물을 길어다 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인의 추앙을 받는 스님이 어째서 하찮은 일을 하는 불목하니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을까요 ?
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일생을 걸고 우정을 나누기로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점차 성장해 가면서 때론 서로 돕고 의지했지만 언제부터인지
경쟁 상대가 되어 상대방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용봉스님쪽이 강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면에서 친구가 항상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친구는 마음씨도 너그러워 자신의 일
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도와줌으로써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샀습니다.
어떤 계기였는지 두 사람은 우연치 않게 함께 출가를 했습니다.
위로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말입니다.
*은사 스님은 똑똑하고 성실한 두 사람에게 몹시 흡족해 하면서 용봉과
성진이라는 법명을 각각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절에 들어온 이후 용봉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져 갔습니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성진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 속세에서도 항상 뒤졌는데 절에서 까지 이기지 못하면 나는 영원한
패배자다. "
그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행자 생활이 끝나고 이제 막 스님이 되었을 때 마침 절에 있던 늙은 불목하니가 병이 드는 바람에
궂은 일을 할만한 사람이 한 명 필요했습니다.
" 자 너희들 중 한 사람이 당분간만이라도 나무를 해오고 물을 긷는 힘든
일을 해 주어야겠다. "
*주지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용봉은 얼른 성진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선뜻 '제가 하겠습니다.' 고 나섰을 때 쾌재를 불렀습니다.
친구가 일을 하는 동안에 자신은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이 때야말로 그를 앞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용봉은 성진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 나는 이 절을 떠나겠다. 그리고 *해탈을 하지 않으면 다시는 이 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너도 저 불목하니의 병이 낳아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면 정진
을 할 수 있을 것이니 나와 함께 누가 먼저 해탈을 할 것인지 내기를 하자."
그리고는 친구의 대답도 듣기도 전에 청룡사를 훌쩍 떠났습니다.
친구는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습니다.
용봉은 전국의 유명한 고승들과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학문을 익혔습니다. 잠이 오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질 때 그는 친구를
머리 속에 그리며 자신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성진은 조금 늦게 공부를
시작하더라도 능히 그를 따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가 강원(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곳)의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경전 해석과 강의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선도 게을리하지 않아 깊은 산 속에 있는 유명한 선방(스님들이 참선
을 하는 곳)을 찾아 다니며 수행을 했습니다.
그가 해탈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산의 메아리처럼 퍼져 갔습니다.
그가 고향이나 다름없는 청룡사로 돌아올 때는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그
를 호위라도 하듯 감싸고 뒤쫓아왔습니다.
십여 년 만에 금의환향한 그를 절에서도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는 만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으로 옛 생각을 하며 경내를 한 바퀴 산책
했습니다. 용봉은 친구 생각도 했습니다.
" 녀석은 지금 어디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까 ? 수행이 힘들어서 포기하고
속세로 다시 돌아갔을지도 몰라, 어쨌든 우리가 처음 약속한 것은 해탈하
기 전에는 이 절에 돌아오지 않기로 했었으니 그가 안 보이는 걸로 봐서
내가 이긴 셈이지, 하하하 ...... , "
이런 승리의 만족감에 젖어 있을 때 산비탈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불목하니
가 땔나무를 한짐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용봉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졌습니다. 불목하니는 다름아닌 십여 년 전
자신과 헤어진 성진이었던 것입니다.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 땀에 절어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 아 자네가 온다고 소식은 들었네만 ...... , "
그림 15-2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으며 그를 반가이 맞는 친구의 모습은 십년 전 총명
했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무식하고 바보스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용봉은 이런 녀석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지금까지 아둥바둥 노력을 해 온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용봉스님의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든 스님들로 청룡사는 늘 북적댔습니다. 내노라하는 학승들은 자신들의 명석함을 뽐내기 위해 밤늦도록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용봉스님을 찾아가 높은 선지식의 명쾌한 답변을 들었습니다.
신도들도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용봉스님의 법문이라도 있는 날은
법당은 물론이고 경내에 까지 사람들이 들어차 스님의 목소리, 스님의 얼굴
이라도 보기 위해 아우성 쳤습니다.
이렇게 절이 연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자 용봉스님의 얼굴에선 늘 웃음
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헠에서 일하는 행자나 불목하니에게는 고달픈 나날이
었습니다. 용봉스님이 오기 전보다 일이 몇 배나 더 늘었으니 까요.
용봉의 친구 성진이 불목하니 노릇을 한 지도 어느 덧 십 년이 넘었지만
요즘처럼 일이 많은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용봉과 함께 절에 들어왔을 때 불목하니가 병이 들어 잠깐만 대신 일을
해 주면 되겠지 하고 시작한 것이 벌써 십 년이라니 ...... ,
성진은 그 동안 경전 공부나 참선은 커녕 승복도 제대로 입어 보지 못한 채
오로지 땔나무하는 일만을 해왔던 것입니다. 지금은 절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조차 그가 과거에 해탈을 위해 불가에 입문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오
로지 절에서 제일 하찮은 일이나 하는 하인처럼 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진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맡은 일만을 열심히 했습니다.
요즘에는 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그의 일감이 크게 늘고, 갓 계를 받은
스님들까지도 그에게 반말로 잔소리를 할 때가 있었지만 그는 바보같이
허허 웃으면서 바쁜 생활을 견뎌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탈에 이르는 길이 반드시 경전이나 참선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전 공부는 이론에 빠져 본질을 잊게 하고, 참선은
자칫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그는 땀흘려 일하고 홀로 명상에 잠겨 부처님을
생각할 수 있는 불목하니가 좋았습니다.
또 한 가지 그의 수행에 큰 위안을 주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조각 솜씨
였습니다. 그는 산에서 나무를 해 오면서 조각하기에 좋은 나무를 골라 놓았다가 시간이 나면 틈틈이
무엇인가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가장 많이 만들고
또 만들기 좋아하는 것은 나한상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었다고 하는 나한의 모습을 조각하면서 성진은 자신도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가 되겠다고 늘 다짐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갈고 닦은 그의 조각 솜씨는 적어도 절 안은 물론 밖에까지 알려져
그가 조각한 불상이나 나한상을 집에 가져다 모셔 놓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라도 그에게 작품을 달라고 하면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한편 용봉은 득도 후 자신이 이 곳에 처음 와서 성진을 본 뒤로 한번도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이젠 경쟁 상대가 아닐 뿐더러 서로 다른 처지에 있으니
만날 필요가 없다고 용봉은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 제까짓게 이 곳이 아니면 어디에서 밥이라도 빌어먹을 수 있을까 ? "
라며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청룡사의 주지 스님은 성진과 용봉을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진의 거친 손과 용봉의 고운 손을 함께 잡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세상에 이름만큼 허망한 것이 없다. 이름은 불길에 던져지는 티끌과 같은
것이니 부디 이름을 구하지 말고 도를 구하라. "
이것은 두 사람에게 주지 스님이 마지막 남기신 유언이었습니다.
절은 슬픔 속에 잠겼습니다. 하루빨리 이 절을 이끌어 나갈 스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한목소리로 용봉스님을 주지 스님으로 추대
했습니다. 온 세상을 얻은 듯 용봉스님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습니다.
" 아 이제 나는 출가 당시의 모든 꿈을 이루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오로지 이 청룡사를 전국에서 제일 크고 웅장한
절로 만드는 것이다.
수천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원, 수만 명의 신도들이 법문을 들을 수 있는 법당을 짓겠다.
그 법당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처님과 오백 나한상을 모시겠다. 그리고는 이 절의 이름을 용봉사로
바꾸어야지. 그래야 내 이름이 후세에 널리널리 알려질 것이 아닌가.
하하하 ...... , "
은사의 유언은 아랑곳없이 용봉스님의 야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용봉스님은 역사적인 대불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신도들에게 시주를
걷는 한편 건축가, 화가, 조각가 등을 모집했습니다.
정말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절에서는 이제 경전을 읽고, 참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
대신 뚝닥거리는 소리와 작업장 인부들의 고함 소리로 뒤덮혔습니다.
불목하니 성진과 행자들은 그들의 밥시중을 드느라고 눈코 뜰새없이
바빴습니다.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학승과 *선승들은 하나둘 절을 떠나갔습니다. 불사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성진은 용봉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친구
로서 충고를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늦게 용봉을 찾아간 성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보게 지금 절 안에서는 자네에 대해 나쁜 애기가 나오고 있네, 공부
하는 절을 개인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공사장으로 만들었다고
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불사의 규모를 줄이게. "
그러나 용봉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습니다.
" 자네가 나를 질투하는구먼, 공사가 끝나면 보자구. 아마 이 절은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절이 되어 있을 테니. "
" 제행무상이 아닌가, 어차피 우주의 *삼라만상이 티끌과도 같은데 그깐
법당이 대수인가. "
" 불목하니 주제에 나를 충고하려 들다니,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추앙받는
용봉이야, 이제 자네 따위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네. "
성진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설마하니 오랜 친구인 용봉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성진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를 위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한 마디 남기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 자네가 짓는 법당에 내가 만든 나한상을 기증하고 싶네. "
그러자 용봉은 큰 소리로 웃더니 성진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 이 절은 세계 최고의 절이어야만 하네, 자네 솜씨가 좋다고 하니까 여기
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건 큰 오산일세, 글쎄 자네가 정 그렇게
섭섭하면 오백 나한상 중에 하나 정도는 내가 배려해 줄 수 있지만
말이야, 하하하. "
그런 가운데서도 공사는 그럭저럭 진전되어 법당이 완성되고 그곳의 부처님과 오백 나한상들도 모두 들어앉았습니다.
물론 그 중에 한 나한상은 성진스님이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만든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성진스님이 만든 나한상이 조각가가 만든 것보다 더 훌륭하
다고 칭찬들이 대단했습니다.
용봉스님은 불쾌했지만 자신이 약속한 일이기 때문에 성진의 나한상을
물리치지 못한 채 오백 나한상 중에 제일 안 보이는 뒤쪽에 갖다 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든 불사가 끝나고 내일이면 장안의 대덕 스님들을 모시고 준공식을
갖는 날입니다. 용봉스님도 성진도 그리고 모든 절식구들과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몰려온 신도들도 잠을 못이루고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누군가
" 불이야 ! "
라고 외치며 법당쪽에서 뛰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설마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갑자기 밖이 대낮같이
환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뛰쳐나갔습니다.
아 이럴수가 !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의 법당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림 15-3
용봉스님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쓰러질 듯 비틀거렸
습니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지붕까지 옮겨 붙어 아름다운 *단청이 불꽃 속에 너울
거렸습니다. 값비싼 금박의 불상도 오백 나한상도 불꽃 속에 사라져갔
습니다.
용봉스님은 그제야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온 화려한 명성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이야. "
어디선가 커다란 외침이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거대한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 불목하니다 ! "
사람들이 동시에 이렇게 외치고 있을 때는 그의 몸이 벌써 화마 속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쥔 채 불길이 사그라질 때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법당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재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재가 된 법당을 향해 발길을 옮겼습니다.
몇 발자국 거리를 좁혀 가던 사람들의 발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
습니다. 몇몇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끊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바라보는 곳에 유일하게 재가 되지 않은 나한상이 하나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목하니였던 성진이 만든 나한상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성진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뜨거운 불길에도 이
나한상은 온화하고 인자한 기품과 바보스러운 친근감을 잃지 않고 있었
습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이 다시 태어나신 듯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곳에는 용봉스님도 있었습니다. 용봉스님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평생을
그 방에서 벗어나지 않고 청중들 앞에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단지 일 년에 단 하루, 화재가 났던 날만은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 작은
법당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
□ 찾아보기 □
* 나 한 : 아라한의 준말로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은 성자.
* 단 청 : 전통 양식의 건축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린 그림이나 무늬.
* 득 도 : 세상의 이치를 바로 알아 깨닫는 것.
* 불 사 : 1,부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2,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고 경전을 만드는 것 등 불교에서 하는 모든 일.
* 삼라만상 : 우주 속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
* 선 승 : 참선을 하는 승려.
* 선지식 :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 사람들을 교화하는 덕 높은 사람.
* 시 봉 : 스승이나 부모를 모시고 받드는 것.
* 용맹정진 :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르고 훌륭하다는 것을 믿고 힘써 노력하는 것.
* 은 사 : 자기를 출가시켜 길러 주고 가르쳐준 스님.
* 죽 비 : 불교에서 쓰는 도구의 하나로 약 50cm쯤 되는 대나무 가운데를 2/3정도 갈라서
만든 자루. 이것을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여러 행동을 서로 맞춘다.
* 주 지 : 절에서 그 재산과 부처님의 가르침 및 스님들을 보호, 유지하며 책임지는 스님.
* 학 승 :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데 힘쓰는 승려.
* 해 탈 : 여러 가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 행 자 : 아직 스님은 아니지만 절에 있으면서 여러 일을 도우며 수행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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