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등불

숫타니파타(Sutta-nipata) / 제3장 대품(大品) 5

맑은 샘물 2012. 10. 10. 02:26

숫타니파타(Sutta-nipata) / 제3장 대품(大品) 5

 

 

 

(713)
그는 바리때를 손에 들고 돌아다니며,
벙어리는 아닌데 벙어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주는 것(施物)이 적다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도 안된다.

 

"Wandering about with his alms-bowl in his hand, considered dumb without being dumb, let him not blush at a little gift, let him not despise the giver.

 

(714)
사문(부처님)은 높고 낮은 여러 가지 도(道)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거듭 피안에 이르는 일은 없으나 한 번에 이르는 일도 없다.

'Various are the practices illustrated by the Samana, they do not go twice to the other shore, this (is) not onc e thought[1].

 

*1. Ukkavaka hi patipada
Samanena pakasita,
Na param digunam yanti,
Na idam ekagunam mutam.

 

(715)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에게는 집착이 없다.
해야 할 선(善)도, 하지 말아야 할 악도 버렸기 때문에
번뇌가 없다."

'For whom there is no desire, for the Bhikkhu who has cut off the stream (of existence) and abandoned all kinds of work, there is no pain.

 

(716)
스승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성자의 길을 말하리라.
음식을 얻을 때에는 면도날의 비유처럼 하여라.
혀를 입천정에 붙이고 배에 대해서는 자제하라.

'I will declare to thee the state of wisdom,'--so said Bhagavat,--'let one  be like the edge of a razor, having struck his palate with his tongue, let him be restrained in (regard to his) stomach.

 

(717)
마음이 침체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쓸데없이 많은 것을 생각해서도 안된다.
비린내가 없이, 걸림이 없이,
청정한 행을 궁극의 의지처로 삼아라.

'Let his mind be free from attachment, let him not think much[2] (about worldly affairs), let him be without defilement, independent, and devoted to a religious life.

 

*2. Na kapi bahu kintaye.

 

(718)
홀로 앉는 일과 사문에게 봉사하는 일을 배우라.
성인의 길은 홀로 있음이라고 하였다.
홀로 있어야만 즐거울 수 있다.

'For the sake of a solitary life and for the sake of the service that is to be carried out by Samanas, let him learn, solitariness is called wisdom[3]; alone indeed he will find pleasure.

 

*3. Ekattam monam akkhatam.

 

(719)
그렇게 하면 그는 시방(十方)에 빛이 나리라.
속된 즐거움을 버리고 명상하고 있는
여러 현자들의 명성을 들으면,
내 제자는 더욱더 부끄러움과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

'Then he will shine through the ten regions, having heard the voice of the wise, of the meditating, of those that have abandoned sensual pleasures, let my adherent then still more devote himself to modesty and belief.

 

(720)
이 일을 깊은 늪과 얕은 개울물의 비유로 알아라.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내며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없이 흐르는 법이다.

'Understand this from the waters in chasms and cracks: noisy go the small waters, silent goes the vast ocean[1].

 

(721)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 찬 연못과 같다.

'What is deficient that makes a noise, what is full that is calm; the fool is like a half-(filled) water-pot, the wise is like a full pool.

 

(722)
사문이 의미 있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직접 알고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많은 것을 말한다.

'When the Samana speaks much that is possessed of good sense, he teaches the Dhamma while knowing it, while knowing it he speaks much[2].

 

(723)
그러나 스스로 알고 자제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에 알맞다.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을 체득한 것이다."

'But he who while knowing it is self-restrained, and while knowing it does not speak much, such a Muni deserves wisdom (mona), such a Muni has attained to wisdom (mona)[3].'

 

*1. Tan nadihi viganatha
Sobbhesu padaresu ka:
Sananta yanti kussobbha
Tunhi yati mahodadhi.

*2. Yam samano bahu bhasati
Upetam atthasamhitam
Ganam so dhammam deseti
Ganam so bahu bhasati.

*3. Yo ka ganam samyatatto
Ganam na bahu bhasati
Sa muni monam arahati
Sa muni monam agghaga.

 

 

- Nalakasutta is ended.

 

 

* 높고 낮은 여러 가지 길(道) : 빠르게 깨닫는 좋은 길, 더디게 깨닫는 사나운 길
* 면도날의 비유 : 면도날에 붙은 꿀을 핥을 때처럼 조심하라

 

 

3-12. 두 가지 관찰

DVAYATANUPASSANASUTT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의 동원(東園)에 있는
미가아라 장자 어머니의 누각(鹿子母講堂) 안에 계시었다.
그 때 거룩하신 스승은 정기적인 집회(布薩) 날인 달 밝은 보름밤에
수행승(비구)의 무리에 둘러 싸여 집밖에 계시었다.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승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여러 수행승들이여, 착하고 거룩하게 세속을 떠나고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법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착하고 거룩하고 세속을 떠나고
깨닫게 하는 여러 가지 법을 듣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두 가지 씩의 법을 여실(如實)하게 알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두 가지란 무엇이냐고 한다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그침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이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면서 지내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證得)하든가,
혹은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o it was heard by me:

At one  time Bhagavat dwelt at Savatthi in Pubbarama, Migaramatar's mansion. At that time Bhagavat on the Uposatha day[4], on the fifteenth,

it being full moon, in the evening was sitting in the open air, surrounded by the assembly of Bhikkhus. Then Bhagavat surveying the silent assembly of Bhikkhus addressed them (as follows):

'Whichever Dhammas there are, O Bhikkhus, good, noble, liberating, leading to perfect enlightenment,--what is the use to you of listening to these good, noble, liberating Dhammas, leading to perfect enlightenment? If, O Bhikkhus, there should b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answered thus: "Yes, for the right understanding of the two Dhammas." "Which two do you mean?" "(I mean), this is pain, this is the origin of pain," this is one  consideration, "this is the destruction of pain, this is the way leading to the destructio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1],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4. See Rhys Davids, Buddhism, p. 140.

 

 

(724)
"괴로움을 모르고, 또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모르며,
괴로움이 남김없이 없어지는 곳도,
괴로움의 없음에 도달하는 길도 모르는 사람들.

 

'Those who do not understand pain and the origin of pain, and where pain wholly and totally is stopped, and do not know the way that leads to the cessation of pain,

 

(725)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고, 지혜의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가 없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는다.

'They, deprived of the emancipation of thought and the emancipation of knowledge, are unable to put an end (to samsara), they will verily continue to undergo birth and decay.

 

*1. . . . ka upanisa savanaya,'ti iti ke bhikknave pukkhitaro assu te evam assu vakaniya: yavad eva dvayatanam dhammanam yathabhutam nanaya 'ti, kinka dvayatam vadetha? 'idam dukkham, ayam dukkhasamudayo' ti ayam ekanupassana, 'ayam dukkhanirodho, ayam dukkhanirodhagamini patipada' ti ayam dutiyanupassana; evam sammadvayatanupassino . . .

 

(726)
그러나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남김 없이 없어지는 곳을 알고,
또한 괴로움의 없어짐에 이르는 길을 안 사람들,

'And those who understand pain and the origin of pain, and where pain wholly and totally is stopped, and who know the way that leads to the cessation of pain,

 

(727)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지혜의 해탈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가 있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지 않는다."

'They, endowed with the emancipation of thought and the emancipation of knowledge, are able to put an end (to samsara), they will not undergo birth and decay.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할 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무슨 까닭인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을 모두
소인(素因)에 연(緣)하여 생기는 것이다.' 라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고, 그러나 소인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혹은 만약번뇌가 아직 남아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다시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upadhis (elements of existence),"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upadhi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28)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괴로움은
생존의 소인(素因)에 연(緣)하여 일어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그 생존의 연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이야말로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똑똑히 알고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관찰해 소인을 짓지 말아라."

'Whatever pains there are in the world, of many kinds, they arise having their cause in the upadhis; he who being ignorant creates upadhi, that fool again undergoes pain; therefore being wise do not create upadhi, considering what is the birth and origin of pain.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무명(無明)으로 연해서 생긴다'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무명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고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만약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헤매는 이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avigga (ignorance),"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avigga,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13)
그는 바리때를 손에 들고 돌아다니며,
벙어리는 아닌데 벙어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주는 것(施物)이 적다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도 안된다.

 

"Wandering about with his alms-bowl in his hand, considered dumb without being dumb, let him not blush at a little gift, let him not despise the giver.

 

(714)
사문(부처님)은 높고 낮은 여러 가지 도(道)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거듭 피안에 이르는 일은 없으나 한 번에 이르는 일도 없다.

'Various are the practices illustrated by the Samana, they do not go twice to the other shore, this (is) not onc e thought[1].

 

*1. Ukkavaka hi patipada
Samanena pakasita,
Na param digunam yanti,
Na idam ekagunam mutam.

 

(715)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에게는 집착이 없다.
해야 할 선(善)도, 하지 말아야 할 악도 버렸기 때문에
번뇌가 없다."

'For whom there is no desire, for the Bhikkhu who has cut off the stream (of existence) and abandoned all kinds of work, there is no pain.

 

(716)
스승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성자의 길을 말하리라.
음식을 얻을 때에는 면도날의 비유처럼 하여라.
혀를 입천정에 붙이고 배에 대해서는 자제하라.

'I will declare to thee the state of wisdom,'--so said Bhagavat,--'let one  be like the edge of a razor, having struck his palate with his tongue, let him be restrained in (regard to his) stomach.

 

(717)
마음이 침체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쓸데없이 많은 것을 생각해서도 안된다.
비린내가 없이, 걸림이 없이,
청정한 행을 궁극의 의지처로 삼아라.

'Let his mind be free from attachment, let him not think much[2] (about worldly affairs), let him be without defilement, independent, and devoted to a religious life.

 

*2. Na kapi bahu kintaye.

 

(718)
홀로 앉는 일과 사문에게 봉사하는 일을 배우라.
성인의 길은 홀로 있음이라고 하였다.
홀로 있어야만 즐거울 수 있다.

'For the sake of a solitary life and for the sake of the service that is to be carried out by Samanas, let him learn, solitariness is called wisdom[3]; alone indeed he will find pleasure.

 

*3. Ekattam monam akkhatam.

 

(719)
그렇게 하면 그는 시방(十方)에 빛이 나리라.
속된 즐거움을 버리고 명상하고 있는
여러 현자들의 명성을 들으면,
내 제자는 더욱더 부끄러움과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

'Then he will shine through the ten regions, having heard the voice of the wise, of the meditating, of those that have abandoned sensual pleasures, let my adherent then still more devote himself to modesty and belief.

 

(720)
이 일을 깊은 늪과 얕은 개울물의 비유로 알아라.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내며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없이 흐르는 법이다.

'Understand this from the waters in chasms and cracks: noisy go the small waters, silent goes the vast ocean[1].

 

(721)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 찬 연못과 같다.

'What is deficient that makes a noise, what is full that is calm; the fool is like a half-(filled) water-pot, the wise is like a full pool.

 

(722)
사문이 의미 있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직접 알고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많은 것을 말한다.

'When the Samana speaks much that is possessed of good sense, he teaches the Dhamma while knowing it, while knowing it he speaks much[2].

 

(723)
그러나 스스로 알고 자제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에 알맞다.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을 체득한 것이다."

'But he who while knowing it is self-restrained, and while knowing it does not speak much, such a Muni deserves wisdom (mona), such a Muni has attained to wisdom (mona)[3].'

 

*1. Tan nadihi viganatha
Sobbhesu padaresu ka:
Sananta yanti kussobbha
Tunhi yati mahodadhi.

*2. Yam samano bahu bhasati
Upetam atthasamhitam
Ganam so dhammam deseti
Ganam so bahu bhasati.

*3. Yo ka ganam samyatatto
Ganam na bahu bhasati
Sa muni monam arahati
Sa muni monam agghaga.

 

 

- Nalakasutta is ended.

 

 

* 높고 낮은 여러 가지 길(道) : 빠르게 깨닫는 좋은 길, 더디게 깨닫는 사나운 길
* 면도날의 비유 : 면도날에 붙은 꿀을 핥을 때처럼 조심하라

 

 

3-12. 두 가지 관찰

DVAYATANUPASSANASUTT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의 동원(東園)에 있는
미가아라 장자 어머니의 누각(鹿子母講堂) 안에 계시었다.
그 때 거룩하신 스승은 정기적인 집회(布薩) 날인 달 밝은 보름밤에
수행승(비구)의 무리에 둘러 싸여 집밖에 계시었다.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승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여러 수행승들이여, 착하고 거룩하게 세속을 떠나고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법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착하고 거룩하고 세속을 떠나고
깨닫게 하는 여러 가지 법을 듣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두 가지 씩의 법을 여실(如實)하게 알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두 가지란 무엇이냐고 한다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그침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이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면서 지내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證得)하든가,
혹은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o it was heard by me:

At one  time Bhagavat dwelt at Savatthi in Pubbarama, Migaramatar's mansion. At that time Bhagavat on the Uposatha day[4], on the fifteenth,

it being full moon, in the evening was sitting in the open air, surrounded by the assembly of Bhikkhus. Then Bhagavat surveying the silent assembly of Bhikkhus addressed them (as follows):

'Whichever Dhammas there are, O Bhikkhus, good, noble, liberating, leading to perfect enlightenment,--what is the use to you of listening to these good, noble, liberating Dhammas, leading to perfect enlightenment? If, O Bhikkhus, there should b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answered thus: "Yes, for the right understanding of the two Dhammas." "Which two do you mean?" "(I mean), this is pain, this is the origin of pain," this is one  consideration, "this is the destruction of pain, this is the way leading to the destructio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1],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4. See Rhys Davids, Buddhism, p. 140.

 

 

(724)
"괴로움을 모르고, 또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모르며,
괴로움이 남김없이 없어지는 곳도,
괴로움의 없음에 도달하는 길도 모르는 사람들.

 

'Those who do not understand pain and the origin of pain, and where pain wholly and totally is stopped, and do not know the way that leads to the cessation of pain,

 

(725)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고, 지혜의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가 없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는다.

'They, deprived of the emancipation of thought and the emancipation of knowledge, are unable to put an end (to samsara), they will verily continue to undergo birth and decay.

 

*1. . . . ka upanisa savanaya,'ti iti ke bhikknave pukkhitaro assu te evam assu vakaniya: yavad eva dvayatanam dhammanam yathabhutam nanaya 'ti, kinka dvayatam vadetha? 'idam dukkham, ayam dukkhasamudayo' ti ayam ekanupassana, 'ayam dukkhanirodho, ayam dukkhanirodhagamini patipada' ti ayam dutiyanupassana; evam sammadvayatanupassino . . .

 

(726)
그러나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남김 없이 없어지는 곳을 알고,
또한 괴로움의 없어짐에 이르는 길을 안 사람들,

'And those who understand pain and the origin of pain, and where pain wholly and totally is stopped, and who know the way that leads to the cessation of pain,

 

(727)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지혜의 해탈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가 있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지 않는다."

'They, endowed with the emancipation of thought and the emancipation of knowledge, are able to put an end (to samsara), they will not undergo birth and decay.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할 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무슨 까닭인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을 모두
소인(素因)에 연(緣)하여 생기는 것이다.' 라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고, 그러나 소인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혹은 만약번뇌가 아직 남아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다시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upadhis (elements of existence),"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upadhi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28)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괴로움은
생존의 소인(素因)에 연(緣)하여 일어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그 생존의 연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이야말로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똑똑히 알고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관찰해 소인을 짓지 말아라."

'Whatever pains there are in the world, of many kinds, they arise having their cause in the upadhis; he who being ignorant creates upadhi, that fool again undergoes pain; therefore being wise do not create upadhi, considering what is the birth and origin of pain.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무명(無明)으로 연해서 생긴다'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무명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고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만약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헤매는 이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avigga (ignorance),"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avigga,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숫타니파타

(Sutta-nipata)

제3 장 대품(大品)

MAHAVAGGA.

-큰 이야기

3-11. 나라까

NALAKASUTTA.

The Isi Asita, also called Kanhasiri, on seeing the gods rejoicing, asks the cause of it, and having heard that Buddha has been born, he descends from Tusita heaven. When the Sakyas showed the child to him, he received it joyfully and prophesied about it. Buddha explains to Nalaka, the sister's son of Asita, the highest state of wisdom.--Compare Lalita-vistara, Adhyaya VII; Asita and Buddha, or the Indian Simeon, by J. Muir, in the Indian Antiquary, Sept. 1878.

서(序)

Vatthugatha.

 

(679)
아시따 선인(仙人)은 한낮의 휴식 때에,
정결한 옷을 입은 서른 명이나 되는 천신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옷을 벗어 들고
공손히 제석천(帝釋天)을 극구 찬탄하는 것을 보았다.

The Isi Asita saw in (their) resting-places during the day the joyful, delighted flocks of the Tidasa gods, and the gods in bright clothes, always highly praising Inda, after taking their clothes and waving them.

 

(680)
기뻐서 뛰노는 천신들을 보고 선인은 공손하게 물었다.
"천신들이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 당신들은 옷을 벗어 흔들고 있는 것입니까?

Seeing the gods with pleased minds, delighted, and showing his respect, he said this on that occasion: 'Why is the assembly of the gods so exceedingly pleased, why do they take their clothes and wave them?

 

(681)
만일 아수라와의 싸움에서 천신들이 이기고
아수라가 졌다 할지라도 몸의 털을 곤두세울 만큼
그토록 기뻐할 수는 없을 터인데,
어떤 희귀한 일이 있기로 그처럼 기뻐하는 것입니까?

'When there was an encounter with the Asuras, a victory for the gods, and the Asuras were defeated, then there was not such a rejoicing. What wonderful (thing) have the gods seen that they are so delighted?

 

(682)
그들은 소리치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고
손뼉을 치면서 춤을 춥니다.
나는 수미산 꼭대기에 살고 있는 당신들께 묻습니다.
존경하는 분들이여, 제 궁금증을 어서 풀어 주십시오."

'They shout and sing and make music, they throw (about their) arms and dance; I ask you, the inhabitants of the tops of (mount) Meru, remove my doubt quickly, O venerable one s!'

 

(683)
천신들은 대답했다.
"비할 데 없이 묘한 보배인 저 보살(미래의 부처님)은
모든 사람의 유익과 안락을 위해 인간세계에 태어 났습니다.
석가 족 마을 룸비니 마을에.
그래서 우리는 만족해하고 기쁨에 넘쳐 있는 것입니다.

'The Bodhisatta, the excellent pearl, the incomparable, is born for the good and for a blessing in the world of men, in the town of the Sakyas, in the country of Lumbini. Therefore we are glad and exceedingly pleased.

(684)
무릇 살고 있는 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
가장 높은 사람, 황소 같은 사람,
살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분은,
머지 않아 선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숲에서 법바퀴(法輪)를 굴릴 것입니다.
용맹스런 사자가 뭇 짐승들을 이기고 포효를 하듯이."

'He, the most excellent of all beings, the preeminent man, the bull of men, the most excellent of all creatures will turn the wheel (of the Dhamma) in the forest called after the Isis, (he who is) like the roaring lion, the strong lord of beasts.'

 

(685)
그 선인은 천신들의 그 말을 듣자 급히 인간세계로 내려 왔다.
그리고 숫도다나왕의 궁전에 가까이 가서
거기에 앉아서 석가 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Having heard that noise he descended from (the heaven of) Tusita. Then he went to Suddhodana's palace, and having sat down there he said this to the Sakyas: 'Where is the prince? I wish to see (him).'

 

(686)
그리하여 석가족들은 솜씨 있는 금공(金工)이 만든
황금처럼 반짝이며 행복에 빛나는 거룩한 아기의 얼굴을
아시따 선인에게 보였다.

Then the Sakyas showed to (the Isi), called Asita, the child, the prince who was like shining gold, manufactured by a very skilful (smith) in the mouth of a forge, and beaming in glory and having a beautiful appearance.

 

(687)
불꽃처럼 빛나고 하늘의 달처럼 맑으며,
구름을 헤치고 비치는 가을 태양처럼 환한 아기를 보고
환희에 넘쳐 몹시 기뻐했다.

Seeing the prince shining like fire, bright like the bull of stars wandering in the sky, like the burning sun in autumn, free from clouds, he joyfully obtained great delight.

 

(688)
천신들은 뼈가 많고 천개의 둥근 고리가 달린
산개(傘蓋)를 공중에 펼쳤다.
또 황금 자루가 달린 불자(拂子)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나 불자나 양산을 손에 쥔 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The gods held in the sky a parasol with a thousand circles and numerous branches, yaks' tails with golden sticks were fanned, but those who held the yaks' tails and the parasol were not seen.

 

(689)
깡하시리(아시타)라는 머리에 뾰쪽하게 상투를 틀어 올려서
머리를 딴 선인은, 머리 위에 흰 양산을 가리고
빨간 모포에 싸여 있는 황금 패물 같은 악기를 보고
기뻐서 가슴에 안았다.

The Isi with the matted hair, by name Kanhasiri, on seeing the yellow blankets (shining) like a golden coin, and the white parasol held over his head, received him delighted and happy.

 

(690)
관상(觀相)와 신주(神呪:베에다)에 정통한 그는
황소같이 훌륭한 석가 족의 아기를 안고
그 유다른 상(相)을 살피더니 환성을 질렀다.
"이 아기는 위 없는 사람,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And having received the bull of the Sakyas, he who was wishing to receive him and knew the signs and the hymns, with pleased thoughts raised his voice, saying: 'Without superior is this, the most excellent of men.'

 

(691)
그러더니, 선인은 자기의 얼마 남지 않는 생애를 생각하고,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선인이 우는 것을 보고 석가 족들은 물었다.
"우리 왕자에게 무슨 장애라도 있단 말인가?"

Then remembering his own migration he was displeased and shed tears; seeing this the Sakyas asked the weeping Isi, whether there would be any obstacle in the prince's path.

 

(692)
석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선인은 말했다.
"왕자에게 어떤 불길한 상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 그에게 장애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평범한 상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길러주십시오.

Seeing the Sakyas displeased the Isi said: 'I do not remember anything (that will be) unlucky for the prince, there will be no obstacles at all for him, for this is no inferior (person). Be without anxiety.

 

(693)
이 왕자는 바른 깨달음의 궁극에 이를 것입니다.
이 아기는 가장 으뜸가는 청정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불쌍히 여김으로
법바퀴(法輪)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행(梵行)은 널리 펼쳐질 것입니다.

' This prince will reach the summit of perfect enlightenment, he will turn the wheel of the Dhamma, he who sees what is exceedingly pure (i.e. Nibbana), this (prince) feels for the welfare of the multitude, and his religion[1] will be widely spread.

 

(694)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 내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도중에서 내게는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나는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My life here will shortly be at an end, in the middle (of his life) there will be death for me; I shall not hear the Dhamma of the incomparable one ; therefore I am afflicted, unfortunate, and suffering.'

 

(695)
청정한 수행자 아시따 선인은
석가족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고 궁중을 떠나갔다.
그는 자기의 조카 나라까를 가엾게 여기어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교법을 따르도록 하였다.

Having afforded the Sakyas great joy he went out from the interior of the town to lead a religious life; but taking pity on his sister's son, he induced him to embrace the Dhamma of the incomparable one .

 

(696)
"만일 네가 나중에 `깨달은 분이 있어서 바른 깨달음을 얻고
진리(法)의 길을 간다'는 말을 듣거든, 그 때 그곳으로 가서
그 분의 가르침을 잘 물어보고 그분 밑에서 청정행을 닦아라."

'When thou hearest from others the sound "Buddha," (or) "he who has acquired perfect enlightenment walks the way of the Dhamma," then going there and enquiring about the particulars, lead a religious life with that Bhagavat.'

 

(697)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미래에 있어서 최상의 청정행을 예견한
그 성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온갖 착한 일을 쌓은
나라까는 승자(勝者 = 부처님)를 기다리면서
스스로의 감관을 지키고 살아갔다.

Instructed by him, the friendly-minded, by one  who saw in the future what is exceedingly pure (i.e. Nibbana), he, Nalaka, with a heap of gathered-up good works, and with guarded senses dwelt (with him), looking forward to Gina (i.e. Buddha).

 

(698)
훌륭한 승자가 법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고,
아시따 선인의 가르침이 실현된 때에
으뜸가는 선인(부처님)을 가서 보고 기뻐하며
거룩한 성인에게 행을 물었다.

Hearing the noise, while the excellent Gina turned the wheel (of the Dhamma), and going and seeing the bull of the Isis, he, after being converted, asked the eminent Muni about the best wisdom, when the time of Asita's order had come.

- The Vatthugathas are ended.

- 이상으로 서문의 게송(偈)은 끝났다 -

 

*1. Brahmakariyam = sasanam. Commentator.

 

(699)
나라까가 말했다.
"아시따가 들려 준 말을 여실(如實)하게 알았습니다.
그러하오니 고오타마시여,
모든 것에 통달하신 당신께 묻겠습니다.

'These words of Asita are acknowledged true (by me), therefore we ask thee, O Gotama, who art perfect in all things (dhamma).

 

(700)
저는 출가하여 탁발(托鉢)의 행을 쌓으려 하오니,
성인이시여, 성스러운 행과 가장 으뜸가는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O Muni, to me who am houseless, and who wish to embrace a Bhikkhu's life, explain when asked the highest state, the state of wisdom (moneyya).'

 

(701)
스승(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에게 성스러운 행을 일러 주리라.
이것은 행하기 어렵고 이루기 힘들다.
이제 내가 그대에게 그것을 알려 줄 것이니, 마음을 굳건히 하라.

'I will declare to thee the state of wisdom,'--so said Bhagavat,--'difficult to carry out, and difficult to obtain; come, I will explain it to thee, stand fast, be firm.

 

(702)
마을에서 욕을 먹든지 절을 받든지
한결 같은 태도로 대하여라.
욕을 먹더라도 마음에 성내지 말며,
절을 받더라도 우쭐거리지 말고 냉정하여라.

'Let a man cultivate equanimity: which is (both) reviled and praised in the village, let him take care not to corrupt his mind, let him live calm, and without pride.

 

(703)
가령 동산의 숲속에 있더라도
불꽃처럼 여러 가지가 나타난다. 아낙네들은 성자를 유혹한다.
아낙네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말라.

'Various (objects) disappear, like a flame of fire in the wood[1]; women tempt the Muni, let them not tempt him.

 

(704)
성행법(性行法:邪淫)에서 떠나라.
온갖 욕망을 버리라.
약하고 강한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적대시하지 말고 애착하지도 말라.

'Let him be disgusted with sexual intercourse, having left behind sensual pleasures of all kinds, being inoffensive and dispassionate towards living creatures, towards anything that is feeble or strong.

 

(705)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여,
냄 모에 비교하여 생물을 죽여서는 안된다.
또한 남들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도 안된다.

'As I am so are these, as these are so am I, identifying himself with others, let him not kill nor cause (any one ) to kill[2].

 

(706)
범부가 집착하는 욕망과 욕심을 떠나
눈 있는 사람은 길을 가라. 지옥을 건너 가라.

'Having abdoned desire and covetousness let him act as one  that sees clearly where a common man sticks, let him cross over this hell.

 

*1. Ukkavaka nikkharanti
Daye aggisikhupama.

*2. Yatha aham tatha ete
Yatha ete tatha aham
Attanam upamam katva
Na haneyya na ghataye.
Comp.
Dhp v. 129.

 

(707)
배를 주리고 음식을 절제하여
욕심을 없애고 탐내지 말라.
욕망을 버리면 욕심이 없어 평안하고 고요하다.

'Let him be with an empty stomach, taking little food, let him have few wants and not be covetous; not being consumed by desire he will without desire be happy.

 

(708)
그 성자는 탁발을 끝내고 숲에 돌아와
나무 아래 머물러 앉아야 한다.

'Let the Muni, after going about for alms, repair to the outskirts of the wood, let him go and sit down near the root of a tree.

 

(709)
그 현자는 전신의 참선에 전념하고 숲가에서 즐기며
나무 아래서 명상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
'Applying himself to meditation, and being wise, let him find his pleasure in the outskirts of the wood, let him meditate at the root of a tree enjoying himself.


(710)
날이 새면 마을로 가야 한다.
신도에게서 초대를 받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가져올지라도 결코 기뻐하지 말라.

'Then when night is passing away let him repair to the outskirts of the village, let him not delight in being invited nor in what is brought away from the village.

 

(711)
성자는 마을에 이르러
집들을 조급하게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음식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일부러 말을 만들어서 하면 안된다.

'Let not the Muni, after going to the village, walk about to the houses in haste; cutting off (all) talk while seeking food, let him not utter any coherent speech[1].

 

*1. Na vakam payutam bhane.

 

(712)
"음식을 얻어서 잘 됐다" "얻지 못한 것도 좋다" 생각하고,
완전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라도 태연히 돌아온다.
마치 과일을 얻으려고 나무 밑에 간 사람이
과일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태연히 돌아오는 것처럼.

'"What I have obtained that is good," "I did not get (anything that is) good," so thinking in both cases he returns to the tree unchanged[2].

 

*2. Alattham yad idam sadhu
Nalattham kusalam iti,
Ubhayen' eva so tadi[*]

Rukkham va upanivattati.

*. Tadi = nibbikaro. Commentator.

 

(729)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되풀이하여 윤회를 받는 사람들이
가는 그 길(歸趣)은 무명에만 달려있다.

'Those who again and again go to samsara with birth and death, to existence in this way or in that way,--that is the state of avigga.

 

(730)
이 무명이란 커다란 어리석음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랜 윤회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밝은 지혜에 이른 중생들은 다시 생존을 받는 일이 없다."

'For this avigga is the great folly by which this (existence) has been traversed long, but those beings who resort to knowledge do not go to rebirth.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형성력(形成力:行)으로 연해 생긴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형성력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한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만약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samkharas (matter),"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samkhara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31)
"어떠한 괴로움이든 모두 형성력으로 연해 생긴다.
모든 형성력이 없어진다면 괴로움이 생기지도 않는다.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samkharas, by the destruction of the samkharas there will be no origin of pain.

 

(732)
'괴로움은 형성력으로 연해 생긴다'는 이 걱정을 알고,
모든 형성력을 없애고 욕심 따위의 여러 생각을 끊는다면,
괴로움은 없어지고 만다. 이것을 여실하게 알고,

'Looking upon this pain that springs from the samkharas as misery, from the cessation of all the samkharas, and from the destruction of consciousness will arise the destruction of pain, having understood this exactly,

 

(733)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안 현자들, 베에다에 통달한 사람들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The wise who have true views and are accomplished, having understood (all things) completely, and having conquered all association with Mara, do not go to re-birth.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방법은 없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누가 묻거든
`있다' 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식(識)으로 연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식별작용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앤다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고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만약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vinnana (consciousness),"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vinnanana,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34)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식별작용으로 연해 일어난다.
식별작용이 소멸된다면 괴로움이 생길 수 없다.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vinnana, by the destruction of vinnana there is no origin of pain.

 

(735)
'괴로움은 식별작용에 연해 일어난다'는 이 걱정을 알아
식별 작용을 고요히 가라앉힌 수행승은,
탐냄이 없이 완전한 고요(열반)에 든다."

'Looking upon this pain that springs from vinnana as misery, from the cessation of vinnana a Bhikkhu free from desire (will be) perfectly happy (parinibbuta).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은 있는가 라고
그대들에게 누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접촉으로 연해서 일어난다'고 함이 그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접촉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 만약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phassa (touch),"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phassa,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36)
"접촉에 붙들여서 생존의 물결에 밀리며,
사도(邪道)에 든 사람은 속박을 끊기 어렵다.

'For those who are ruined by phassa, who follow the stream of existence, who have entered a bad way, the destruction of bonds is far off.

 

(737)
그러나 접촉을 잘 알아 고요를 즐기는 사람은,
실로 접촉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탐냄이 없이
완전한 고요에 든다."

'But those who, having fully understood phassa, knowingly have taken delight in cessation, they verily from the comprehension of phassa, and being free from desire, are perfectly happy.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모두 감수(感受)로 연해서
일어난다'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모든 감수(感受)를 남김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개의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만약 아직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迷妄) 생존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vedanas (sensations),"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vedana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38)
"즐겁든 괴롭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건 간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감수된 것은 모두,

'Pleasure or pain, together with want of pleasure and want of pain, whatever is perceived internally and externally,

 

(739)
괴로움이라 알고, 없어지고 말 허망한 사물을 감촉할 때마다
소멸을 인정하고 그렇게 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떠난다.
온갖 감수가 소멸하기 때문에 수행승은 탐냄이 없이
완전한 고요에 든다."

'Looking upon this as pain, having touched what is perishable and fragile, seeing the decay (of everything), the Bhikkhu is disgusted, having from the perishing of the vedanas become free from desire, and perfectly happy.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애착(愛)으로 연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갈증과 애착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고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만약 번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anha (desire),"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anha,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40)
"갈망과 애착을 벗삼는 사람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영원히 윤회하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A man accompanied by tanha, for a long time transmigrating into existence in this way or that way, does not overcome transmigration (samsara).

(741)

'갈망과 애착은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다' 라는
이 걱정을 알아, 수행승은 애착을 버리고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Looking upon this as misery, this origin of the pain of tanha, let the Bhikkhu free from tanha, not seizing (upon anything), thoughtful, wander about.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집착(取)으로 연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집착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 만약 아직 번뇌가 남아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upadanas (the seizures),"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upadana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42)
"집착으로 연해 생존이 생긴다.
생존하는 자는 괴로움을 받는다.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있다.
이것이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다.

'The existence is in consequence of the upadanas; he who has come into existence goes to pain, he who has been born is to die, this is the origin of pain.

 

(743)
그러므로 현자들은 집착이 소멸되는 까닭을 바르게 알고,
태어남의 소멸을 잘 알아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Therefore from the destruction of the upadanas the wise with perfect knowledge, having seen (what causes) the destruction of birth, do not go to re-birth.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기동(起動)에 의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기동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 만약 아직 번뇌가 남아 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arambhas (exertions),"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arambha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44)
"어떠한 괴로움도 모두 기동(起動)으로 연하여 생긴다.
모든 기동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arambhas, by the destruction of the arambhas there is no origin of pain.

(745)
'괴로움은 기동으로 연해 생긴다'는 이 걱정을 알아
모든 기동을 버리고, 기동이 없는 상태에서 해탈하여,

(746)
생존에 대한 애착을 끊고 마음이 고요한 수행승은
생의 윤회를 벗어난다. 그는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Looking upon this pain that springs from the arambhas as misery, having abandoned all the arambhas, birth and transmigration have been crossed over by the Bhikkhu who is liberated in non-exertion, who has cut off the desire for existence, and whose mind is calm; there is for him no re-birth.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食으로 연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식(食)을 남김 없이 떠나고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 만약 아직 번뇌가 남아있다면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Should there be a perfect consideration of the Dyad in another way," if, O Bhikkhus, there are people that ask so, they shall be told, there is, and how there is: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aharas (food?)," this is one  consideration, "but from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aharas, through absence of passion, there is no origin of pain," this is the second consideration; thus, O Bhikkhus, by the Bhikkhu that considers the Dyad duly, that is strenuous, ardent, resolute, of two fruits one  fruit is to be expected: in this world perfect knowledge, or, if any of the (five) attributes still

remain, the state of an Anagamin (one that does not return).' This said Bhagavat, (and) when Sugata had said this, the Master further spoke:

 

(747)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모두
식(食)으로 연해 생긴다. 모든 식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Whatever pain arises is all in consequence of the aharas, by the destruction of the aharas there is n